에어컨에서 태양전지 사업까지 과감한 도전과 혁신으로 난관 극복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외판원 거쳐 CEO 변신… 66세 고령에도 '新 성장동력 찾기' 열정 활활

지난 10월 30일 신성이엔지는 2012년까지 연간 200메가와트를 생산할 수 있는 태양전지 생산능력을 확보해 매출액 4,700억 원, 영업이익률 23.9%를 달성하고, 2015년까지는 세계 톱10의 태양전지 회사가 되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대단한 야심이 아닐 수 없다.

1980년대 반도체 클린룸 사업으로 기반을 잡은 데 이어 90년대 반도체 핵심장비인 FFU(fan filter unit)를 국산화한 이 회사는 2004년부터 3년 연속 2,000억원 대의 매출을 올렸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성장엔진을 찾아 태양전지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인의 소개를 받고 이완근(66) 신성이엔지 회장의 집무실을 찾았다. 첫 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흰 머리에 안광이 빛났다.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내공이 느껴졌다.

많은 기업체 오너들이 그러하듯이 그 역시 초년 고생을 많이 했다. 농사가 짓기 싫어 공부를 선택해 학교를 마쳤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을 하고 싶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물을 먹고’ 외판사원으로 사회에 첫 걸음을 내딛는다. 와이셔츠, 책, 카펫 등이 그가 처음 팔러 다닌 아이템들이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에어컨 영업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뛰어난 영업실력을 발휘하면서 성과를 낸다. 당시 공무원 월급의 몇 배를 받기도 했다. 에어컨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영업을 하다가 친구와 함께 직접 회사를 차린 것이다.

도전은 쉽지 않았다. 77년 당시 냉동기 시장 분야는 경원세기, 범양냉방, 동흥전기의 3파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틈새시장을 공략하기로 한다. 전산실용 에어컨이 그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첫 번째 성공의 희열도 잠시. 창업 후 2년 만에 찾아온 석유파동의 직격탄을 맞아 직원의 50%를 구조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금 압박도 계속되어 여기저기서 돈을 꾸는 것이 그의 일과가 됐다. 월급날만 되면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신용보증을 받아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제습기 시장의 가능성을 보게 됐다. 어렵사리 서울대 규장각에 처음 제습기를 납품하게 되면서 이를 계기로 조선소에도 제습기 시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공정상 바다 위에서 페인트를 칠해야만 하는 조선산업은 제습이 골칫거리였는데 그는 이 문제를 멋지게 해결하면서 잭팟을 터트렸다. 신성이엔지의 선박용 제습기는 현대조선소를 시작으로 다른 조선소에도 날개가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그는 이를 계기로 신성의 성장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핵심역량 중 하나는 ‘고객집중’이다. 한 번 잡은 고객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전 엔지니어 출신이 아닙니다. 교육대를 졸업하고 교사가 될 뻔한 사람이죠. 낯선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남들보다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한 번 만난 고객은 어떻게 해서든 만족시켜야 합니다. 현대조선소에서 만난 분은 까다로웠습니다. 죽기 살기로 그의 요구대로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한 번 신뢰를 쌓게 되니까 그 분이 제 영업을 대신 하더군요.”

기회는 기회의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도전, 짜증스런 요구, 위기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기회가 오기만 기다린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도전을 했을 뿐입니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면서 반도체용 클린룸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문의를 해왔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자신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날아가 온갖 곳을 쑤시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노무라연구소가 관련 자료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관계자를 만나고 설득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클린룸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클린룸 사업은 이제 국내 1인자에 올랐습니다. 세계 어느 회사와 경합을 벌여도 손색이 없습니다.”

사실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는 과감하게 도전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신성을 만들었다.

그는 늘 변화를 추구했다. 신성이엔지를 중심으로 신성엔지니어링, 신성서비스, 루디스, 싸이맥스, 아이텍, 우리기술투자 등 다양한 사업 분야로 진출했다. 한 가지 사업만으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계속 변화하도록 한 것이다. 공조기 분야에서 클린룸 사업으로, 여기서 다시 자동화 시스템으로, 또 태양전지 사업으로….

신성은 70년대 말 석유파동 못지않은 큰 위기를 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겪어야만 했다. 외환위기 이전 1,000억 원이 넘었던 매출은 그 이후 380억 원 대로 급전직하했다. 신성의 사업은 수주 산업이라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발 빠른 구조조정에 나서 다시 1,000억 원 대 매출을 회복하지만 반도체 불황이 찾아온 2001년과 2002년 또 다시 어려움에 직면한다. 한 차례 더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노사 갈등이 불거질 법도 했지만 노사간에 다져진 신뢰로 이를 극복해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성장을 멈추는 순간 죽기 시작한다. 신성이엔지는 끊임없이 변화했고 지금도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 회장 역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외판원을 거쳐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환갑을 여섯 해나 넘긴 나이지만 아직 팔팔한 현역이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도 갖고 있다. 얼마 전 언론에 발표한 태양광 산업이 그것이다. 매년 40%의 성장이 예상되는 태양광 산업은 차세대 에너지 개발과 환경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사업이다.

모든 성공이 그러하듯 그의 성공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실, 도전, 꾸준한 노력, 사람에 대한 애정 등이 뒷받침되어 오늘날의 그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같은 삶의 궤적은 우아한 얼굴에 나타난다. 그는 단순히 버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재단과 ‘1% 한길기금’을 만드는 등 자신이 모은 부의 사회환원에도 적극적이다. 그 덕분인지 2003년에는 ‘아름다운 얼굴 3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흔히 성공을 이룬 사람의 현재만을 보지만 사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성공을 했으며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회사 경영으로 바쁘디 바쁠 이 회장이 인터뷰를 마친 후 필자가 차를 타는 곳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 간단한 사실 하나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무엇보다 쉽게 알 수 있었다. 역시 아름다운 얼굴은 아름다운 생각이 만든다.

■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한스컨설팅 대표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환경재단 운영위원

환경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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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