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전 세상 떠난 윤영선 선생님은 올곧게 연극인의 길 걷게 해준 평생 은인18년 전 우연히 본 연극 포스터가 입문 계기"주머니는 늘 비어있지만 인생은 행복해… 모자라서 그런지 주연 욕심 별로 없어요"

말하다말고 갑자기 눈이 빨개졌다. 눈물을 참는 듯 했다. 이젠 곁에 없는 한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사무친 모양이었다.

“ 무엇보다 이 상을 윤영선 선생님 영전에 바치고 싶어요. 아니, 어디선가 분명 저를 지켜보고 계실거예요. 대견스러워하시면서.... 제가 이 상을 받은 것을 아시면 얼마나 좋아하실텐데....”

낯가림이 심하고 수줍음도 많은 이 남자가 상을 탄다. 제12회 히서연극상 수상자 연극배우 박수영(37). 수상부문 2개중 <기대되는 연극인상>을 받았다. 한마디로 ‘가능성 높은 젊은 재목’이라는 뜻이다.

2007년 공연작 ‘다리퐁 모단걸’, ‘바다와 양산’등을 비롯해 그는 1989년 데뷔후 지금까지 수십편의 연극에 참여해 왔다. ‘바다와 양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코믹하고 유쾌한 배역 전담이었다.

2006년에는 연극 ‘여행’ 주연으로 서울연극제 인기상도 수상했다. 그런데 무대 밖에서 만난 이 남자는 무대 위의 그와 영 딴판이다. 그리도 배짱좋고 재기넘치던 배우가 아닌, 쑥스럽고 소탈한 청년이 앉아 있다.

■ 얼떨결에 치른 데뷔

“ 원래는 내성적인 성격이예요. 얼마전 만난 초등학교 동창들도 저더러 ‘다른 애라면 이해가 가는데, 너는 정말 (연극배우가 된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하더군요. 저도 ‘사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가’라고 했어요.”

그는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야구부 선수로 생활하다 도중에 접은 후, 고교를 졸업한 뒤 당시 선박의 전기 수리 기술자였던 이모부로부터 일을 배우겠다며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퇴근길에서 우연히 ‘심청 90’이라는 연극 포스터가 붙은 극장을 보았다.

매일 그곳에 드나들며 연극을 보았다. 당시 연출가였던 박은홍씨에게 불쑥 찾아가 ‘직장인을 위한 취미연극반’이 없냐고 물었다가 그 길로 권유받아 아예 단원이 되었다. 부산 가마골 소극장이었다. 화장실 청소에서부터 극장과 계단 청소, 자판기 관리, 매표, 예매처 수금 등 밑바닥 일부터 맡았다.

입단한지 며칠 되지도 않아 ‘사건’이 터졌다. 갑자기 한 출연배우가 위출혈로 쓰러지면서 급히 대타로 무대에 서게 됐다. 하루 동안 꼬박 연습해 빈 자리를 메꿨다. 1인다역으로 등장하는 1시간30분짜리 연극. 다행히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 정말 얼떨결에 데뷔를 한거죠. 무대에서 박수를 받을 때 진짜 기분이 좋았어요. ‘아, 내게 이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이게 나한테 맞구나’하는 걸 그때 처음 느꼈어요”

긴급 대타로 올라선 첫 공연때, 사전예고도 없이 찾아와 박씨의 연기를 조용히 지켜본 이모가 공연후 건넨 첫마디는 ‘너는 이것(연극)을 해야겠구나’였다. 그때부터 그에게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거의 5년간 그렇게 극단에서 살았다. 요즘 영화, 방송가에서도 잘 알려진 연극인 오달수씨나 이해재씨 등도 이때 만난 연극동지들이다.

■ 돈은 안 돼도, 한창 잘 팔리는 배우

1993년 극단 산울림의 초청으로 상경해 ‘바보각시’란 작품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서울에서 새 둥지를 텄다. 연극배우로 산다는 건 즐거웠지만, 주머니는 항상 비어있었다. 생계를 위해 주유소 아르바이트도 하고, 아동극도 하는 등 ‘겉도는’ 생활이 몇 년간 이어졌다.

1999년 겨울, 오달수씨가 ‘이해재와 함께 극단을 만들었다’며 그를 불러들였다. 현재도 그가 한솥밥을 먹고 있는 소속 극단 ‘신기루만화경’이다. 역시 호형호제하며 절친한 관계인 연출가 연출가 이성열씨의 극단 ‘백수광부’의 작품에도 다수 출연, 18년간 선후배, 동료들과 동고동락하며 연극판을 지켜왔다.

주로 조연급이어도 별 불만을 느낀 적이 없다. 주연을 맡은 경험이 딱 네 번. ‘신기루만화경’의 작품에서 두 번, ‘백수광부’에서 두 작품을 통해서였다. 2006년 서울연극제 인기상을 안겨다 준 것도 그중 하나인 작품 ‘여행’을 통해서였다.

“ 아직 제가 정신을 덜 차려서인지, 뭔가 모자라서인지 모르겠지만(웃음) 저는 주연, 조연의 개념이란게 별로 없어요. 오히려 주연을 맡으니까 너무 힘들던데요?(웃음). 저는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역할 그 자체가 좋을 뿐, 주연에 크게 미련이 없어요.”

점차 연극판안에 그의 이름이 퍼지면서 본의아니게 다작 출연 배우가 돼버렸다. 1년에 5-6작품에 출연. 알고보면 마음이 약해서다.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분이 같이 작업하자고 부탁하면 거절할 도리가 없어서’다. 그를 아끼는 한 선배로부터 ‘네가 무슨 탤런트냐’고 야단을 맞은 적도 있다.

■ 홈런은 이제부터.

연출가 이성렬씨가 후배 박씨에 대해 작성한 빽빽한 추천사유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성실하고 겸손하다. 기회를 잡을 줄 안다. 1사만루에 타석에 들어선 4번 타자처럼 기대에 값할 줄 안다>

“ 수상자 통보후 본인인 저보다 더 기뻐해주시는 고마운 선배들이 많아요, 참 행복한 일이죠. 한 선배는 ’넌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는구나, 난 마흔두살까지 포스터 붙이고 다녔는데‘라고도 하시더라구요”

벌써 ‘상 값’을 하는걸까. 그는 오는 2월경 일본에 나가 한일 합작 공연 무대에 선다. 일본 공연이 끝나면 돌아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무대로도 직행한다.

불과 몇 달전 작고한 故 윤영선 선생(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연출가)은 생전 그에게 연극인으로서의 가능성을 과분하리만큼 높이 평가해주고 격려하며 연극의 길을 곧게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스승 이상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선생 얘기만 나오면 울컥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에게 ‘그러다 시상식때 정말 우시겠어요’라고 말을 건네자, 박씨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했다.

“ 아뇨, 시상식때 울지는 않을거예요. 울면 안 돼요. 어머니도 오시는데....”

그를 만난 이틀 뒤인 12월 28일 오후, 박씨는 많은 연극인들의 진심어린 축하와 격려속에 상을 받았다.

■ 히서연극상이란?

한국일보 연극평론전문기자 출신으로, 연극인들의 오랜 존경을 받고 있는 원로 구히서(69)선생의 이름을 딴 시상제다. 연극인들이 가장 선망하는 권위있는 상 중 하나. 1996년에 시작돼, 2007년말 12회째를 맞았다. 거창한 반짝스타보다는 크든 작든 자신의 배역에서 묵묵히 제 몫을 해 낸 역량있는 연극인들을 선정해 시상한다. 수상자에게는 경매를 통해 마련된 상패와 상금이 수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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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