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첼로인생 50주년 기념하는 앨범 발표하고 자선 콘서트 열어정트리오와 이종사촌… 음악 가정서 자라 자연스럽게 연주 입문유학 시절엔 가펑클과 함께 미국 전역 순회하며 상업무대 서기도

첼리스트 이종영(62) 교수의 연구실은 뜻밖에도 황량했다. ‘첼로의 비루투오조’, ‘한국 첼로계의 어머니’등 수많은 수식어와 명성과는 다르게, ‘허(虛)’ 그 자체였다. 넓직한 방 안에 놓인 것이라곤 평범한 소파와 탁자 정도. 사방의 벽면조차 그 흔한 포스터 한 장 붙어있지 않았다. 가장 큰 볼거리라곤 카페트 위에 놓인 이 교수의 첼로 케이스 정도뿐이었다.

“ 난 방에 뭘 꾸미고 장식하고 그런 걸 싫어해요. 그림을 좋아해서 전엔 벽에 그림 몇 점 걸어놨던 적도 있는데, 그것도 얼마 안 가 다 떼버렸어요. 주변에 뭔가 더덕더덕 붙어있으면 오히려 방해만 돼. 음악만으로도 방이 꽉 차는데, 다른 게 뭐 더 필요하겠어요.”

최근 첼로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앨범 ‘with Grace'를 발표, 지난 연말 자선콘서트를 벌인 데 이어 오는 3월에도 비하우스(Beehouse)와의 공연이 기다리고 있는 이 교수. 경희대 기악과 교수로 재직중인 그는 요즘 입시 관련 채점까지 겹쳐 곱절 더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비하우스는 그가 십여년째 자신의 사재를 털어 설립하고 이끌어 온 음악학교다. 어린이에서부터 성인까지 누구든 스스럼없이 음악과 친해지도록 손수 프로그램을 만들어 끌어온 곳이다. 겉치장엔 전연 관심이 없어보이는 그가 유일하게 스스로 자랑한 것도 고가를 호가할 자신의 첼로가 아닌, 그 첼로 케이스의 앞 뒤에 붙은 조그만 비하우스 스티커였다. ‘정말 예쁘지 않냐’고 묻기까지 했다.

비하우스로 시작된 그와의 음악 얘기는 한참 동안 계속됐다. 그의 인테리어 방식 그대로, 그의 어법 또한 ‘예,아니오’가 확실하고 단호했다. 첼로는 물론 클래식에 대한 철학은 더욱더 과감하고 간단했다.

“ 클래식이란게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첼로만 해도 ‘철사줄 네 개가 이런 소리를 내는 것’ 그럼 다 설명되는 거에요. 음악의 본질은 다 똑같아요. 우리 주변엔 아직도 악보 4분음표, 8분음표나 쳐다보는게 중요한거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음악 자체가 아니라 서양음악이 대부분인줄 알고 착각하거나 편견을 갖고 있으니 점점 더 접근하기 어렵고 까다로와 보이는 거죠.”

그가 싫어하는 게 또 있다. ‘나는 연습을 싫어하는 타입’이라고 이 교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이었다. 연습량이 곧 실력이라고 믿는 통념을 여지없이 넘어뜨리고 있었다.

“ 그저 반복적인 연습은 별 의미가 없어요. 많은 부모님들이 착각하는 부분도 자기 아이가 방에서 계속 악기 소리만 내고 있으면 열심히 잘 하고 있다고 믿는 거죠. 그런 식으로 ‘열심히’ 하다가 오히려 더 실력이 나빠지는 학생들도 많이 봐요. 특히 입시철에! 음악은 ‘가슴에서 나오는 언어’라는 정의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에요.”

그는 정트리오와 이종사촌지간이다. 첼리스트 정경화씨가 그의 사촌동생이다. 정트리오가 외국에서 명성을 떨치는 동안, 그는 국내 첼로계를 지켜왔다.

첼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11살때부터. 음악인으로 활동한 어머니 곁에서 이미 큰 언니가 피아노를, 작은 언니가 바이얼린을 들고 난 뒤,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진 수순이었다.

고교 재학중이던 1961년, 열다섯살 나이로 제1회 동아음악콩쿠르에 1위로 입상하면서 그의 첼로 인생이 화려하게 시작됐다. 1963년 서울대 음대에 입학,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의 전액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77년엔 뉴욕 카네기 홀에서 데뷔 리사이틀을 가지면서 뉴욕타임즈지로부터 ‘주목해야 할 아티스트’로 평가받기도 했다. 1979년에 귀국, 대학교수로 지금껏 재직 중이다.

가정적으로는 그리 순탄치 않은 삶이었다. 6살 때 부친이 돌아가셨고, 귀국 후 한국 생활중 때이른 두 오빠의 임종을 지켜보아야 했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서울대 교수였던 둘째 언니마저 지난달 유명을 달리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무덤덤하게 말하는 이 교수의 표정이 오히려 더 듣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 이 나이 되는 동안 하도 가까운 사람들이 가는 모습을 많이 봐서 이젠 어떤 충격이나 변화에도 그다지 흔들리지 않아요. 내 자신에게도 그래요. 그냥 오늘 하루 잘 살고, 잘 자면 된다고. 그럼 됐다고.”

유학 중 그는 지독한 향수병으로 고생했다. 부족한 학비와 생활비를 보태기위해 상업적인 무대에 서기도 했다. 1960,70년대 당시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팝 가수 아트 가펑클의 눈에 띄면서 함께 미국 전역을 누비며 순회연주를 다녔다. 정통 클래식 전공자로서 한편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레 물었지만, 그의 답은 예상과 달랐다.

“ 사실 집안에 유명한 동생(정경화씨)도 있는데 나는 댄서들이 나오는 무대에 앉아있는 상황이니,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실은 그러한 음악 자체도 굉장한 예술이에요. 특히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니 대중이 정말 원하는게 뭔지, 뭘 좋아하는지에 대한 감각과 그 이유를 알게 해 준 것도 그 무대에서였어요. 그 시간들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연주하며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는 걸 내 자신이 알아요.”

지난 겨울에 내놓은 새 음반에 이어 현재 그의 명쾌한 음악 철학을 책으로 담아내는 작업도 한창 진행중이다. 좀 더 편안하고 쉽게, 그리고 정직하게 음악의 세계를 세상에 나누고 싶어하는 그의 바람이 담겨있다.

사진을 찍을 겸, 소공연장 무대로 그와 자리를 옮겼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연주곡을 좋아하시냐”고 묻자 ‘베사메무쵸’,‘I can't stop loving you' 등 귀에 익은 곡목들을 댔다.

어쩌면 이 초면의 청중을 배려하려 했던 것이었을까? 그는 소녀처럼 활짝 웃으며 정말 베사메무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분명 독주였지만,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마치 여름날의 붐비는 축제처럼 그 텅 빈 공연장에 갑자기 훈기가 느껴졌다.

“’에라, 그래,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데 뭐든 연주 해주마‘하면서 이렇게 함께 가는 거지 뭐”하며 그는 더 유쾌하게 연주를 이어갔다. 웃고 있는 그의 눈과 콧잔등 사이로 숨어있던 잔주름이 뚜렷이 드러났다. 오랜 세월 음악의 행복감이 만들어주고 간 훈장처럼 보였다. 갑자기 ‘남행열차’를 들려줄 즈음엔 급기야 그를 만나기 전 우울하게 내리던 아침 눈발의 기억마저 다 날아가버렸다.

■ 이종영 약력

1963년 서울대 음대 진학. 1972년 포르투갈 국제콩쿠르 입상. 세계적 거장 버나드 그린하우스의 제자로 사사. 맨해튼 음대에서 학,석사 학위 취득. 1979년 귀국. 1980년부터 경희대 재직 중. 윤이상의 ‘활주’(1979) 등 국내 초연 다수. KBS교향악단 등 대형 협연 다수. 예술의 전당 개관 음악회 등 대형 초청공연 다수. 1986년 비하우스 첼로 앙상블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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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