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연재소설 '촐라체' 끝내…국내 작가 최초로 포털에 소설 발표… 누적 방문자 100만 명 넘어 대성공히말라야 촐라체 봉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온두산악인의 실화"빙벽과 사투하는 인간의 모습 너무 감동적" 격찬 댓글 이어져

30여 년 소설가 인생 지탱해온 두 수레바퀴는 '문학순정주의'와 '인간주의'
인터넷 연재는 문학의 새로운 마당… '지나친 대중화'문단의 우려는 기우

1970~80년대 한국 문단을 풍미했던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61)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가 최근 특별한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국내 작가로는 최초로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를 통해 발표한 블로그 연재소설 ‘촐라체’(Cholatse)를 완결한 것. 그는 지난해 8월부터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 정월 초이렛날 5개월 여정의 대미를 장식했다.

연재 횟수는 총 102회에 달했고, 연재 기간 동안 ‘촐라체’에 접속한 누적 방문자수도 무려 100만 명을 넘었다. 오프라인 출판시장에 비하자면 100만 권을 팔아치운 베스트셀러인 셈이다.

네이버 측도 사진 등 가볍고 감각적인 콘텐츠가 주종을 이루는 블로그 세계에서 텍스트 중심의 연재물이 회당 평균 1만 명 가량의 독자를 불러모은 결과에 대해 무척 고무된 분위기다.

‘촐라체’는 히말라야 산맥 쿰부 지역에 위치한 해발 6,440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촐라체 봉을 무대로 한 산악소설이다. 아마도 산악인을 소재로 다룬 본격 문학작품으로는 국내 처음일 듯 싶다.

박 작가도 “작품을 준비하면서 찾아봤는데, 국토 대부분이 산악 지형이고 산악 인구가 1천만 명을 넘는다는 우리나라에 정통 산악소설이 없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고 말했다.

촐라체 봉은 세계의 지붕으로 통하는 히말라야의 8,000m급 14좌에 비해 높이는 뒤지지만, 인간의 도전을 불허하는 험준함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산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겨울철 촐라체 등정은 세계 산악인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난이도가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촐라체 봉을 박 작가가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요즘 젊은이들은 ‘야성’(野性)이 없어요. 언뜻 온순한 듯해도 자본주의 소비문화 속에 살면서 길들여져 많이 나약하지요. 그래서 가파른 빙벽을 사투하며 올라가는 두 젊은이 이야기를 통해 요즘 젊은이들에게 야성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박 작가는 ‘촐라체’의 주제의식을 ‘야성’으로 규정했다. 젊은 독자층의 야성을 이끌어내는 데 일차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촐라체는 하나의 꿈이요 이상이자, 영원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꿈과 이상, 즉 촐라체를 가슴에 품고 실존적으로 살자는 게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바이지요.”

그는 90년대 초반 히말라야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전문 산악인처럼 고산 정복을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때부터 그는 히말라야에 서서히, 그리고 깊숙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간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온 횟수만 해도 두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다.

히말라야를 무시로 드나들던 박 작가의 뇌리에 촐라체 봉이 깊이 들어와 박힌 것은 2005년 어느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향해 가던 길이었다.

마침 촐라체 봉 아래로 난 길을 지날 무렵, 그곳 북벽(北壁)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길에 조난을 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두 젊은 산악인의 극적인 실화가 일행들의 대화 속에서 흘러나와 귓전을 강하게 때렸다.

‘왜 산악인들은 목숨을 걸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산에 오를까.’ 이런 단상에 막 잠기려는 찰나, 한쪽 능선에 촘촘히 박혀 말없이 히말라야를 올려다보는 추모탑의 대열이 눈에 쑥 들어왔다. 그곳에 청춘과 목숨을 바친 산악인들의 자취였다.

“빙벽에 매달리면 그곳에선 나와 빙벽만 존재할 뿐이죠. 이것만한 실존의 문제가 있을까요. 세상과 완전히 단절돼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으로 고난을 헤쳐나가야 된다는…. 그 순간 두 젊은이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생기더군요. 사실 평생 동안 소설을 써온 것이 내게는 빙벽을 오르는 일과 마찬가지였다는 생각도 겹쳤고.”

박 작가는 그 여정에서 돌아온 얼마 뒤 ‘촐라체’의 모티프가 된 두 산악인 박정헌, 최강식 씨를 찾았다. 여러 날의 사투 끝에 생환에는 성공했지만 그 모진 고초 속에 동상을 입어 손가락, 발가락 대부분을 잃어버린 그들과, 박 작가는 밤 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산을 말하고 인생을 이야기했다.

“작품 속 주인공의 등반 경로는 그들과 똑같습니다. 긴장감이 최고조가 되는 장면도 비슷하게 설정했지요. 하지만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과 달리 ‘촐라체’의 주인공은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크레바스(빙하 틈새)로 추락해 매달려 있는 동생과 기진맥진한 상태서 자일(등산용 밧줄) 하나로 그를 붙들고 있는 형. 과연 그 상황이 되면 서로의 마음이 어떨까요?”

산악인들은 그런 순간 어쩔 수 없이 줄을 끊더라도 도덕적인 지탄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함께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사는 게 낫기 때문이다. 다만 줄을 놓은 당사자의 마음에 남은 회한과 상처는 쉬이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촐라체’에서는 어떨까. 형은 줄을 끊고 싶은 유혹 앞에 번민하다가 아예 나이프를 멀리 내던진다. 실화 속의 박씨도 후배 최씨를 잡고 있던 줄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럼에도 동생과 후배는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천신만고 끝에 스스로 크레바스에서 기어 나왔다는 점이다. 소설 ‘촐라체’에서는 이 순간 이후 더욱 극적인 클라이맥스도 기다린다.

“처음엔 솔직히 독자가 있을까 걱정도 됐어요. 소설 내용이 남자 둘이서 6박7일 동안 빙벽에 매달려 있는 단순한 구조인데, 빙벽에서 나올 이야기가 얼마나 되겠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인생의 문제’로 확대했지요. 또 독자들이 계속 따라올 수 있게끔 극적 긴장감도 유지하려 애를 많이 썼습니다.”

한 시대를 주름잡은 국내 대표 작가의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수많은 네티즌 독자들은 그가 치밀하게 짜놓은 서사구조 속으로 흡입됐다. 한 네티즌은 “빙벽 등반을 하는 형제의 사투가 그 어떤 산악영화보다 비장하고 스릴 넘친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산과의 사투 속에 인생을 되돌아보는 인간의 모습이 겹쳐져 더욱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다”라며 격찬의 글을 인터넷에 올려 놓기도 했다.

“처음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할 때는 젊은 친구들이 ‘악플’을 달지나 않을까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몇 개는 있었던 것 같은데 많지는 않더군요. 허허. 사실 나는 아직 원고지에 글을 쓸 만큼 컴퓨터와 인터넷에 익숙치 않아요. 하지만 이번에 네티즌들과 직접 소통하며 느낀 점은 건전한 네티즌들에 의한 여과기능이 분명 인터넷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에요. 또 한 가지,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들이 매순간 클릭하고 댓글을 올리는 것을 보며 생생한 느낌을 받았어요. 34년 동안 소설을 써 오면서 처음 가진 느낌이었지요. 그 점이 참 인상적입니다.”

박 작가는 인터넷 연재라는 형식이 “문학의 새로운 마당을 연 것 같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생생한 추억 한 자락을 끄집어냈다. 한때 신문 연재소설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70~80년대만 해도 신문은 작가들이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주요 무대였다. 중앙 일간지를 통틀어 20명 가량의 작가가 동시에 소설을 연재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문화가 희미해지더니 이젠 명맥조차 찾기 어렵게 됐다. 그런 터에 인터넷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 수 있다는 게 그의 기대다. “모든 포털업체가 소설을 연재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까지 피력할 정도다.

물론 인터넷 연재라는 형식이 문학의 지나친 대중화를 부를 것이라는 문단 일각의 우려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박 작가의 생각은 다르다. “책이든 신문이든 인터넷이든, 매체에 따라 소설의 본질적 개념이 달라지지는 않아요. 문학의 질은 작가의 문제지 매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독자를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 너무 고답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어요. 어떻게든 작가의 목소리를 전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겁니다.”

박 작가는 자신의 30여 년 문학인생을 지탱해온 두 수레바퀴가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는 ‘문학순정(純情)주의’요, 다른 하나는 ‘인간주의’다. 이를 뭉뚱그려 풀이하자면, 그는 평생 동안 작가로서 열심히 글을 쓰는 데만 몰입했고, 그 글 속에서는 항상 인간의 문제를 천착했다는 것이다. 어느 작가인들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그 같은 원칙을 한결같이 견지한다는 것이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닐 게다.

그 순수혼(魂)이 한때 멈춰 선 적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순수성을 되살리기 위한 벼랑 끝 선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간에서 “박범신은 왜 절필했을까”라며 의아해 했던 90년대 중반 무렵 3년간의 이야기다.

“젊었을 때는 나도 소위 인기작가로 살았었지. 그 대중적인 인기, 기득권도 좋았고. 하지만 어느 순간 문득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은 회의가 들더니 기득권을 몽땅 버려야겠다, 죽어서 새로 태어나야겠다 싶은 절실함이 생기더군요. 그러려면 어떡해? 현장에서 몇 년간 벗어나는 수밖에요. 남들이 말하는 절필을 하고는 용인의 외딴집에서 자폐적으로, 은둔적으로 3년 정도를 살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제서야 마음이 자유로워졌어요. 사실 절필을 계획적으로 한 건 아니었지요. 솔직히 작품활동을 그만둔다고 선언할 때는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닌가 무섭고 두려웠을 정도니까.”

그는 홀연히 떠난 3년 뒤 연작소설 ‘흰 소가 끄는 수레’(창비)로 당당하게 돌아왔다. 새 작가로 태어난 것이다. 이전의 관심이 사회현상이나 세태에 머물렀다면 이후의 시선은 보다 근원적인 대상, 영혼의 리얼리티를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자연히 문학세계도 한층 깊어지고 풍성해졌다.

이런 변화는 산, 특히 히말라야를 즐겨 찾는 것과도 맞물려 있다. 그에게 산은 무엇인가 물어봤다. “나에게 산은 사원(寺院)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히말라야는 내게 초월적인 세계, 영원성의 상징, 이룰 수 없는 꿈, 신의 영역과 같은 것이지요. 트레킹을 하다 보면 초월, 불멸, 영원, 신의 ‘그림자’를 보며 걷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한편으로 나는 못나고 하찮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아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성찰이라는 뜻 깊은 시간을 갖게 되지요.”

산악인에게 히말라야는 정복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례의 길이다. 그 길에서 박 작가는 ‘미친 자본주의 사회’를 벗어나 영혼의 가치를 찾아 나선 무리들을 종종 마주치곤 한단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소비를 부추기고 경쟁을 붙이는 체제지요. 사람은 100V인데 욕망은 200V예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타 들어가겠죠. 오늘의 현실이 꼭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인간의 정체성을 되찾고 소비의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내면의 전쟁’을 선언해야 합니다.”

그는 히말라야로 훌쩍 떠나 있을 때면, 부지불식 중에 자신 역시 젖어 들었던 ‘서울공화국’의 미친 욕망을 금세 깨닫게 된다고 한다. 그 사색의 흔적들을 편지에 담은 ‘비우니 향기롭다’(랜덤하우스중앙)라는 에세이집을 두 해 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박 작가는 산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운 셈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 스스로를 ‘미완의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구조적 모순과 영혼의 문제를 바라보는 두 관점을 유지하겠지만, 앞으로 어떤 작품세계를 펼쳐갈지는 모르겠어요. 솔직히 작가가 스스로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닐까요. 작품이란 것은 독자 개개인이 책을 읽고 머리 속에 그린 영상으로 완성되는 거니까요.”

산에 오르면 인간은 겸허해진다. 박 작가가 꼭 그렇다. 한때 훈장처럼 붙어 다녔던 인기작가 타이틀은 이미 추억 속에 묻어두었다. 다만 ‘촐라체 북벽’을 오르기 위해 오늘도 ‘등산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맬 뿐이다.

그에게 ‘촐라체 북벽’은 언제 끝이 날지 모를 문학의 길이고, ‘등산화 끈’은 작가적 상상력과 작품의 완성도를 오롯이 유지하기 위한 팽팽한 내적 긴장감이다.

“촐라체를 쓸 때는 건강했는데 요즘엔 기력이 많이 빠져나가 힘이 없어요. 무당은 굿을 안 하면 병이 난다는데 나도 그런가 봐. 새 작품을 하게 되면 또 힘이 나겠지요.”

산악소설 ‘촐라체’에 처녀 도전한 데 이어 다음 작품으로 역사소설을 준비하고 있다는 박 작가가 마지막으로 툭 던진 말이다. 역시 작가는 글을 써야 살고 펜을 놓으면 죽는 존재인가 보다.

■ 박범신 작가는

1946년 충남 논산 생. 1973년 단편 ‘여름의 잔해’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작가로 데뷔했다. 탁월한 상상력, 화려하고 역동적인 서사의 작품세계를 펼쳐보이며 70~80년대 대표적 인기작가로 각광받았다.

93년 갑작스러운 절필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뒤로는 인간의 내면과 영혼을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토끼와 잠수함’, ‘덫’, ‘흰소가 끄는 수레’ 등의 창작집과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겨울강 하늬바람’ ‘숲은 잠들지 않는다’ ‘침묵의 집’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원광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겸직하고 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