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는 가장 정통성 있는 대통령… 2002 대선 때 노무현 지지 후회한다""각료 인선·공천 심사에 문제 있다" 한나라당에도 따가운 일침현재 해외 한민족 교육에 관심… 2세들 위한 세미나 개최 계획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의 새 정부가 출범하는 올해는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다. 역사적으로 지난 60년은 해방과 6ㆍ25전쟁, 4ㆍ19, 5ㆍ16을 거치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시대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올해를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은 선진화 시대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한 선진화 시대를 열어가는데 정치는 중요한 매개다.

지난 60년 한국 정치는 격랑의 파고 속에서 발전과 퇴보를 거듭해 왔다. 이제 한국 사회의 대변환기를 맞아 정치는 기로에 있다. 한국 정치가 선진화로 나아가는데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40여년 정치 풍랑을 헤쳐 온 일민(一民) 이기택(70) 전 민주당 총재를 ‘한국초대석’에 초빙한 배경이다.

4ㆍ19 세대를 대표하는 이기택 전 총재는 1967년 정치에 입문, 40년 넘게 한국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3김(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과 이철승 헌정회 회장 같은 거물 틈 사이에서 자신의 계보까지 조직하며 올곧게 정치를 한 원로로 평가받고 있다. 2월 28일 오후, 여의도 사무실에서 이 전 총재를 만났다.

이기택 전 총재의 사무실은 저녁 무렵인데도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이 전 총재를 따르는 지인들과 4월 총선에 나서는 출마자들이 인사차 줄을 이은 것이다.

이 전 총재는 근황을 묻자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 지지를 호소하며 전국적으로 신세를 진 사람들을 만나고 7년 전 설립한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이 전 총재는 정치 얘기보다 해외한민족 교육에 열성을 보였다. “지금까지는 주로 중국 조선족 2~3세 후예들에게 한국어 교육, 한민족 의식 심기 등에 주력했는데 이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하고 금년부터는 일본 재일교포, 미국 후예들에게까지 교육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에요. 6월에는 한ㆍ중ㆍ일ㆍ미 4국 우리 교육학자들이 해외동포 2세 교육에 대한 세미나도 개최해요.”

이 전 총재는 정치를 떠나 수년간 동북아와 미국, 일본을 주유하면서 한민족 후예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일을 시작했다며 함께 일하는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총재는 지난 대선 기간 누구보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쏟았다. 한쪽 벽에 대선 때 전국 순회 경로를 그린 지도가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MB보다 더 많이 다녔어요. MB가 대통령이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이 전 총재는 정권교체가 안돼 좌파정권이 15년 간 계속됐다면 대한민국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했다. 편향된 가치관이 심화되고 이념, 계층 간 이분화로 국민통합이 안돼 국가 발전의 동력이 집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다행’이란 표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닌 ‘정통성’과 건국 60주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은 무엇보다 건국 60년과 관련해 ‘정통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역사적ㆍ정치적 의미가 있어요.

지난 60년 동안 여러명의 대통령이 나왔지만 그 분들이 성장했던 환경, 교육과정, 정치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물론 훌륭한 분들도 있지만 정상적인 정통성에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 그런 점에서 MB는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교육, 회사 경영, 서울시장이라는 소국가 경영 등 가장 정통성에 근접해 있어요.”

그러면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앗다. “과반의 표를 몰아준 민의가 경제를 다시 살려달라는 요구인 만큼 경제살리기에 전력해야 할 거요. 그런데 세계화 시대에 우리경제도 세계 흐름에 맞춰야 하는데 지금 세계 경제가 대단히 불안정하고 후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어 어려움이 많을 거야.

경제성장이라는 게 경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국민통합을 이뤄가며 해야 돼요. 또 박정희 시대처럼 현대화 기치를 들고 경제만 해결할 때와는 달리 준법정신, 투명성, 로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선진화의식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는 노력도 중요하지요.”

이 전 총재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했다. 대통령으로서 품격을 떨어뜨리고 국민을 분열시킨데다 코드인사로 국정의 난맥을 보였다는 것이다.

“16대 대선 때 보수적이고 부패한듯한 이회창씨에 비해 참신하고 사회를 올바르게 개혁할 가능성, 그리고 서민 출신이라 빈부 격차, 계층 간 갈등도 좁힐 수 있을 것같아 노무현 후보를 선택햇는데 2~3개월 만에 아주 실망했어요. 같이 정치를 할 때는 몰랐는데 대통령이 된 후 대통령 위상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정부 구도를 짜는데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없는 코드 인사를 고집하는 것을 보면서 국가나 정부를 마치 개인의 사유물처럼 생각하고 국정에 임하는 모습에 너무 실망했지.”

이 전 총재는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일어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논란에 대해 “탄핵은 옳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나는 지금도 헌법이 허용하는 대로 탄핵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당시 탄핵사유는 충분하다고 봤는데 권력과 정부가 총동원해 국민들을 선동하니 탄핵 기운에 한나라당이 소신을 지키지 못했어요. 그러니 총선에서 질 수밖에 없었지. 한나라당이 용기를 갖고 초지일관했으면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잃어버린 10년도 피해갈 수 있었는데.”

이 전 총재는 국민적 관심사가 된 이명박 정부의 각료 인선과 정치권의 최대 이슈인 4월 총선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문제가 된 각료는 한시바삐 교체해야지. 국민들이 볼 때 곤란한 사람이 있어요. 국가를 경영하는 최고 책임자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밑에서 검증을 해도 못밝힐 수가 잇는데 그걸 깨닳은 순간에 시정하는 결단이 필요해요.”

이 전 총재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한나라당의 공천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다. 정치의 기본에서 벗어난, 그리고 국민과 동떨어진 공천 행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당정치이고 책임정치인데 외부 사람을 소수 참여시킬 수 있지만 당 문제를 해결하는데 외부인이 더 많아서는 안돼요. 그것은 정당정치에 위배되는 것이죠. 한나라당 공천에서 국회 구성이 잘못되면 책임은 누가 지나요. 정당이 책임지기 위해서는 정당이 책임져야지 외부인이 공천하는 것은 문제예요.”

공천심사는 공천신청자들의 정치생명과 일생을 좌우할 수 잇는 일인데 정치경험이 없는 외부인이나 정치 경력이 일천한 초선, 소장파 의원들에게 맡기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또 정당인이 아닌 법조인, 교수 등과 같은 전문인이 국회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국회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곳인데 전문인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아요. 현재 선거를 보면 투표율이 계속 낮아지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정치인이 국민 속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예요. 나는 정당인, 보좌관 출신, 국민 속에서 사회운동,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처럼 국가나 사회를 위해 국민과 더불어 노력해온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길 바래요. 지금 우리 정치에서 가장 결핍된 것은 정치와 국민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거에요. 법조인, 교수 같은 전문인들이 개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국민 속에 있기보다는 국민 위에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국회에 많이 진출하는 것은 정치적 퇴보라고 생각해요.”

이 전 총재는 15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에서 배제된 것이 “물갈이 희생”이 아니냐고 묻자 당시 상황은 ‘물갈이’와 무관하다고 말했다. “물갈이가 아니라 이회창씨의 깅력한 정치적 라이벌이다보니 희생시킨 것이지. 나만 그렇게 하면 문제될 것 같으니까 김윤환, 신상우 씨 등도 함께 희생시켰다고 봐요.”

이 전 총재의 정치 입문은 독특하다. 그는 1960년 고려대 학생위원장으로 4ㆍ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대 4ㆍ18 시위를 주도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67년 청년대표로 신민당 소속의 전국구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부산 동래구로 지역구를 옮겨 제8ㆍ9ㆍ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85년 12대 총선에서 부산 해운대에 출마해 당선됐다.

87년 6월 항쟁후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부총재를 역임하고 13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이 전 총재의 40여년 정치 인생에서 가장 주목받는 행보 중 하나는 1990년 3당 합당 당시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그 때 이 전 총재가 합당에 참여했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이어 차기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강하게 끌었지만 ‘야합(野合)’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소신대로 정도(正道)를 가기로 했지. 그 때는 정치를 안할려고 했어요.”이 전 총재는 지금도 3당 합당을 야합이라고 생각한다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후 이전 총재는 노무현, 홍사덕, 이철 등 당시 의원과 함께 민주당(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1992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해 ‘민주당’을 창당하고 DJ와 함께 공동대표가 됐다. 14대 총선에서는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당시 이 전 총재가 김?봐?당과 합당한 것에 대해 집권 여당에서는 비판과 음해가 심했다. “당시엔 공룡 여당에 맞서 야당이 합쳐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는데 국민의 뜻을 따라 합당했어요. 김대중 당과 통합하면 경상도에서 정치를 할 수 없없지만 그것이 정도라고 보고 내 개인 생각 안하고 결행한거죠.”

이 전총재는 40여년 정치인생에서 가장 보람있는 순간을 묻자 6ㆍ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내는데 단식하며 힘을 보탠 것과 이명박 대통령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룬 것, 그리고 유신말기 신민당 5월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총재로 만들어 유신시대를 종식시키는데 일정 역할을 한 것을 꼽았다.

이 전 총재는 자신의 40여년 정치를 지배한 것은 ‘4ㆍ19 정신’이라고 말한다. 3당 합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나 대의를 따라 비판을 감수하며 호남당과 합당한 것, 박정희시대 중앙정보부의 모진 협박과 회유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정도(正道)가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4ㆍ19 정신을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전 총재는 몇해 전 남북한 인사들 모임에서 한국 언론에도 낯익은 북한 고위 당국자가 다가와 “4ㆍ19 혁명의 영웅 아니십니까?”하면서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을 때 새삼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4ㆍ19 정신의 가치를 실감했다고 한다.

■ 이기택 약력

포항 출생(37년). 부산상고·고려대 상과졸업, 고려대 경영대학원 석사, 제7·8·10대 신민당 국회의원, 신민당 부총재, 제12대 신민당 국회의원, 제13대 민주당 국회의원, 민주당 총재·공동대표위원, 제14대 민주당 국회의원, 한나라당부총재,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현)해외 한민족교육진흥회 이사장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