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감각의 드레스로 만들어야… 루이비통·샤넬 같은 명품 만들고 싶다"'한국의 기모노' 오명 벗고 '바람의 옷' 찬사 받아뉴욕 '이영희 뮤지엄' 설립 등 패션 코리아 선봉영부인들 한복 손수 만들어… 김옥숙 여사가 최고 모델

고전복식의 대가 고 석주선 단국대 교수와 함께
디자이너 이영희(71) 씨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사람이다. 나이 마흔을 넘어 늦깎이 데뷔한 그는 93년 파리컬렉션을 통해 ‘한국의 기모노’로 알려진 한복의 오명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이때 해외 유명디자이너들로 받은 ‘바람의 옷’이란 찬사는 그의 옷을 나타내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역대 영부인 한복을 디자인하며 ‘패션 외교’의 선봉에 선 것도 그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화제를 모았던 김윤옥 여사의 한복 역시 그의 작품이다. 2004년 뉴욕 맨해튼에 ‘이영희 뮤지엄’을 열어 한복을 전시하고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한복을 기증해 동양의 옷을 대표하기도 했다.

■ '바람의 옷'으로 찬사

이영희 씨는 동덕여대 의상디자인과 겸임교수로 10년 째 강의를 하면서 종종 한복관련 강연을 하기위해 지방과 해외를 찾는다. 12일 이 씨와의 인터뷰도 지방 세미나 직후 이뤄졌다.

25일 취임식 때 김윤옥 여사의 한복 맵시가 화제다.

“2004년 뉴욕 맨해튼에 이영희 뮤지엄을 열었어요. 관객은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이 훨씬 많았죠. 입장료가 4불인데 관람객들이 ‘100불을 주고도 들어오고 싶다’고 말할 때는 정말 보람을 느꼈어요. 요즈도 패션계 인사나 한복관련 논문을 쓰려는 학생이 많이 찾아요. 그런 분들을 위해 한복관련 강의도 1년에 몇 번하고 있죠.”

박물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 씨의 목소리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뉴욕 박물관과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의 한국기념관은 93년 파리 진출 후 15년 동안의 노력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산물이다.

이제 한국인 디자이너의 해외 진출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만큼 흔한 일이 됐지만, 불과 10 여년 전만해도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당시 국내 유명 디자이너조차 ‘초청’형식의 외교행사 정도로만 해외 패션쇼를 기획했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영희 씨가 세계 3대 패션쇼로 불리는 ‘파리 컬렉션’을 준비할 때만 해도 “한복으로 파리 진출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하루아침에 결정하고 진출한 게 아니에요. 6,7년간 많은 연구를 하고 유럽 무대에 나갔지요. 하지만 그때도 ‘세계 패션계에서 한국적인 옷들이 인정 받을 수 있을까?’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했지만 예상했던 것과 다른 어려움들도 있었고요.”

한복을 현대의상에 접목시킨 독특한 디자인으로 이 씨의 옷은 세계 패션계 인사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여세를 몰아 그는 2004년 9월 뉴욕 패션쇼에 참가하며 미국시장에도 진출했다. 예술성을 우선으로 하는 파리와 달리 뉴욕은 실용성과 자금동원력이 사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가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진출 국가와 타깃을 정확하게 알고 해외시장에 진출하라”고 조언하는 이유다.

“프랑스 매장의 경우 ‘이세이 미야케’ ‘겐조’와 같이 일본풍의 동양적인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왔습니다. 유명배우나 에르메스 사장 등 새로운 디자인 찾는 사람들도 제 의상을 보러 매장을 들르곤 했죠. 반면에 뉴욕 매장은 실용성 위주입니다. 입고 거리에 나갈 수 있어야 해요. 또 뉴욕시장은 얼마 투자를 하면 이익을 볼 수 있는지 계산이 명확하게 나오는 시장입니다. 나라마다 원하는 디자인 스타일, 시장 성향이 달라요.”

이영희 씨는 “한복을 세계화 한다는 것은 ‘치마저고리’를 세계화 한다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입을 수 있도록 한복치마를 드레스화 하거나 한복을 모던하게 만들어 현대적 감각을 가미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가 최초로 ‘말기수’ 디자인을 시도하며 한복의 ‘퓨전화’를 시도한 것도 이런 연유다. 말기수는 여성 한복 치마에서 가슴 쪽을 감싸는 천. 저고리를 짧게 입고 말기수를 두른 한복은 과거 기생들의 복장이었다. 하지만 이 씨는 그 고정관념을 깨고 아름답게 수놓은 말기수를 통해 한복 치마 자체를 드레스로 변화시켰다.

■ 최고의 모델은 김옥숙 여사

한복에 관한 한 패션리더는 단연 영부인이다. 취임식 등 각종 의전행사에서 선보인 퍼스트레이디의 한복은 당대 한복디자인 트렌드는 물론 시대정신과 영부인 취향까지 엿보게 해준다.

이영희 씨는 이순자, 김옥숙 여사를 비롯해 역대 영부인의 한복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순자 여사의 한복은 절반 가량, 김옥숙 여사의 한복은 거의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 때 입은 김윤옥 여사의 연두색 두루마기와 황금색 치마 역시 이영희 씨의 작품이다.

“대통령 취임식은 옛날로 치자면 왕비 등관식입니다. 영부인이 입는 금박이 들어간 노란색 치마저고리와 연두색 두루마기는 그때의 복장을 현대화한 것이에요. 외국 사절이 많이 참석한 자리라 최대한 왕실 한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영희 씨는 김윤옥 여사와는 이화여대 대학원 동창이라며 그 인연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시절 서울시 주최의 국제적인 패션쇼를 몇 번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김윤옥 여사는 둥근 얼굴에 한복이 참 잘 어울리는 분이세요. 한복 디자이너로서 기대가 큽니다.”

영부인의 한복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한 달에서 한 달 보름 남짓이다. 옷감이나 염색은 디자인 의뢰가 들어오기 전 미리 해둔다. 이번 취임식 한복 염색도 이 씨가 직접 몇 번이고 마음에 드는 색감이 들 때까지 공들여 작업했다. 디자이너 이영희 씨의 ‘탁월한 색감’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영희 디자이너 의상의 특징은 은은하고 품격 있는 디자인. 화려한 디자인을 좋아했던 이순자, 손명순 여사의 한복을 만들 때도 채도를 낮춘 색깔을 이용해 은은한 멋을 살렸다.

이영희 씨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인 손명순 여사의 경우에는 원색의 자수 무늬를 좋아하셨다. 파리 순방 때 오렌지 빛 옷감을 골랐는데 채도가 높아 한 톤 낮춘 색상으로 옷을 지어 튀지 않게 드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손명순 여사는 엘리제 궁에 들어갈 때 이 옷을 입었는데 반응이 좋아 상당히 만족해했다고 한다.

얼마 전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의 경우 한복보다 양장차림을 선호했고 이영희 씨의 작품 중에서도 전통한복이 아닌 현대식으로 바꾼 의상을 몇 벌 구매했다. 하지만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의 한국기념관을 짓고 이 씨의 한복을 전시하자고 문화관광부에 건의했을 만큼 이영희 씨의 한복에 애정을 보였다.

이영희 씨가 꼽은 ‘베스트 드레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 그는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분”이라며 주저 없이 김 여사를 꼽았다. 김옥숙 여사는 적당한 키와 목이 길고 어깨 선이 아름다운 체형으로 한복을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한다. 비교적 젊은 40대에 퍼스트레이디를 했다는 점도 한복의 미를 살리기에 좋은 조건이었다고.

“은은한 빛깔로 아래위를 통일해 기품을 드러내는 디자인을 선호하는 취향도 저와 잘 맞았습니다. 어디를 가느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컬러와 디자인을 바꿀 정도로 센스가 뛰어나셨어요. 저는 정치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치와 상관없이, 디자이너는 자기 옷을 빛내는 사람이 가장 고맙거든요. 김옥숙 여사는 제 옷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신 분이어서 그 분과 함께한 5년은 참 행복했어요.”

이영희 씨는 “영부인의 한복의 경우 비싸거나 화려하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나 재클린 케네디와 같이 멋스러운 영부인의 의상은 자국의 패션산업을 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 그는 다만 “화려한 의상보다는 잘못된 색깔이나 격식에 맞지 않는 의상을 볼 때는 아쉬울 때가 있다”고 덧붙였다.

■ 루이비통 샤넬 같은 명품 만드는 게 꿈

디자이너 이영희 씨의 의상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찬탄한다. 그러나 일부에선 너무 ‘고전적이어서’ 입기 불편하다거나 너무 ‘격조있어서’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대중의 이런 아쉬움은 딸 이정우 씨가 채워주고 있다.

이영희 씨의 딸 이정우 씨는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 중인 중견 디자이너. 그녀는 어머니의 까탈스러운 감각과 타고난 재능을 이어받았다. 이대 약학과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두 아들을 키우며 ‘모범적인 가정주부’로 지내다 디자이너로 데뷔한 것도 어머니와 닮은꼴이다.

브랜드 ‘Sa Fille(사피)’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이정우 씨는 이제 어머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어머니 이영희 씨가 한복을 통해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의 만남을 표현한다면 딸 이정우 씨는 부담없는 디자인으로 대중성을 높인다. 딸에 대한 질문에 어머니 이영희 씨는 “우리 딸 정우는 젊고 세련된 옷을 잘하죠. 색깔이나 디자인에 대한 센스도 좋아요. 옷에 대한 평가도 예리합니다”며 연신 흐뭇해 한다.

“이제 한복에 대한 것을 연마시키려고 해요. 가장 제 옷을 잘 이해하고 표현하는 디자이너입니다. 앞으로 메종 드 이영희 브랜드를 이어가게 할 계획입니다.”

이정우 디자이너와 함께 해 나갈 일은 한복을 세계화, 명품화 시키는 것. 루이뷔통이나 샤넬과 같은, 세계인이 환호하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질문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도 제 꿈은 남아있다”며 말을 이었다.

“루이뷔통 가방을 네 사람 중 한 명이 들고 다닌다고 하던데요, 샤넬 상품은 세계에서 몇 초에 하나가 팔려나가고. 저는 한복을 명품의 반열로 올리는 것이 꿈입니다. 하루아침에 되진 않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80,90%는 이미 여건이 갖춰져 있어요. 한복, 한식과 같은 우리 문화는 누군가 조금만 신경 써주면 금세 세계시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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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오른쪽) 대통령과 김윤옥 여사
이영희 한복 입은 김옥숙 여사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