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소아마비 장애인 성악가 최승원 교수31일부터 세종문화회관서 'Hoping for' 열창 무대

그의 입담은 막강했다. 첫 질문 하나에만 장장 한시간이 넘도록 쉼표 없는 열변이 이어졌다. 세계적인 테너 최승원(46) 교수. 그는 오는 3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공연을 앞두고 있다. 장애인은 물론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향해 펼치는 희망의 공연무대다. 기자가 처음 물은 것도 ‘무엇을 위해 희망을 가지라는 것(hoping for 'what'?)’이냐는 것이었다.

“ 우선 일어나자, 그리고 그 ‘what'을 찾아 함께 가자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분명 ‘공평의 시기’가 온다는 것, 일단 일어서기만 하면 그때부터 길이 눈에 보인다는 것, 우리 자신도 당신과 같이 어려운 삶을 거쳤기에 당신이 지금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얘기들도요.”

■ "차라리 나만 없어진다면..."

최 교수의 이름 앞에는 항상 ‘세계적인 한국 최초의 소아마비 장애인 성악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유난히 ‘인생 분류법’을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그리 낯선 일도 아니다.

여섯 살때 그의 평생 소원은 ‘몸 한번 뒤집어 누워보는 것’이었다. 등이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에 다녔다. 한겨울 눈길에 미끄러져 어머니와 함께 나뒹굴어 다쳤을 땐 서로 말없이 부둥켜안고 울곤 했다.

가방조차 제 손으로 들 수 없는 처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살을 생각했다.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고3때의 어느날, 결국 별렀던 일을 저질렀다. 오랫동안 약국을 돌며 사 모았던 수면제 수십알을 삼켰다. 그런데 갑자기 구토가 나더니 먹은 약이 다 되쏟아져 실패하고 말았다.

“ 죽는 것도 쉽지 않구나, 자살마저 내 맘대로 안 된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나기도 하고, 신도 원망스러웠어요. 남은 약을 챙기고 더 사모으면서 다시 다음 기회를 기다렸어요. 그러다 어느 부활절 교회를 찾았다가 그날따라 목사님 설교에 마음이 흔들리면서 자살결심을 완전히 접게 됐어요.”

■ 음악에서 만난 기적

음악 공부를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다. 아주 늦은 나이, 현실적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성악을 선택한 건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또래들은 이미 대학을 졸업했을 나이인 24세때 그는 그제서야 대학입시에 뛰어들었다. 레슨이라곤 3일간 받은 것이 전부, 모두 독학으로 해결했다. 사실상 포기상태에서 기적처럼 합격통보를 받았다.

“ 정말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그때부턴 정말 공부만, 오로지 죽으라고 공부만 열심히 했어요.”

1989년 한양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그는 연이어 맨해튼 음대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했다. 오페라를 하고 싶었지만 신체적 장애 때문에 스스로 위축돼 말없이 포기했다. 가곡만 불러대고 있는 그의 길을 바꿔놓은 건 그의 지도교수였다.

“ 선생님이 그게 뭐 어떻냐고, 오페라 주인공이 극중에 뛰지 못하고 좀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닌들 그게 왜 문제냐고, 오페라를 해보라며 직접 저를 가르쳐주셨어요. ”

일류중의 일류들만 모이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에 당당히 입상한 기억도 생생하다. 치열한 결선을 거듭하며 영광의 12명 명단 안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상 세계적 스타로서의 공식등재를 알리는 명단이었다. 결과가 발표된 후 그는 되레 당돌하고도 엉뚱한 돌발질문을 던져 심사위원단을 당혹케했다.

‘장애인인데 왜 나를 뽑았느냐’며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되물은 것이다. 순간, 거의 50여개의 언론사 취재단의 마이크가 일제히 심사위원석으로 뻗쳐졌다.

“ 답변을 맡은 심사위원이 그러더군요.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 뿐이다. 만약 내가 티켓을 산다면 최승원의 몸을 보려고 표를 사겠는가, 음악때문이겠는가 하는 것이다’라고요.”

이후 세계적 스타로서의 행진이 시작됐다. 맨 첫 ‘아르바이트’로 받은 개런티만 18,000불이었다. 고국에 돌아가려하자 지도교수가 말렸다. 기어코 1999년 12월에 귀국했고, 현재 숭실대 음대 성악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고통은 고통을 알아본다.

소외계층을 향한 희망 나누기에 뛰어든 건 2004년 말의 첫 공연 경험이 씨앗이 됐다.

“ 출연하는 예술가 4명 중 3명이 모두 자살을 기도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좌절의 끝이 뭔지 너무나 잘 알죠. 너무 힘들다보면 희망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어요. 들리지도 않아요. 무작정 ‘힘내라’ 어쩌고 하며 위로하는 사람들이 되레 불쌍해보일 수도 있다는 거 알아요? 쓸데없는 헛수고인줄도 모르니까. 아무래도 직접 좌절의 끝까지 가 본 경험자들의 이야기는 좀 다를 수 밖에 없을거예요.”

공연 후 찾아와 ‘열심히 살기로 마음을 바꿨다’며 한없이 눈물을 터뜨리는 이들을 수없이 만나왔다.

마음이 흔들린건 최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4회 공연으로 계획됐던 일정이 관객들의 반 강제에 가까운 요청에 의해 결국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와의 힘겨운 줄다리기 끝에 결국 청소년 대상 전국 순회 공연으로 확대됐다. 더 놀랄만한 일도 벌어졌다. 3회째 공연쯤 이르렀을때 홈페이지에 17통의 항의편지가 올랐다.

‘얼마나 어렵게 자살 결심을 굳혀놨는데 왜 당신이 나를 또 헷갈리게 만드느냐’는 가슴아픈 항의들이었다. 자살을 결심하고 있다던 217명 중 공연후 자살을 포기한 이들이 95명에 이르렀다.

나머지는? ‘지금은 당신 공연 때문에 일단 자살을 유보하지만, 나중에 결국 내가 자살하게 된다면 (시간을 지체하게 만든) 당신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더 가슴 아픈 협박자들이었다.

■ 희망을 향한 이어달리기

그에게도 오페라의 무대로 이끌어 준 제2의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듯이, 이제는 그가 세상의 ‘설리반’ 선생으로 나서고 있다. 그와의 이야기 대부분도 사실 이에 대한 그의 철학과 향후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서울시에 청소년 센터를 만들어 가출 청소년들이 엉뚱한 곳에서 어긋난 삶을 살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싶다는 바람부터, 전국에 걸쳐 아깝게 비어있는 청소년 수련원을 활용해 청소년의 희망찾기 합숙 프로그램을 꾸며보는 일 등 너무나 많은 구상들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차 있다.

“ 요즘은 내 인생 후반전의 비전이 뭘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받은 희망의 바톤을 이제는 다음 세대에 넘겨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어요. 어떤 장애와 고통이 있든, 당신에게도 절대적인 가능성이 있음을 한시도 잊거나 포기하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 최승원은?

뉴욕 맨하탄음대 대학원 성악과 수석졸업. 런던 필, 뉴욕 필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다수 협연, 30여회의 리사이틀과 듀오 연주회.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 파사데나 콩쿠르 등 국제 오페라 콩쿠르 다수 우승.

뉴욕시 선정 ‘올해의 성악가’-휴고 로스 상 수상. 미국 레이건 대통령 초청 백악관 연주, 인도네시아 대통령, 모나코 국왕, 벨기에 국왕 초청 연주. 2001년 ‘올해를 빛낸음악가’로 대통령 표창. ‘Ich liebe dich’,‘Nostalgia’ 등 2개 음반 발표. 현 숭실대 음대 성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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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