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마담? 실세? 오너에게 물어봐!!구체적 역할은 미지수지만 이건희 회장 뜻 받들어 과도체제 안착 전념할 듯삼성의 대표적인 재무관리통이자 간판급 전문경영인이병철-이건희-이재용 3대에 걸쳐 각별한 신임 얻어

이건희 회장의 경영일선 퇴진 선언으로 충격파를 던진 4월22일 삼성그룹 경영쇄신안 발표장. 모든 시선과 관심은 이 회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쏠렸다. ‘글로벌기업 삼성’과 ‘삼성공화국’,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현재 삼성의 이미지를 만든 주역의 역사적 퇴장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삼성의 향후 행보에 대한 궁금증도 폭발했다. 과연 ‘포스트 이건희 체제’를 이끌 중책은 누가 맡을 것인가? 또한 이건희 없는 삼성은 어떻게 되고 어디로 갈 것인가? 그 해답의 한 줄을 움켜쥐고 급부상한 주인공이 바로 이수빈(69) 삼성생명 회장이다.

이수빈 회장은 삼성의 핵심계열사 회장을 맡고 있음에도 최근 몇 년 동안 삼성의 경영활동 과정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은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가 이건희 회장 이후 삼성그룹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한편 계열사간 의사결정 조정기구인 사장단협의회 의장을 맡게 된 것을 궁금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룹 핵심 주변에서는 이수빈 회장의 발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전략기획실 관계자는 “여러 계열사를 돌며 CEO로서 수십 년 동안 출중한 능력을 보여온 데다 임직원들에게 신망도 두텁고 서열도 최고참급 원로라는 점을 감안한 듯하다”며 “어려운 시기에 그룹을 안정적으로 꾸려가려면 능력, 인품, 덕망을 두루 갖춰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도 이수빈 회장은 가장 적합한 대안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 체제의 삼성에서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부회장)이 ‘실질적인 넘버2’로 통했다면 이수빈 회장은 ‘공식적인 넘버2’의 예우를 받았다. 삼성그룹 전문경영인 가운데 회장 직함을 달고 있는 인사는 이수빈 회장뿐이다. 과거에도 전문경영인 가운데 회장직에 오른 사람은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등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수빈 회장의 중량감은 삼성에서 걸어온 발자취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1965년 삼성그룹에 입사한 뒤 재무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초고속으로 승진가도를 달렸다. 1977년 제일모직 대표이사에 처음 오른 이후 제일합섬(1979년), 제일제당(1980년), 삼성항공(1984년), 삼성생명(1985년), 삼성증권(1993년) 등 주요 계열사의 CEO를 두루 역임했다. 전문경영인 경력만 30년에 달해 “직업이 CEO”란 말도 듣는다.

이처럼 화려한 경력은 물론 오너 일가의 두터운 신임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이건희 회장과도 각별한 신뢰관계를 쌓아왔다. 그는 이건희 회장의 서울사대부고 4년 선배이기도 하다.

이수빈 회장이 이건희 회장의 최측근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91년 비서실장 겸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발탁되면서부터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수빈 회장은 당시 비서실장으로서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구상과 경영권 승계 계획을 짜는 데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략기획실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은 그 무렵 재무팀 소속으로 이수빈 회장의 지휘를 받았다.

이수빈 회장은 외환위기 직후에는 그룹의 핵심 전문경영인 8인으로 구성된 구조조정위원회 수장을 맡았다. 당시 그는 현명관 비서실장,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함께 그룹 구조조정을 이끄는 3총사로 평가받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의 행보다. 90년대 후반 삼성그룹의 자동차사업 진출은 뜨거운 감자 중의 감자였다. 그룹 내에서도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려져 격론을 벌일 정도였다. 이수빈 회장은 그때 찬성 진영에 서서 이건희 회장의 뜻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삼성은 결국 자동차사업에 진출했다가 철수하고 말았다. 사실상 실패를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자동차사업 진출을 적극 주장했던 찬성파의 입지가 급격히 위축됐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수빈 회장이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겠다”며 2002년 삼성생명 대표이사 직함을 떼고 2선으로 물러났던 것도 자동차사업 실패의 여파 탓이라는 분석을 제기하기도 한다.

어쨌든 삼성의 간판 CEO였던 이수빈 회장은 그때부터 화려한 무대 위에서 사라졌다. 삼성생명의 실질적인 경영은 사장에게 맡기고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등 경영 외적인 활동에 주력했다. 이건희 회장을 대리해 삼성라이온즈야구단 구단주도 맡고 있다.

하지만 오너 퇴진이라는 삼성그룹 70년 역사상 초유의 상황을 맞아 이수빈 회장은 드라마틱하게 무대 위에 다시 섰다. 삼성측은 그가 대외적으로 그룹을 대표하는 역할만을 맡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재계에서도 그가 ‘얼굴마담’ 이상의 위상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그러나 정반대의 견해도 있다. 이건희 회장의 의중을 읽을 줄 아는 몇 안 되는 핵심측근 중 한 명인 그가 단순한 대표자 임무만을 수행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우선 매출규모가 150조 원이 넘는 거대기업 삼성그룹에서 사령탑의 재무분야 장악력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런 점에서 일선에서 물러나는 이건희 회장 입장에서는 30년간 주요 계열사 대표를 맡아 그룹 사정을 훤하게 꿰고 있는 ‘재무통’ 이수빈 회장이야말로 최적의 대리인이다.

또한 이재용 전무가 무난히 경영권을 승계할 때까지 그를 보필할 후견인으로 이수빈 회장만한 인물도 없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평가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재용 전무의 경영수업을 도와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건희 회장이 다시 복귀하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수빈 회장은 이재용 전무로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튼튼한 가교역(役)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경우 이수빈 회장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성공적으로 도운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과 거의 똑같은 길을 걷게 되는 셈이다.

한 재계 전문가는 “이수빈 회장은 삼성그룹 과도체제의 수장으로서 오너인 이건희 회장의 의중을 충실히 그룹에 전파하는 메신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며 “상당히 합리적이고 꼼꼼한 스타일이어서 ‘관리의 삼성’ 시스템을 다잡는 데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로서는 이수빈 회장이 오너 공백을 실질적으로 메우는 ‘파워맨’으로 자리잡을지, 혹은 계열사간 교통정리와 그룹 대표라는 ‘간사’에 머물지 여부가 불투명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너인 이건희 회장이 그 해답을 쥐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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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경기장을 찾은 이수빈(왼쪽) 회장과 이재용 전무.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