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선생과 짧았던 만남, 긴여운…파리 특파원 시절 취재경험 바탕 기자세계 진솔하게 털어놓아

“ 실은 돌아가신 윤이상 선생에 대한 가책을 털고 싶어서 쓴 책이야. ”

<파리의 새벽, 그 화려한 떨림>(선 펴냄)의 저자 김승웅(65) 선생을 만났다. 책 제목부터가 떨리도록 화려하지만, 속은 그 반대다. 흔히 보듯 자화자찬의 무용담이나 유려한 여행 감상문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빚 진 한 채무자의 부채를 털어내는 청산과 회억의 기록물이다.

“ 이젠 비로소 마음의 응어리가 좀 풀린 것 같아.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홀가분해.”

■ 20년만에 지킨 낡은 약속.

<파리의 새벽...>은 선생이 한국일보 파리 특파원으로 활동한 1984년부터 1989년까지 5년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금지된 장난’,‘자전거 도둑’등 영화팬들의 바이블로 통하는 고전영화와 현장 답사기로 시작돼 윤이상 선생과의 미공개 인터뷰 전문과 기사화 불발 사연, 취재 후 장장 13시간씩 차를 몰고 파리의 거처로 돌아올 때 새벽 동이 트면서 멀리 희뿌옇게 드러나는 에펠탑을 보면서 느꼈던 영혼의 떨림과 전율 이야기, 백남준과의 만남 등 여러 흥미로운 체험담이 다채롭게 엮여 있다.

얼핏 보면 잘 나가던 한 언론인의 파리 추억담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저자인 선생은 정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군데군데 숨은그림찾기처럼 뒤섞어놓았다.

이 모자이크 카드는 크게 두 가지다. 그 중 하나가 윤이상 선생에 대한 가책 청산 부분이다. 인터뷰 당시 68세였던 윤이상 선생은 이미 프랑스 대통령보다 유명한 세계적 음악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정작 모국인 한국에서는 소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숱한 고초를 겪으며 ‘빨갱이’로 낙인 찍혀 있었다.

“ 그 첫 인상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나를 바라보던 그 경계어린 눈 빛, 불안한 표정....마치 한 마리 상처입은 짐승 같았어. 어렵게 대화를 풀어가며 인터뷰를 마친 뒤 “정말 내 말 그대로 기사화되겠느냐”고 몇 번이나 묻는 선생께 자신있게 장담했는데, 웬일인지 끝내 기사가 나가지 않았어.

견디다못해 나중에 윤이상 선생께 전화를 걸어 죄송하다고 했더니 오히려 ‘괜찮다’며 나를 위로하시는거야. 그것이 더욱더 내 마음의 가책을 무겁게 했어.”

기사화 불발의 내막은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았다. 당시 실리지 못한 생전 윤이상 선생과의 인터뷰 전문은 이번 책에 글자 하나 바뀜없이 그대로 공개됐다.

■ 변경에서 영혼의 감전을 맞다.

선생이 숨긴 또 하나의 퍼즐은 ‘떨림’이다. 취재후 지친 몸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돌아와 맞던 파리의 새벽은 그에게 영혼의 감전같은 전율, 떨림을 주었다고 했다. “화려한 정도가 아니라 소름이 끼칠만큼 심한 떨림”이었노라고 선생은 덧붙였다.

“ 잘못하면 독자들이 이상하게 오해할까봐 표현하기가 무척 조심스러운 부분인데,..음...예를 들자면 우산을 쭉 펴서 땅바닥에 놓아두면 벼락이 칠 때 전기가 우산대 꼭지를 타고 손잡이 끝까지 타고 흐르게 되쟎아. 마치 그런 우산대처럼 전기가 내 몸을 타고 관통하는 느낌이랄까. 다르게 표현하면, 맨날 우산 아래에 있는 세상만 보다가 어느날 갑자기 우산 위의 세상을 보고 싶어지게 되더라는 거야. 그게 바로 나의 40대 중반, 파리라는 변경에서 일어난 일이었어. 지리적인 변경을 말하는게 아니라 내 인생에서의 변경 얘기야. 사람은 자기 울타리를 뛰쳐나가야지 제대로 자신이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지금의 나 역시 그렇고.”

“ 그 후 실제로 삶에서 변하신 게 있으셨나요?”

“ 그 전까지만해도 나는 남보다 빨리, 앞장서고 싶은 경쟁의식이 심했지. 그런데 그 경험 후부터 그게 아니었구나, 예전의 그 승부욕, 경쟁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지는 나를 봤어. 승부욕도 없어졌고, 취재각도도 바뀌었지.”

덤으로 겪은 배신의 드라마 중 일편. 어느날 폴란드에 들어가 바웬사와 단독 인터뷰 약속을 따냈다. 또 특종감이었다. 그런데 취재준비를 하던 중 마침 천신만고 끝에 들어왔다는 한 방송기자를 보자 마음이 딱해져 바웬사와의 단독 인터뷰 약속정보를 알려주며 함께 인터뷰할 수 있도록 기회를 나눠줬다. 한국일보 본사에서 알면 당장 파면감이었다. 이튿날 아침, 전날의 약속대로 함께 모여 출발하기로 한 시각. 그런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특종욕심에 눈이 먼 방송기자가 오히려 자신조차 속이고 앞질러 출발해버렸음을 뒤늦게야 확인했다.

“ 처음엔 설마 늦잠 때문에 늦나보다 했다니까. 결국 나는 오후 기차를 타고 가서 인터뷰를 했는데, 차 안에서도 ‘진실? 좋아하네! 진실의 공유? 좋아하고 있네!’ 그때부터 기자라는 직업이 한동안 싫어졌었어. 물론 이것도 나중엔 바뀌었지만.”

■ 낭만파 겸 자칭 푼수 '말코 방장'

선생은 1968년 한국일보에 입사, 정치부와 외신부 등을 두루 거치며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기자 신분의 미국 유학생 시절에도 현지 특파원들조차 놓친 지미 카터와의 인터뷰를 성사, 특종을 터뜨린 바 있다.

외교전문기자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40대 초반, 당시 모 ‘실세’로부터 12대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맡아달라는 은밀한 제안을 받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전력도 있다. 약 30년에 걸친 언론인 생활과 관련 요직을 거쳐 2006년에 은퇴. 그는 요즘 온라인 글방의 ‘말코 방장’으로 여전히 지인들에게 인기 상종가다.

수년전부터 가까운 몇몇 대학동기들과 안부삼아 글 교신을 나누던 것이 씨앗이 됐다. 그의 글방은 독특하게도 홈페이지가 아닌 이메일 형태로 움직인다. 선생이 직접 선별, 교정, 편집한 회원들의 글이 매일 모든 글방 식구들에게 이메일로 배달된다.

현재 회원이 400여명. 각계각층의 쟁쟁한 인사들이 글방 식구들이다. 언론사는 떠났지만 기자티는 여전히 숨길 수가 없다. 요즘 일과를 자세히 들어보면 영낙없는 조간신문 편집국장이다.

“ 돈 생기는 일도 아닌데 말야, 이거 생각보다 참 재미있어. 아무래도 이러다 이것도 병 될 것 같아(웃음). 어떨 땐 자다가 ‘기똥찬’ 글을 꿈에서 받아 읽고는 깜짝 놀라 일어나 ‘필시 지금 내 글방에 이 글이 들어왔을거야’싶어 인터넷을 열어볼 때도 있다니까. 개뿔, 있긴 뭐가 있어?(웃음)”

따로 계획해두셨던 다른 일이 없냐고 묻자 “ 그런 거 없어. 인생이고 일이고 계획대로 되는거 봤어? 난 그냥 다 맡겨놓고 살아.” 말하는 선생.

“ 그럼 혹시 지금도 선생님 우산대 꼭지에 다음엔 또 어떤 번개가 칠지 기다리시는 중이세요?(웃음) ”

“ 응, 그럴지도 모르지(웃음). 아등바등하며 사는 거 오래전부터 버렸어. 굳이 혼자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정말 원하는 것들은 어쨌든 이뤄지게 돼 있거든. 파리에서 그걸 깨달았어.”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상한 것이 있다. 작정한 시간과는 달리 한번 대화가 시작되면 번번이 작전 외 연장전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무엇때문일까. 내 심장 안에도 피뢰침 하나 꽂아 세운채 선생의 것처럼 대반전의 낙뢰라도 한번 떨어지길 기다리며 종로를 터덜터덜 배회하다 돌아왔다.

■ 박스: 김승웅은?

1967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1968년 한국일보 입사후 약 20년간 근무.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문화일보 워싱턴특파원, <시사저널>창간 편집국장 및 동 워싱턴 특파원 활약. 국회 공보국장, (외교통상부산하)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 역임. 저서 <모든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등 다수.


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