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 재료·기법사용, 한글자음·모음서체 조형미 고스란히 표현

선명한 붉은 색을 띤 중앙에는 한글 자음과 모음이 쏟아지듯 담겨 있다.

양 옆으로 울퉁불퉁 불균일하게 칠해진 작품은 마치 미니멀 아트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빨간색과 하얀색의 대비는 강렬하면서도 단순하고 동시에 모던하다. ‘자.모음 시리즈 08-ⅹ’이란 이름을 가진 작품은 한글서예의 ‘회화화’와 ‘현대화’를 실험하는 백농 한태상에게서 나왔다.

일찍이 ‘한글’의 조형미를 주목한 화가나 조각가는 존재해왔지만 30여년을 서예가로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독특한 행보인 셈이다. 이렇듯 지난 10월 16일부터 28일까지 부남미술관에서 열린 한태상의 <한글예술전II>의 작품들은 ‘그렸다’고 말할 수도, 그렇다고 ‘쓰여졌다’고 표현할 수도 없이 서예와 회화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예술의 형식은 시대와 더불어 변하지요. 서예가 예술이라고 한다면 역시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21세기를 살면서 조선시대 방식을 고수하고 동시대인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서예는 서서히 죽어가고 말 겁니다.”

그의 실험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1971년 한자서예를 시작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4차례 입선하고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2차례 특선이란 성과를 거두었으며 현재는 서울교대 미술교육과 교수와 한국국제서법연맹 공동회장으로 서예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그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글서예에 발을 디딘 그의 작품성향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부터다.

그는 화선지가 아닌 캔버스를 꺼내 들었고 그 위에 색을 칠했다. 그리고는 먹물이 아닌 아크릴 물감과 혼합재료를 끌어왔다. 한 편의 시를 캔버스 위에 적어내거나 입체적으로 한글 자음을 적고 그 위에 다른 문자를 새겨넣었다.

서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한 것은 신선했지만 직접적으로 표현된 글씨는 서예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그가 선보인 작품은 4년 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으로 해체되어 조형미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동양적 정갈함 역시 또렷해졌다.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세련미가 물씬 흘러내린다.

자·모음 series 08-X Mixed on Canvas 72.5×116.5㎝ 2008

“기존 서예에서는 종이 색깔을 바꾸는 것 이외에는 칼라를 다루지 않죠. 먹은 검정색이고 붓으로 썼을 때 평면으로 표현됩니다. 저는 양각 혹은 음각으로 입체감 있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 시대에 맞는 표현방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에 한국적인 오방색(검정, 하양, 빨강, 노랑, 파랑)을 중심으로 다양한 색을 사용하고 있지요.” 최근에는 고려청자의 상감기법도 도입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한자나 일본의 히라가나가 간혹 등장하긴 하지만 주로 한글이 담겨 있다. 우리의 고유 문자를 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우리 문자의 가치와 우리 문화의 인식을 높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서예라고 하면 중국의 문화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에요.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의 인식의 전환을 위해 한글을 택했고 한글의 예술화를 실험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 평론가 유근오는 그의 이 같은 서예영역의 확장에 대해 “전위적 진화”라고 평하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작업에서 한글의 파편들과 서체의 이미지가 단지 도구적 의미의 요소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조형미의 원형을 찾아내고 새로운 표현양식을 창조하는 주체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며 작업의 의미를 시사했다.

지난해에는 넥타이, 스카프, 가방, 지갑, 벨트 등 아트상품으로도 변화를 꾀했던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해가 갈수록 호의적이다. 특히, 올해 전시를 통해서는 중국이외의 해외 진출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다.

일본의 원로서예작가이자 지난 2005년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의 초청작가이기도 했던 사사키 텟센(佐木鐵仙)은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고 ‘2인 전’을 제안했다.

내년은 한국에서, 내후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또한 유럽과 뉴욕으로의 진출도 준비중이다. 안식년을 맞아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북경사범대학교 연구교수로 머물렀던 그는 그 사이 중국의 미술계와 서예계의 작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색다른 예술적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리고 또 다른 변화를 꿈꾸고 있다.

“미디어 아트처럼 서예도 디지털 영역과 퓨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술의 전제는 ‘항상 새로워야 한다’는 것이죠. 최첨단을 걷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아트페어에서 지금껏 서예가들은 소외되어 왔지만 언젠가는 그곳에 참가하고픈 욕심이 있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서예인들이 시대에 맞는 미각을 찾아내는 시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그에 못지않게 미술계의 관심과 지원이 중요하다는 언급도 잊지 않았다.

◇ 한태상 교수 프로필

서울교대, 홍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서울교대 미술교육과 교수와 한국국제서법연맹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1990년부터 2008년까지 8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2001년 중국 서법가협회 설립 20주년 기념 초대전, 2005년과 2007년 중국 국제 서예 비엔날레 2008년 제1회 국제서법년전 등 수 차례 중국 북경과 항주에서 전시를 열었다. 73년과 76년부터 78년까지 4차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했고 87년과 88년에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했다.



이인선 기자 sun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