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꿈꾸는 비주류들"영화 열정 가득한 옥탑방, 할리우드가 부럽잖아요"10여년 경력 스태프 출신 4인방 "우리만의 영화 만들자" 의기투합옥탑방을 촬영무대 삼아 '좀비' 소재로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 제작

문화를 향유하는 안목이 다양해진 요즘 주류문화의 식상함에 반발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그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주류문화보다 비주류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는 추세다. 문화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기엔 이미 둘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하여, 비주류는 이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주류는 아웃사이더나 이단아가 아니라 ‘비전’이 있고, 예술세계에 ‘비주얼’이 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미래가 밝은 문화인들이다. 뚜렷한 주관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나가는 ‘내일을 꿈꾸는 비(飛)주류’. 그들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철이 들면서 우린 꿈이란 단어에 인색하게 된다. 심지어 나이 들어 꿈이 뭐냐는 질문을 하면 어딘지 모자라 보이기까지 한다. 이미 꿈을 잃어버렸거나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꿈은 세월과 함께 변질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목표’나 ‘바람’이란 단어로 대체되곤 한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사는 우리는 꿈 앞에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서른이 넘어 ‘영화 한 편 만들고 싶다’는 꿈을 위해 모인 ‘키노망고스틴’이란 창작집단을 만났다. 류훈(35), 오영두(34), 장윤정(34), 홍영근(30) 씨는 이미 제목만 들어도 알 만한 영화에서 연출, 시나리오 작가, 특수분장사, 배우 등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맡은 분야가 서로 다르고 개성도 제 각각이지만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키노망고스틴의 사무실은 서울 금호동에 위치한 다세대 주택의 옥탑에 있었다. 이곳은 그들의 영화촬영 장소이자 동시에 장윤정, 오영두 씨의 주거공간이기도 했다. 둘은 부부다. 송혜성 감독의 영화 <카라>에서 특수분장팀장과 연출부 소속으로 만난 이들은 2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장 씨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20대 중반에 분장팀장으로 ‘입봉’해 영화 <은행나무침대>, <지상만가>, <인터뷰>, <비밀>, <번지점프를 하다>, <무영검>, <즐거운 인생> 등에서 특수분장사로 이름을 알려 왔다. 오 씨는 영화 <꼬리치는 남자>로 처음 영화판에 뛰어들어 <카라>, <천일동안>에서 연출부로, <두사부일체>, <달마야 서울 가자>에서는 미술팀에서, 최근 영화 <황진이>에서는 조감독을 했다. 단편영화로는 미장센 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크리스마스를 베다 2>가 있다.

■ 옥탑방에서 즐거운 꿈이 영글다

“여기 옥탑방은 둘의 집이자 작업실이고 또 영화인들의 사랑방이기도 하죠. 매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여길 드나들어요. 충무로의 영화 정보와 인맥이 교류되는 복덕방이 될 때도 있어요. 가끔 고기도 굽고 노래도 부르죠.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낭만이 깃들인 곳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니 생활비의 반은 식비로 나갈 때도 있어요.(웃음)”(오영두)

옥탑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사람 중 부부와 생각이 잘 맞는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단편 <오몽>을 연출하고 영화 <노르웨이 숲> 현장편집을 담당했던 류훈 씨와 어린 시절부터 영화광이었고 연극과 영화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는 배우 홍영근 씨였다.

류 씨는 연세대 공대를 졸업하고도 서울예대 방송연예과에 들어가 연출을 전공할 만큼 영화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그는 만화에도 소질이 있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과학학습만화를 펴내기도 했다. 시나리오와 콘티작가, 만화가로 다재다능한 재능을 발휘해 벌어들인 대부분의 돈은 해외자원봉사를 떠나는 데 사용했다.

류 씨의 유일한 재산은 파나소닉 카메라 ‘hdvx200’이었다.

그는 카메라 하나만 들고 2년 동안 아프리카나 동남아 오지를 돌며 학교와 교회를 짓는 봉사활동에 참여하며 틈틈이 그곳의 일상을 다큐멘터리로 찍기도 했다. 류 씨가 부부와 처음 알게 된 건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영화 <텔미썸딩>에서였다. 그때는 각각 분장팀, 연출부, 제작부 소속의 스태프일 뿐이었다. 하지만 서로는 이미 각자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네 명이 옥탑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죠. 마침 영화쪽 일이 끝나고 다음 작품을 위해 재충전 중이었어요. 그때 ‘이 참에 각자 재능을 발휘해 영화 한 편 만들어 볼까?’라고 누군가 이야기했어요. 우연히 한 말이었는데 다들 ‘그러자’고 대답했고, 곧바로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했죠. 시간이 날 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시놉시스를 만들었어요. 훈이 오빠(류훈)의 카메라도 있겠다, 좀비 분장은 제가 하면 되겠다, 아무 문제 없었죠.”(장윤정)

4- 촬영 후 확인 작업을 하고 있는 키노망고스틴
5- 영화 촬영 중인 키노망고스틴
6- 배우들과 포즈를 취한 키노망고스틴

■ 각자 재능 살리고 1인다역으로 촬영

“영화 찍자”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난 9월에 시작했지만 벌써 단편 6개 분량 중 5편 촬영을 마쳐 놓은 상태다. 6개의 단편 ‘크래크(Crack)’, ‘엄마, 사랑해요’, ‘도망가자!’, ‘MOT’, ‘미안해요’, ‘페인킬러(Painkiller)’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어 장편영화를 만들 계획이었다.

영화 제목은 ‘five W’s and one H(육하원칙)’이다. 좀비와 그의 가족이 주인공인 이 영화의 배경은 대부분 옥탑방과 금호동 인근 동네였다. 일단 옥탑이라는 그들만의 자유로운 촬영소가 있어 영화 찍기에 수월한 점이 많았다. 옥탑은 6개 단편의 콘셉트에 따라 수시로 세트장으로 바뀌곤 했다.

키노망고스틴의 멤버들은 최소 1인5역을 소화해내야만 했다. 각자 영화판에서 스태프로 일하며 모은 돈을 털어 만드는 영화이다 보니 애초 맡은 역할은 어느새 경계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장윤정 씨는 특수분장은 기본이고 프로듀서, 연출, 시나리오, 의상, 조명 등의 역할을 소화해냈다. 류훈 씨는 영화 장비의 대부분을 직접 준비하고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 연출, 현장에서 찍은 데이터 보관 업무 등을 담당한다. 오영두 씨 또한 연출, 시나리오, 편집 그리고 콘티작가를 맡았다.

오 씨가 키노망고스틴의 총지휘자라면 장 씨는 살림 등을 도맡아 하는 안주인이었다. 류 씨는 시나리오를 완성도 있게 발전시키며 팀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게다가 막내인 홍 씨는 배우이면서 동시에 시나리오와 연출, 무술감독의 역할을 담당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소품제작에도 참여했다.

손이 모자라면 처음 해보는 역할도 감당해야만 하는 시스템인 셈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이 없었다. 맡은 일을 미루지도 않았다. 키노망고스틴의 제작환경에 익숙해진 배우들은 일손이 부족하면 발벗고 나설 정도였다.

“아마 어떤 영화에서도 저희처럼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스태프는 없을 겁니다. 말이 필요 없어요. 눈빛만 봐도 무얼 원하는지 서로 알고 있을 정도니까요. 배우들은 노 개런티로 참여해 스태프 역할까지 감수해줘서 눈물 나게 고마울 때도 많아요. 잘 되면 수익의 2%를 나눠주기로 구두계약도 맺었답니다. 지금은 식사제공과 왕복 차비만 건네주고 있거든요.”(장윤정)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영화제작사에서 일하던 때와 달리 분장소품 하나까지 자비를 털어 만들어야 했지만, 놀라운 것은 어려울수록 할 수 있다는 의지가 불타 올랐다는 것이다. 영화계가 불황기를 맞은 지금 키노망고스틴처럼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겠다고 나선 발상은 어쩌면 또 다른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 저예산은 한계가 아닌 자유로움

“이번 기회에 저예산이라는 한계가 주는 자유로움을 맘껏 만끽해보려고요.(웃음) 좀비가 우리나라 영화에서 생소한 소재이기에 오히려 매력이 있다는 확신이 들기도 합니다. 연기에 목말라 있던 영근이가 열연을 하는 데다 베테랑 특수분장사인 윤정이가 좀비 분장을 일급 수준으로 해주어서 영화의 질도 떨어지지 않는답니다.”(류훈)

만약 이들이 20대였다면 어땠을까? 자금 압박에다 영화를 찍다가 부딪히는 수많은 난관에 쉽게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노망고스틴은 10여년 동안 영화현장에서 갈고 닦은 숨은 내공을 가진 데다 어떤 환경이라도 버티고 즐기는 여유까지 지닌 낙천적인 사람들이다.

해가 지면 촬영은 일단 끝이다. 열악한 제작환경에 조명을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부지런함을 선택했다. 새벽 6시부터 해지기 전까지 초고속으로 손발을 맞춰가며 촬영을 하는 것이다.

태양광선을 거울로 반사시켜 조명을 만들기도 했다. 애써 촬영을 끝내고 나면 옥탑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 삼겹살을 구워먹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비록 돈은 없고 아직 하고 싶은 것은 많은 가난한 30대 젊음이지만 옥탑에서는 따끈한 정이 모락모락 피어나곤 했다.

“지금은 영화 찍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어요. 내년 1월말에 완성되면 국내외 영화제에 출품할 예정이지만 그 전에 우리 영화가 정말 스스로도 재미있다는 확신이 들어야 배급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다행히도 편집본을 본 영화계 지인들이 모두 재미있다며 가능성을 발견해주었지요. 마치 엔도르핀 주사를 맞은 것처럼 요즘 신이 나네요.”(홍영근)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장 즐겁다는 사람들이 옥탑에 모여 좀비라는 신선한 소재로 옴니버스 장편영화를 찍고 있다. 물론 영화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선 아무도 장담 못한다. 다만 이들에게는 열정과 낙천성이라는 든든한 무기가 있다는 점이다.

“우린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쩌면 ‘무대뽀’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비결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자신도 있어요. 저희에게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즐거움인데 영화를 찍으면서 지금 충분히 즐겁거든요.”

영화를 사랑하는 옥탑방 낭만 영화인들의 즐거운 인생 철학을 엿본 기분이 들 때, 마침 누군가 “낭만을 위하여!”라고 허공을 향해 건배하고 있었다. 마치 영화를 통해 세상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 ‘똑똑!’하며 노크하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