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화 선배 제안받고 '신의 아그네스' 도전… 영화·드라마 이어 영역확장

다시 돌아오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가 여러모로 화제다. 배우 윤석화가 침잠기를 지나 2년 만에 관객을 만나는 것이나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관록을 쌓은 감독이 무대라는 이질적인 공간에 나선 것 등등.

윤석화의 컴백은 가십성 터럭을 떼면 그만그만한 얘깃거리지만 영화ㆍ드라마 감독이 연극을, 그것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의 연출을 맡은 것은 문화계 크로스오버 현상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주목할만한 ‘반란’이다. 그 주동자는 1997년 서른 살 나이에 <고스트맘마>로 화려하게 데뷔한 한지승 감독.

이후 로맨틱 코미디 <찜>, 멜로 <하루>와 지난해 설경구- 김태희가 주연한 코믹 멜로 <싸움>을 연출했고, 2006년 드라마 <연애시대>가 히트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러니 이번 <신의 아그네스> 연출은 십여년을 호흡한 영상 매체와는 다른 무대라는 생소한 영역에 도전하는 셈이다.

■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 목표

“거기는 한지승 감독님이 주차하는 곳인데. 취재차는 저기 주차 하세요.”

<신의 아그네스> 공연장인 서울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주차 관리요원의 “한지승 감독님”이란 말에 친숙함이 느껴졌다. 공연을 앞두고 극장 1층 카페에서 만난 한 감독은 여유와 가벼운 긴장이 섞인 묘한 인상을 풍겼다.

“배우들은 대본 숙지가 70%정도 됐어요. 영화나 드라마는 완성된 장면을 찍어서 갖고 있으면 되잖아요. 근데 이건 똑같은 걸 계속 반복하면서 좋아지기도 하고, 안 좋아지기도 하고 그래요.”

지난 해 영화 <싸움>이후 그가 고른 작품은 연극 <신의 아그네스>. 일찍이 영화를 통해 이 작품을 접했던 한지승 감독은 작품의 스토리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윤석화 선배가 제안을 했고, 그녀가 출연한다는 사실에 용기를 내어 연출을 하기로 했단다. 그게 9월 중순 경이니 이제 연극 연출 2개월 차에 들어선 셈이다.

그는 “이 작품은 영화보다 원작(연극)의 깊이나 내공이 훨씬 깊다”며 “분석할수록 또 다른 의미와 가치를 찾는다. 보면 볼수록 금맥 찾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수녀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를 목 졸라 살해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을 소재로 믿음과 기적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등장인물간의 치밀한 심리묘사와 탄탄한 구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아이를 낳은 21살의 수녀 아그네스와 그녀를 부모처럼 돌보았던 원장 수녀, 그리고 정신과 의사 닥터 리빙스턴 단 3명의 배우가 극을 이끌어 간다. 국내 초연 당시 아그네스를 했던 윤석화가 이번 공연에서 닥터 리빙스턴을 연기하고, 원장수녀에는 한복희와 지영란이, 아그네스는 전미도와 박혜정이 더블 캐스팅됐다.

한 감독은 “잔재주 안 부리고 기본적인 연극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인터뷰 내내 다섯 번은 한 듯하다. 첫 연출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연출 초반에 뮤지컬도 해 보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연극 연출 못 하겠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닥터 리빙스턴은 직선적이고 차가운 성격이 굉장히 인간적이고 따뜻한 성격으로 변해요. 그런 점을 충분히 표현하려고요. 윤석화 선배의 장점은 살아있는 연기를 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도식화됐다고 생각하고, 저도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배우에요. 순발력도 뛰어나고. 아그네스는 투명성, 순수함을 표현하는 게 목표고요. 원장 수녀는 성직자와 인간적인 스펙트럼을 충분히 오갈 수 있는 그릇 같은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 스토리와 내러티브

드라마 <연애시대> 연출 이후 그를 따라다니는 질문이 생겼다.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는 뭔가요?’ 이제 연극 연출도 맡았으니 이 질문은 ‘영화, 드라마, 연극의 차이는 뭔가요?’로 수정해야겠다. 그는 “영화 드라마가 디지털이라면 연극은 아날로그”라고 비유했다.

“영화랑 방송은 화법이 극과 극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영화는 대화로 친다면 아주 조용히 나긋나긋 귓속말까지 가능한 문법인데, 방송은 예를 들어서 빨래하는 아줌마까지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 들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니까, 표현해 내는 방법 차이가 크거든요. 근데 연극은 또 다른 게 사람 몸이 부딪히면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요. 끝없는 반복과 재생. 말 그대로 가내 수공업.”

드라마와 연극을 해도 그에게 붙는 직함은 ‘감독’이다. 그는 드라마 연출이 끝나고 한 인터뷰에서 “다른 장르를 할수록 영화를 더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연극을 연출하면서도 마음은 영화 밭에 가 있던 것 아닐까? 노파심에 질문을 하자, 그는 “본능적인 기제는 있다”고 대답했다. ‘연극 연출로 얻은 느낌을 영화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라고 무의식적으로 치환하게 된다고. 그는 “이렇게 길게 연기자와 싸움을 해 본적이 없다. 이런 경험이 영상매체로 갈 때 재산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좋은 기회에 좋은 사람들과 작업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고요. 영화를 할 때도 영화가 너무 좋아 그것만 고집했던 건 아니거든요. 전 제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연극을 한 것도 그 점인 것 같아요.”

그는 장르를 오가는 ‘크로스오버 감독’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선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 듯했다. “제 정체성의 기본은 스토리와 내러티브예요. ‘이 이야기가 얼마나 나한테 매력을 주며,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가 기준이고요. ‘어떤 식으로 표현이 될까’는 그 다음 문제예요. 연극을 연출하니까 장르가 확장됐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가 가장 전달했을 때 어울리는 매체가 이거라면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요. 전 과정 중이에요. 지금 시나리오 쓰고 있는 게 휴먼 석세스 스토리, 제가 복합적인 걸 좋아하거든요. 이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것도 또 하고 싶어요.”

이렇듯 한 감독의 새로운 도전은 늘 진행형이다. “작품 분석이 대단하다”는 윤석화의 격찬이 따른 한지승의 <신의 아그네스>는 이달 6일부터 내년 2월 14일까지 무대에 올려진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