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뮤지컬 만들려면 '창작의 기초'로 돌아가야"뮤지컬 작곡·작사가 양성에 전념하며 창작 풍토 개선에도 노력미국 뉴욕대 커리큘럼 도입한 워크숍 발전시켜 창작단체 만들어

문화를 향유하는 안목이 다양해진 요즘 주류문화의 식상함에 반발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그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주류문화보다 비주류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는 추세다.

문화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기엔 이미 둘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하여, 비주류는 이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주류는 아웃사이더나 이단아가 아니라 ‘비전’이 있고, 예술세계에 ‘비주얼’이 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미래가 밝은 문화인들이다. 뚜렷한 주관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나가는 ‘내일을 꿈꾸는 비(飛)주류’. 그들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고성일(38) 씨는 뮤지컬 창작소 <불과 얼음>의 대표이자 극작가 겸 작사가이다. 뮤지컬 극단이 대부분 연출가와 배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불과 얼음>은 작곡가와 작사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극단이다. <불과 얼음>의 1차적 사업은 뮤지컬 제작이 아니라 음악과 가사, 극본이라는 작품 창작에 있기 때문이다.

고 씨는 중앙대학교 연극학과에서 연출을 전공하고 창작 뮤지컬을 제대로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뉴욕대학교 뮤지컬학과에 들어갔다. 그의 전공은 작사였다. 그는 초등학교 때 본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 단박에 매료된 이후 뮤지컬이라는 세계에 푹 빠져 살았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일찍 공연 세계에 눈을 뜬 그는 대학시절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용돈으로 연극과 뮤지컬을 보는 데 투자하는 소위 ‘문화귀족’이었다. 공연에 대한 열정 덕에 매번 점심 거르기는 일쑤였고 덕분에 그의 호주머니는 늘 가벼웠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안목은 키울 수 있었다.

고 씨는 3년 전 작고한 고우영 화백의 차남이다. 미술에 소질이 있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그는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중학교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는 그의 자랑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시절 따로 공부를 하지 않고도 KBS 고교생 창작곡 경연대회에서 ‘외침의 우리’를 작사, 작곡해 대상을 받은 적도 있다.

연출을 전공했지만 창작에도 자신이 있었던 그는 틈틈이 극본을 쓰고 작사를 하며 자신의 재능을 시험하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을 이기지 못했다. 그가 뉴욕대학교 뮤지컬학과에 지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한번에 ‘덜컥’ 붙어버렸다는 거지요. 당시 면접을 볼 때 형편없는 어학실력으로 ‘기적을 일으키겠다’ 식의 호언장담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무모한 용기조차도 꿈을 실현시킬 때는 자양분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실기시험에서 그는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아냈다. 대학에서 전공한 연출 감각에다 작사 실력이 한몫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합격 이후였다. 작사가에게 필수인 어학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2년 동안 그는 밤샘은 기본이고 하루 2시간씩만 자고 버텨내야만 했다. 그의 노력은 지도교수와 같은 과 동기들조차 기적을 일으킨 학생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졸업할 때 우수학생 두 명에게 주어지는 상을 받을 때에야 그는 웃을 수가 있었다.

뉴욕에서 돌아온 고성일 씨는 모교인 중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뮤지컬 창작자를 양성할 필요를 느꼈다. 뮤지컬 작곡, 작사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 데 비해 한국에서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창작교육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 씨는 뉴욕에서 함께 공부한 작곡가, 작사가를 초빙하고 뉴욕대와 같은 커리큘럼을 도입해 뮤지컬 창작 워크숍을 진행했다. 첫 회부터 반응은 뜨거웠다. 2주 동안의 짧은 워크숍이었지만 수료한 학생 중엔 뉴욕대학교에 합격한 사람이 5명이나 되었다.

고 씨는 뮤지컬 창작 워크숍을 보다 전문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 <불과 얼음>이란 창작소를 만들었다. 뜻이 맞는 뮤지컬 워크숍 수료자들과 강사진, 현역 뮤지컬 작곡가와 작사가들이 모였다. 처음 9명에서 출발한 단원이 지금은 20명이나 된다. 단원들은 매주 월요일이 되면 서로의 작업에 대한 품평회를 한다.

“불과 얼음은 단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비영리 창작단체예요. 음악과 극본이 완성되었다고 수정이나 검증의 절차 없이 곧바로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은 설령 우연히 흥행했다 해도 관객에게 모독인 셈이죠. 성급한 절차로는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기 힘들어요.”

<불과 얼음> 단원들은 서로의 작품에 대해 조언해주고 깐깐한 검증 절차를 밟고 난 다음 작품을 올리는 데에 익숙하다. 이런 과정이 왜 필요한지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연필과 지우개’는 <불과 얼음>이 자랑하는 뮤지컬 창작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다. 초급반에서는 솔로곡, 듀엣, 합창 등의 기본적인 노래 형식을 배우고 중급반에서는 노래 형식을 확장시켜 10분짜리 단막 뮤지컬을 완성한다. 10분 뮤지컬 습작을 마치면 그 다음 단계는 20분, 30분짜리 단막 뮤지컬이다.

“단막 뮤지컬이야말로 작곡, 작사가 지망생들에게 꼭 필요한 습작 단계죠. 물론 새로운 어법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습작 단계 없이 뮤지컬을 제작한다는 것은 기초공사 없이 집 짓는 것과 같거든요.”

중급반 수강생들은 10분 뮤지컬을 만들고 나면 배우를 섭외하고 무대를 빌려 발표회 시간을 갖기도 한다. 중급반을 거치면 그 다음 단계는 ‘잡초반’이다. 단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는 반이기도 하다. 6개월 동안의 사회적응 기간 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 남는 자만이 <불과 얼음>의 단원이 될 수가 있다.

“한국의 창작 뮤지컬이 수십 년 동안 많이 발전해 왔다고들 말하죠. 뮤지컬 학과도 생기고 작품도 많이 공연되고 제작 능력도 이전보다는 성장했어요. 하지만 저는 뮤지컬이 많이 공연된다고 해서 그 양만큼 발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뮤지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작곡과 작사에서 질적 수준이 발전하지 않으면 제자리 걸음일 수밖에 없거든요.”

고 씨는 “한국 뮤지컬은 현재 콘텐츠는 없고 기획력으로 승부를 걸기에 급급하다”고 비판한다. “작곡과 작사라는 탄탄한 기초공사부터 이뤄져야 한국 뮤지컬에도 명작이 탄생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가 어렵게 <불과 얼음>이란 창작소를 이끌어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뮤지컬을 창작하는 환경이 열악하다는 핑계를 대기보단 실력으로 무장한 창작인을 많이 양성해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환경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불과 얼음>의 대표 고성일 씨가 꿈꾸는 세상이기도 하다.

불과얼음 창작교육프로그램 연필과 지우개 수업현장(위)
불과얼음 창작 프로그램 연필과 지우개 수강생들과(아래)

■ "아버지 고우영 화백의 작품에 내 색깔 입혀"
창작 뮤지컬 '간부 반금련' 독회 통해 완성도 제고


고성일 씨는 12월 15일 강남구 역삼동 ICA 아카데미에서 뮤지컬 <간부 반금련> 독회를 갖는다. 고 씨는 뮤지컬이 무대에 올려지기 전 쇼케이스나 워크숍 공연 이전에 배우들을 통해 미리 작품을 시연하는 독회야말로 창작인들과 제작사들에게 꼭 필요한 검증 단계라고 말한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류희(이하 류): 고성일 대표의 뮤지컬 <간부 반금련>이 독회라는 형식을 통해 선보일 예정이라는데.

고성일(이하 고): <간부 반금련>은 중국 소설 <수호지> 중 재미와 탄탄한 플롯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금병매’ 부분을 뮤지컬화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 아버지인 고우영 화백의 만화 작품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대본과 가사는 제가, 작곡은 저의 파트너인 천필재 씨가 맡았다. 그날 제작사와 투자사 관계자, 그리고 작품에 대해 조언을 해주실 공연예술 관계자들이 많이 참석할 예정이다.

류: 뮤지컬이 공연되기 전에 몇 차례의 독회를 거친다는 것이 한국 뮤지컬에서는 아직 낯선 풍토다. 보통 쇼케이스를 통해 보여주지 않나?

고: 작품의 일부만을 보여주는 쇼케이스는 자칫 섣부른 기대감을 줘서 제작사나 투자사들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만약 검증되지 않은 작품을 성급하게 올려 실패한다면 누가 가장 큰 손해를 볼까? 제작사는 금전적 손실을 보겠지만 창작자들은 명예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독회는 하나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들을 통해 시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작품의 완성도와 제작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독회의 방법은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가 작품 전체의 대사와 노래를 하고 필요한 지문도 읽어 공연되었을 때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제작사에게는 대본과 데모 CD를 받아서 분석하는 것보다 독회를 직접 보는 것이 좋은 작품을 가려내는 평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류: 브로드웨이에서 독회는 필수단계인가?

고: 한국에서는 독회가 많지는 않지만 뉴욕에서 독회는 상당히 일반적인 과정이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뮤지컬들은 대부분 독회 과정을 거친다고 보면 된다. 성공적인 뮤지컬 작품은 무대에 올려지기까지 3년에서 4년 정도 소요된다. 독회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결국 완성도 높은 작품을 공연하기 위함이다.

류: 무대에 올리고 난 다음 수정하는 뮤지컬도 있지 않나?

고: 그런 방법이야말로 무책임한 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공연예술은 작품에 문제가 있다면 공연 직전이나 심지어는 공연 중에라도 바꿔야 하지만 그것은 작품의 생명력을 더하기 위한 작업일 때야 가능하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이렇게 올리고 나중에 재공연할 때 조금 손을 보자’라는 생각은 워크숍 공연에서나 할 일이다. 그런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을 때 관객은 하자 있는 상품을 비싼 돈을 주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관람표를 사는 관객은 실험 대상이 아니라 모셔야 할 사람들이다.

류: <간부 반금련>의 경우 3년 동안 준비한 작품이라고 들었다.

고: 작년 6월 충무아트홀 컨벤션룸에서 1차 독회를 한 바 있다. 그때는 뮤지컬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조언을 들었던 성격이었는데 이번 2차 독회는 제작사를 구하는 의미의 독회라고 할 수 있다.

류: 아버지의 작품을 뮤지컬로 각색하는 작업에서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이 있는가?

고: <간부 반금련>이란 작품을 처음 쓸 때는 고우영 화백이라는 분의 미학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살릴 수 있을 지가 고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로서 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더 치중하게 됐다. 인물의 관계나 상황도 더욱 강화했다. 아마도 이 작품을 보시는 분들은 어떤 부분이 아버지의 만화에 나오는 대사인지, 또 어떤 부분이 제가 쓴 대사인지 쉽게 구분하지는 못하실 거다. 어쩌면 내가 아버지의 감각을 그대로 물려받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아들의 짓거리’를 보시고 조금이라도 자랑스러워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류: 예술가로서 고우영 화백님, 아버지를 회상한다면?

고: 아버지께서 예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기억 난다. 당신께서는 어려운 시절에 만화를 그리시면서 그 자체가 개인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원하셨던 것도, 만화계의 발전을 위해서 작업하셨던 게 아니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하루 그렸을 뿐이라는 말씀이다. 생존을 위해 그리신 것이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께서 그렇게 만화를 그리셨기 때문에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고된 삶이 스며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아버지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류: 현재 한국 뮤지컬의 가장 큰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고: 제가 감히 지적할 만한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다. 저는 뮤지컬계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에 깔려 있는 일종의 ‘정신병’에 대해 말하고 싶다. 늘 급하다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돈벌이에 급급해서 남을 밟고 일어서서 경쟁에서 이기려는 데 승부를 걸고 있다. 공연도 마찬가지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해야 할 당연한 작업을 성실히 해야 한다. 창작자들은 기초를 배워야 하고, 제작자들은 완성도 있는 작품 제작을 위해 연극 철학에 대해 점검해야 하고, 투자자들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류: <불과 얼음>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고: <불과 얼음>은 2006년 7월에 설립한 뮤지컬 창작소다. 이제 겨우 2년 6개월이 되었다. 짧은 시간에 성공적인 예술가들을 배출했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사람들은 “한국 뮤지컬에는 아직 수준 높은 창작 뮤지컬이 없다. 뮤지컬 전문 작곡가, 작사가가 없다”고 말한다. 외국의 명작 뮤지컬 작품을 보는 눈을 우린 가졌지만, 한국 뮤지컬엔 명작이 없다고 탓하기만 한다. 10년이 걸릴 수도 있고 20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새롭고 신선한 작품을 창작해내어 언젠가 한국 뮤지컬에도 진정한 명작을 만들어내는 게 불과 얼음의 꿈이다. 꿈을 위한 실천으로 불과 얼음 단원들의 진지한 작업은 오늘도 묵묵히 이루어지고 있다.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