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상 수상 '알파의 시간'도 세잔의 그림과허만하 시인 에세이서 힌트 얻어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순 우리말.

중고등학교 국어시간, 우리말 뜻풀이 수업에서 가장 자주 배운 단어 중 하나가 이 ‘시나브로’란 부사다. 이 단어는 대화를 할 때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가끔 기사를 마감하며 써먹는 전형적인 문어체 단어인데, 작가 하성란을 만나며 이 말이 줄곧 뇌리를 스쳤다.

서른 살 되던 해인 1996년 ‘풀잎’으로 등단한 이후 그녀는 장편 ‘식사의 즐거움’과 ‘삿뽀로 여인숙’, 소설집 ‘루빈의 술잔’과 ‘옆집 여자’를 쓰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알렸다.

이후 99년 ‘곰팡이꽃’으로 동인문학상을, 2000년 ‘기쁘다 구주 오셨네’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웨하스’를 발표하며 중견 작가로 성장했다. 탁월한 묘사와 미학적 구성이 묵직한 메시지와 얼버무려진 작가의 작품은 가벼운 문장이 판치는 출판 시장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근처 오셨나요? 제가 나갈게요.”

하이톤의 맑은 목소리는 ‘이 여린 작가가 어떻게 냉소적인 작품을 쓸까’란 의문을 품게 했다. 스스로 “문운(文運)이 좋다”고 말하지만, 인터뷰 도중 기자의 질문과 자신의 대답을 적어 내려가는 노란 메모 노트를 바라보며 ‘아마도 이 작가의 문학적 역량은 저 메모 노트와 함께 쌓여 가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꺼내 보면 재밌거든요. 제가 무슨 말을 했나, 무슨 질문을 받았나.”

하성란 작품의 최대 장점인 묘사는 바로 저 메모 노트에서 발현되는 게 아닐까.

■ 알파의 시간이 흐르면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들여다보는 건데, 그것도 아주 지긋이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것. 데카르트 식으로 바꿔 얘기하면 제가 무언가를 보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드는 거죠. 그게 작은 사물일수록 오래 들여다보고, 거기서 꺼낼 얘기들이 많아지고. 인물의 내면 심리를 사물이 대신 이야기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래서 직접적인 심리묘사보다는 사물의 묘사가 많았던 것 같아요.”

이 치밀하고 꼼꼼한 관찰로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우리사회 모습을 그려냈다.

‘별모양의 얼룩’에서는 99년 씨랜드 화재참사를 사실주의적 필치와 빼어난 테크닉으로 극화했다. ‘1984년’에서는 지나간 1984년 한국의 단면을 들추어내어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과 대치시킨다. 작가의 장점은 이후 발표하는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초반에 그림을 통해서 힌트를 얻었어요. 예를 들면 점묘법 같은 것. 전혀 다른 두 개의 색을 병치시켜서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것처럼 관계없는 문장과 문장을 겹침으로써 주제에 맞는 핵심으로 가는 거죠. ‘풀’에서 시작해서 ‘루빈의 술잔’까지 그런 방법들을 실험해본 과정이었고요. 이 후에는 문체나 방법론에서 벗어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서사에 중점을 두려고 했는데 이후에도 계속 방법론에 대한 평가가 나오는 것 같아요.”

하 작가는 여전히 그림과 다른 문학 작품을 통해 모티프를 얻는다고 말했다. 지난 달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알파의 시간’ 역시 세잔의 그림과 그 그림을 보며 쓴 허만하 시인의 에세이에서 힌트를 얻었다. 대화는 올해 수상한 작품으로 넘어갔다.

<알파의 시간>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중년의 딸 이야기다. 사업을 한다며 가족을 가난 속에 던져두고 떠난 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네 아이들과 버림받은 여자로 살아야 했던 젊은 시절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로 인해 상처 받은 나는 시간의 힘으로 각성과 화해를 이룬다.

“허만하 시인은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 그림을 보고 ‘아마 세잔은 그 풍경을 받아들일 눈을 가지는 데는 시대를 앞질러 달렸던 ‘플러스 알파의 시간’이 있을 거다’라고 말하죠. 제목은 여기서 차용했지만, 제가 말한 알파의 시간이라는 건 저마다 흘러가는 제 속도의 시간을 말하는 거였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나의 시간이 모두 다르다는 거죠. 시간이 가진 기만성. 요즘은 그런 시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돼요.”

올해 오영수 문학상을 받은 ‘그 여름의 수사’는 한여름 할머니의 부고를 전해 받고 먼 곳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보를 치게 된 10살 꼬마인 나의 시선으로 본 장례식이다. 전보는 열자까지 기본요금을 받으므로 열자를 넘기지 않기 위해 나는 내 주변의 세상을 10자로 축약한다. 작가는 “삶과 죽음이 혼재된 여름 한 철”이라고 설명했다.

“제가 한 여름에 할머니 초상을 겪은 일이 있어요. 마감하면서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여름은 어떻게 보면 성장통의 계절이기도 하고 젊음의 계절이기도 하고. 그것도 지나가는 계절에 불과하다는 메시지에요.”

■ 터닝 포인트가 될 장편

96년 등단해 부지런히 머리와 손을 놀린 그녀는 한때 ‘올해의 다작 작가’에 선정될 만큼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인터넷 연재로 인기 있는 장편을 써내기도 했고, 문학작품을 비틀어 새로운 시선을 던지기도 했으며 프로야구와 88올림픽으로 대표되는 스포츠를 통해 그 시절 우리 사회의 단면을 회상하기도 했다. 기자는 작가의 이런 부지런한 시도가 시나브로 작품 세계를 탄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계절마다 소설을 내놓고 일간지와 잡지에 칼럼을 연재하지만, 인터뷰 중간 그녀는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이번 겨울 약속한 단편 소설 하나를 펑크 냈다고. 이 달 말 8명의 여성작가가 서울을 주제로 쓴 글을 엮어 책을 낼 계획인데 아직 마감을 못했다고 걱정했다.

“큰일 났네요. 글쓰기가 어찌나 싫은 지요.”

작가는 지금이 슬럼프는 아니지만, 가장 작가로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시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대문학상 수상 소감에 쓴 구절을 소개했다.

“소감에 썼던 말 중에 ‘홀로 어둠 속을 가는 사람처럼 천천히 갈 것이다’란 부분이 있어요. 데카르트의 말인데 지금 그 말이 굉장히 절실해요. 이제부터 진짜 속도를 좀 내서 어둠 속에서 가는 사람처럼 써야 진짜 글을 쓸 수 있겠다. 안 그러면 그 동안 썼던 몇 몇 글처럼 재능만 있는 글이 될 것 같아서요.”

지난 가을부터 계간지 <자음과 모음>에 연재하기 시작한 장편 ‘A’는 이런 고민이 투영된 작품이다. 주홍글씨에서 모티프를 딴 작품은 이전 작품과 전혀 다른 서사 방식을 시도했는데, 40대로 접어들면서 터닝 포인트가 될 작품으로 염두해 두고 있다고. 연재가 끝나고 다시 만날 때쯤 저 만큼 더 깊어진 작품 세계를 갖고 있을 거라고 기대해 본다.

“아직도 시행착오를 많이 해요. 뭔가 더 경험 있고 지혜로운 글을 쓰고 싶죠. 행로를 천천히 하면서 지긋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