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의 침묵은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한지승 영화 감독과 의기 투합… 배역 바꿔 3번째 출연

윤석화(尹石花), 오래된 재봉틀이 있는 탁자 앞에 앉아 큰 창 너머로 거리를 보곤 한다. 지금 그 옆엔 아담하게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 있다.

그와 함께 대학로의 설치극장 ‘정美소’를 이끌어가고 있는 식구들은 1층 카페의 그 자리가 바로 중년에 접어든 ‘윤 대표’의 지정석이라 말한다. 윤석화는 그 자리를 지키며 2년을 보냈다.

스스로 ‘과오(過誤)’라 인정하는 학력 파문으로 침잠해야 했던 시간들은 어떤 의미였을까. 대학로의 뒷길을 거니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월간 객석 앞을 오가는 이들과 어떤 소통을 했을까. 무엇이 변했을까.

“적지 않은 나이에 내 과오를 정리하는 일이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한없이 낮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고난을 축복이라 믿고 많이 기도했다.”

여전히 큰 짐을 지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활달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잠깐 생각에 잠기는 일이 잦다.

윤석화는 2008년 12월6일 연극 ‘신의 아그네스(Agnes of God)’로 돌아왔다. 무대에 섰다. 수녀 아그네스가 아닌 정신과 의사 닥터 리빙스턴이다.

1983년 ‘아그네스’라는 젊은 수녀가 갓 낳은 사생아를 목졸라 죽인 사건을 따라가는 존 필마이어 원작의 충격적인 연극을 처음 소개한 연결 고리가 바로 윤석화였고, 초연에선 주인공 ‘아그네스’ 역을 맡았다.

“25년 전의 무모했던 열정, 연극 하나만 생각하던 애정을 되살리고 싶었다. 지인들과 얘기하고 고민하다 복귀작으로 이 작품을 선택했다.”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세 여인. 두 딸을 버리고 성직자가 된 원장수녀,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난 여동생을 둔 여의사 리빙스턴 그리고 아그네스가 극을 이끈다. 세 여인의 아픔이 하나씩 드러나고, 갈등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배우와 관객은 극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초연 당시 리빙스턴 박사는 마흔두살의 윤소정이 맡았다. 이십대 후반이었던 ‘아그네스’ 윤석화는 ‘나도 소정이 언니의 나이가 되면 리빙스턴역을 해보면 어떨까’하며 막연한 상상에 빠졌지만 곧 잊고 살았다. 딱히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욕심없이 살아가는 스타일 탓이었다.

그런 그에게 학력 파문은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됐고, 현실을 인지하게 계기가 됐다.

“닥터 리빙스턴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유일한 욕심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역할이 주어지면 그저 작품 속의 인물을 느끼고, 상상하고, 빠져 드는 배우다. 그런 다음 연출에 의해 다시 한번 채로 걸러지듯 연기를 정리하고 무대에 선다.”

윤석화가 1983년과 1999년에 이어 세번째로 출연하는 ‘신의 아그네스’는 또 다른 화제를 만들었다. 전격적으로 영화감독을 연출로 영입한 것이다. ‘고스트 맘마’, ‘싸움’ 등의 영화에서 메가폰을 잡았던 한지승 감독이 처음으로 연극 연출을 맡았다.

연출의 몫인 작품의 해석과 분석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한 감독은 새로움과 작품 분석이 강한 연출가다. TV 미니시리즈 ‘연애시대’를 보면서 좋은 인상을 받았고, 그것이 계기가 돼 이번에 연출을 제안했다. 잔재주를 피우기 보다는 정통적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연기자들과 호흡을 맞췄다.”

윤석화와 한지승 감독은 정면 승부에 뜻을 같이 했다.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담백함과 원작에 대한 충실함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윤석화는 ‘연극과 시는 통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무대에 서면 관객들도 내면의 눈으로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주길 바란다.

“의미만 있고, 재미가 없으면 답답하다. 반대로 재미만 있고, 의미가 없으면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상반되는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이 배우의 몫이 아닌가요.”

지금 윤석화의 바람은 딱 하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공간’이란 의미의 설치극장 ‘정美소’의 무대에 올라간 연극 ‘신의 아그네스’가 약속된 날짜인 내년 1월10일까지 아무 탈 없이 계속되는 것 뿐이다.

그것으로 모든 사랑하는 이들에게 죄송함과 고마움에 대해 답하고 싶어한다.

■ 연극'신의아그네스'의 대본을 구하기까지

“대본 좀 구할 수 없을까요?”

1982년 뉴욕 브로드웨이의 뮤직박스 시어터에서 초연된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 매료된 윤석화는 공연을 보며 몰래 녹취를 시도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쪽 면에 녹음할 수 있는 시간이 고작 40분. 앞뒤를 돌려도 중간에 끊어짐을 해결할 수 없었다.

어느날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빠져나갈 때 윤석화는 무작정 무대 위로 올라가 한 관계자를 막아 섰다.

“연극을 공부하는 한국 학생인데, 대본이 꼭 필요하다”고 부탁했다. “아니면, 대본을 빌려주면 복사한 뒤 반납하겠다”고 했다. 대답은 “노(No)”였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더 간절하게 요청했더니 상대방도 “내가 연출가”라고 밝히면서 아직 출판되지 않은 대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출판 에이전시에게 편지를 써주고, 전화를 해놓을 테니 그 쪽에서 구해보라는 것이었다.

윤석화는 우여곡절 끝에 아직 정식으로 출판도 되지 않은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대본을 들고 1983년 여름 미국 뉴욕에서 서울로 돌아왔고, 8월5일부터 30일까지 초연 무대에 올라 주인공 ‘아그네스’를 연기했다.

물론 윤석화가 스스로 ‘대본 구하기’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연수를 위해 뉴욕을 찾은 정진수, 손진책, 윤호진씨와 함께 이 연극을 봤고, 한국에 돌아간 연출가들로부터 ‘대본을 구해보라’는 권유가 있었기에 ‘무모한 도전’에 나섰던 것이다.

◇ 윤석화는…

생년월일

1956년 1월16일

주요 출연작

연극 1975년 민중극단 ‘꿀맛’으로 데뷔

‘신의 아그네스’(1983, 1999년)

‘바다의 여인’, ‘세 자매’(2000년)

‘위트’(2005년)

‘어메이징 그레이스’(2006년)

뮤지컬 ‘명성황후’(1996년)

‘넌센스’(2001년)

‘브로드웨이 42번가’, ‘토요일밤의 열기’(2004년)

영화 ‘레테의 연가’(1987년)

주요 저서 ‘작은 평화’, ‘윤석화가 만난 사람’(2004년)

주요 수상

1989, 1996년 백상예술대상 여자연기상

1997년 배우협회 선정 제1회 올해의 배우상

1998년 이해랑 연극상

2004년 한국뮤지컬대상



이창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