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 동양고전 문학 전공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 설립상아탑에 갇힌 텍스트 분석 대중의 언어로 풀어 책으로 출간

국내에서 순수학문을 공부하며 스스로의 능력으로 생존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대학 사회에 편입되거나, 든든한 연구 스폰서를 만나거나, 아니면 평생 밥벌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첫 번째 방법, 즉 대학구조에 안정적으로 편입되기 위해 ‘교수가 되는 것’을 열망하고, 교수 직함을 따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순수학문이 대학의 상아탑에 머물러 있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고전평론가 고미숙(47) 씨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1990년대 중반 대학을 벗어나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를 만들었다. 20평 남짓한 공간에서 시작한 이 연구공동체는 현재 정식 회원 60여명에 400평 규모의 대중적인 인문학 연구공간이 됐다.

18~19세기 동양 고전문학을 전공한 그는 상아탑에 갇혀 있는 텍스트를 분석해 대중의 언어로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고전평론가’란 직함도 스스로 지었다.

2003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하 열하일기)을 쓰며 대중 작가로서 가능성을 보여준 그는 이후 일 년에 한 두 권씩 베스트셀러를 써내고 있다. 최근 그가 낸 책은 <호모 에로스>. 출판사 그린비가 지난해부터 출간하고 있는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달인’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이다.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이 시리즈는 고전을 바탕으로 현대인들의 사유와 행동 방식을 설명한다.

■ 20대 연애 방식은 소비 방식과 같아

“이전에 쓴 <나비와 전사>에서 18~19세기부터 지금까지 현대인의 정신구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했어요. 오늘의 20대가 어떻게 사회로부터 세뇌되고 주입되어서 욕망을 만들어 가는지 설명한 건데, 그걸 읽고 연애에 관한 생각을 바꿨다는 독자가 있었죠. ‘책을 보고 (독자가) 주체적으로 바뀔 수 있구나’ 생각했죠. 이 책은 그런 변화를 연애로 특화시킨 거고요.”

<열하일기> 이후 그의 책이 한층 더 발랄하고 경쾌해졌지만, 그가 ‘연애인문서’를 쓸 줄은 몰랐다. 물론 책을 끝까지 숙지하고 나면 인문서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말이다. 유쾌한 말투는 글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붓다와 동의보감, 임꺽정, 스피노자 등 동서양 고전 텍스트를 10대들의 언어로 설명해낸다.

그가 주장하는 건 ‘몸으로 하는 연애’. 단어선정부터 파격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야한 생각은 금물이다. 방점이 ‘인문학’에 있는 만큼, 기존의 실용서에서 설명하는 사랑의 ‘테크닉’, 연애 ‘매뉴얼’과는 다른 애정관이 제시된다.

“지금 젊은이들은 ‘연애는 소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주말에 데이트를 한다면 영화 보고 차 마시고 드라이브하는 ‘데이트 코스’를 도는 거지, 같이 책을 읽는다거나 세미나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돈 많은 사람에게 끌리거나 성형으로 자신을 상품화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보는 기준이 화폐를 기준으로 정리되는 것도 있고요.”

남에게 보여주는 연애가 아닌 몸으로 하는 연애를 하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 그가 말하는 몸으로 하는 연애는 삶의 양식을 바꾸는 과정이다. 몸이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리듬을 알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통념이나 척도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그는 “쇼핑몰과 백화점 가지 말고 공부하라”고 조언한다.

‘시절인연’이란 키워드로 정리되는 연애관도 흥미롭다. 존재는 시공간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아무리 연애의 달인이라도 시절인연(時節因緣. 불교 용어로 크나큰 의문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한동안의 세월을 지내다보면 필연적으로 그 의문이 마침내 풀리는 때)이 맞지 않으면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 ‘첫눈에 반한다’는 의미도 시공간적 배치가 허용할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준비된 상황에서만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시절인연이란 말 때문에 운명론을 생각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주식이나 GNP 수치를 보는 것처럼 사회적 조건을 분석하잖아요. 이걸 운명이라고 체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거든요. 자기 존재에 대해서도 그만큼 알게 되면 많이 개입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죠. 연애가 단지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외부와 맺는 모든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고 앎의 크기가 존재의 크기를 결정하니까요.”

■ 고전은 나의 힘

대화는 연애에서 공부, 다시 그의 입담의 원천인 고전으로 넘어왔다. 그를 스타로 만든 <열하일기>를 비롯해 그는 거의 모든 비평을 고전에 기대고 있다. 연암 박지원과 이옥에서부터 변강쇠타령과 춘향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고미숙의 입을 통해 재해석된다.

이 해석은 마치 18세기 조선인과 20세기 한국인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둔 통역관의 작업과 비슷하다. 그가 구사하는 구어체의 말투는 고전이 갖는 권위를 낮추는 대신 대중성을 얻었다.

“지나간 시대에서 엄청 배울 게 많아요. 단 ‘이게 우리의 전통과 역사다’고 생각하면 배울게 없죠. 지금 기준에 맞춰서 다시 판을 짜야 하니까. 하지만 당시 상황을 긍정하면 엄청난 지혜가 담겨 있죠. 예를 들어 열하일기를 보면서 글쓰기와 말, 삶이 일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았던 것처럼 서양철학에서 제가 얻지 못한 걸 얻었죠.”

그가 최근에 읽은 고전은 홍명희의 <임꺽정>. 고전에서 ‘바로 지금’의 대안을 찾는 그는 이 책에서 청년 실업문제 해결책을 얻었단다. 조선시대 민초들의 삶이 가장 현실적으로 담겨 있는 <임꺽정>은 길거리에서 사람을 만나 네트워크를 만들고 연애를 하고 기술을 배워 ‘생활의 달인’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자보다 강한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을 통해서 조선시대 여성상을 바꿀 수도 있단다.

“일자무식에 땅도 부쳐 먹을 데가 없는 하층민이 절대 빈곤하게 살지 않아요. 배우면서 놀고 우정을 통해 경제 네트워크를 만들고, 자식 낳고 먹고 살아요. 이게 청년 실업의 대안이라고 생각했죠. 1월부터 수유너머에서 강의를 하고 강의가 잘 되면 책으로 쓸 생각이에요.”

그는 언젠가 “연구실에서 공부는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공부가 일상이고 일상이 곧 공부다. 바로 그 때문에 일상은 곧 혁명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그가 말하는 혁명은 바리케이드 위의 투쟁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에서 오는 삶의 변화일게다. 한 줄의 글에서 지혜를 얻고 이 지혜를 삶에 투영시켜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인문학자 고미숙 씨가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 '수유너머'
대안적 학문연구 실천하며 대중과 호흡


고미숙 씨를 논하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연구공간 수유너머’다. 대학 구조에서 탈피해 만든 ‘지적 공동체’는 대안적인 학문 연구 방식을 실천하면서 대중과 호흡했다.

올해로 8년째를 맞는 수유너머는 1997년 고미숙 씨가 개인공부방으로 만든 ‘수유연구실’ 사람들과 이진경, 고병권 등 서울사회과학연구소에서 독립한 연구자의 공부모임 ‘너머’ 사람들이 2000년 통합하면서 탄생했다. 수유리에서 시작했지만, 이제 용산구로 둥지를 옮겼다.

제도권 바깥에서 지속적으로 인문학을 연구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지만, 지식인들이 생활공동체를 만든다는 점에서 단연 새로운 시도다. 이곳의 정식 멤버들은 연구실 한켠에 마련된 식당에서 함께 밥을 지어 먹는다.

“그때는 세미나 같은 공식 일정만으로는 공부가 안 바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세미나하고 같이 밥을 먹는 걸 중요하게 여겼죠. 초기에는 내가 음식을 사오거나 만들어서 ‘음식의 향연’을 펼쳤죠. 밥의 힘이 굉장히 커요. 오곡에 담긴 물, 불, 바람의 기운을 먹는 건데, 밥을 같이 먹으면 밀착도가 달라지고 공부가 밥을 통해 체화된다는 느낌이 들죠.”

밥을 먹고 배가 든든해진 연구원들은 연구소에 붙어 앉아 공부하고 토론하고 사유했다. 여전히 수유너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식당이다. 지식과 밥, 하루 생활리듬이 일치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란다.

전문가 중심의 연구소는 이제 10살 꼬마부터 대학원과정까지 인문학에 관한 모든 세미나와 강연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연구소 한쪽에 마련된 영화제작소에서는 영화 수업과 촬영, 편집과 시사회도 한다. 수유너머 정회원의 90%는 고정적인 직업을 갖지 않고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연구소 회원들끼리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연애도 한다. 말 그대로 생활공동체다.

“누구든지 어떤 공부든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접속할 수 있게 열어 둔거죠.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걸 시도했고. 회원들도 여기 오면서 많이 바뀌었는데, 아직 근본적인 변화는 아닌 듯해요. 전혀 낯선 곳에서 이런 공동체를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 거란 느낌은 못 받아요. 이 회원들이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됐으면 해요.”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