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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된 이우성 시인
"등단 소식에 나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구덩이와 모자 이미지 통해 가족모습 그려… 10년만에 꿈이뤄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



“등단이 ‘눈에 보일 듯 말 듯’했어요. 시를 습작한 사람들이라면 자기가 어느 정도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지만, 등단하는 단 한 명으로 선택받을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이 있거든요. 제가 그 한 명이 됐다는 데 놀랐어요.”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이우성 시인은 “꼭 성공스토리 말하는 것 같다”며 겸연쩍어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스무 살 때 세운 시인의 꿈을 10년 만에 이뤘다.

서울 후암동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당선 전화를 받고서는 너무 기뻐 좌회전 신호를 잇따라 놓치고 안국동 부근까지 차를 몰았단다. 그는 “부모님께 전화해서 엉엉 울며 소식을 전했고 어머니도 감격해서 같이 우셨다”고 덧붙였다.

대학교 은사 서범석 평론가(현 대진대 국문과 교수)를 사사한 이 시인은 대학 동아리 ‘틈’에서 후배들과 시집을 읽고 시를 습작하며 기본기를 다졌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문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남성지 의 기자로 일하며 문학 기사를 썼고, 지난해부터 문인들이 진행하는 인터넷 라디오방송 ‘문장의 소리’ 패널로 참여했다. 1월 6일에 고별 방송을 녹음한다고.

“사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에서 시를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동아리 후배들도 다 제가 ‘꼬셔서’ 시를 습작했는데, 등단한 것보다 후배들에게 기쁨을 주어서 행복합니다. 우리 과에서 제가 ‘등단 1호’이거든요.”

이 시인은 2007년 권혁웅, 김경주, 강정 등 시인이 활동하는 시모임 ‘금요반’ 멤버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기량을 다졌다. 여러 ‘선생님’들께 조언을 듣고 장점을 발견해 습작했다고. 이 시인은 “김행숙, 이상욱, 진은영, 조연호 시인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쓰고 이분들께 조언을 받았는데 빠지지 않고 습작을 해갔다. 금요반 선배들은 나를 두고 ‘빛의 속도로 발전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당선작은 구덩이와 모자의 이미지를 통해 가족의 모습을 그린 ‘무럭무럭 구덩이’. 구덩이는 우리 삶에서 보이는 고통이나 곤란을 뜻하며, 삶에서 이 ‘구덩이’가 점점 더 깊어지는 가족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신춘문예 최종 심사위원이었던 김기택 시인은 당선 발표 후 이 시인과 만난 자리에서 “작품이 재미있었고, 뭔가 배워서 쓰는 시가 아니라 쓰고 싶어 쓰는,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시는 생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이 시인은 앞으로도 남성지에서 계속 일하면서 시를 쓸 생각이란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길을 걸으며 시상을 떠올리고, 컴퓨터 앞에서 몇 시간이고 씨름을 한다는 그가 세월이 지난 후 저만큼 더 넓어진 문학세계를 가질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 무럭무럭 구덩이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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