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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배우 김성기 "캐릭터 자유자재로 뛰어넘을 때 큰 희열 느껴"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코믹 연기로 정평 '한국의 미스터빈' 별명
20년이상 감초 조연 '진지한 온몸 연기'로 관객 웃음 이끌어내
"'지붕 위의 바이올린' 테비에 역 등 고전명작 주연도 탐나"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





문화를 향유하는 안목이 다양해진 요즘 주류문화의 식상함에 반발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그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주류문화보다 비주류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는 추세다. 문화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기엔 이미 둘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하여, 비주류는 이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주류는 아웃사이더나 이단아가 아니라 ‘비전’이 있고, 예술세계에 ‘비주얼’이 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미래가 밝은 문화인들이다. 뚜렷한 주관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나가는 ‘내일을 꿈꾸는 비(飛)주류’. 그들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공연을 보고 난 후 커튼콜 때 당신은 어떤 배우에게 가장 큰 박수를 보내는가? 주연배우? 아니면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배우?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에서 성형외과 의사 ‘이공학’을 연기한 배우는 바로 후자에 속한다. 그는 이 뮤지컬에서 조연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다. 뚱녀인 주인공 강한별을 S라인의 미녀로 변신시키는 핵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낮에는 의사, 밤에는 음란전화를 즐기는 괴짜인 그는 능청스런 연기로 시종일관 객석을 웃음 바다로 빠트린다.

흥얼거리듯 내뱉는 대사는 신기하게도 귀에 쏙쏙 들어오고 코믹한 연기와 표정, 성악적인 발성으로 부르는 노래 또한 압권이다. 뮤지컬의 웃음 코드는 상당 부분 바로 이공학에게서 비롯된다. 주연들 속에서도 유독 빛나는 이공학은 <미녀는 괴로워>에서 흙 속의 진주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조연이다.

“나 아니면 누가 이 역할을 하지? 제가 연기를 하면서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에서 이공학 역을 맡은 배우 김성기(44) 씨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이한위 씨가 맡은 역할을 ‘김성기표 이공학’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때 이한위 씨가 연기한 역할이라고 해서 사실 좀 부담이 됐었죠. 하지만 내 방식으로 풀어가자고 생각했어요. 곡을 받아보니 다른 배역과 달리 이공학이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아리아’더라고요. 성악적인 발성법으로 노래하는 건 이 뮤지컬에서 저 하나뿐이라 같은 작품 속에서도 난 차별적인 존재구나 싶었죠. 나만의 이공학을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20년이 넘는 배우 생활. 김성기 씨가 담당한 캐릭터는 이공학처럼 대부분 코믹 감초 연기였다. 극 중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 웃음 담당은 늘 그의 몫이었다. ‘코믹 연기의 지존’이란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는 것이 이젠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마이페어레이디>, <제너두>, <맨오브라만차>, <돈키호테>, <첫사랑>, <사랑은 비를 타고> 등에서 그는 섬세하면서 자연스러운 고도의 코믹 연기를 선보이며 ‘한국의 미스터 빈’ 혹은 ‘우리 시대의 찰리 채플린’이라는 별명을 얻어냈다. <벽을 뚫는 남자>에서는 알코올 중독 정신과 의사인 듀블 외에 경찰, 변호사 등 1인 3역을 소화한 적도 있었다. 그는 이 뮤지컬로 ‘제2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남우조연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열연 중인 김성기 씨


■ 성악 전공 음악도, 운명처럼 뮤지컬 입문

김성기 씨는 달변가는 아니다. 어눌한 말솜씨에 비음이 섞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한다. 하지만 열 마디 말보다 그의 한 마디 말이 오히려 더 호소력 있게 들린다. 그런 그가 코믹 연기를 한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저는 일부러 웃기기 위해 연기하진 않아요. 무대 위에서 제가 절실해야 관객이 웃더라고요. 절실해야 우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전 코믹 연기를 할 때도 무척 진지해요. 그 역할에 푹 빠져 있으면, 사람들이 웃더라구요.(웃음) 아프다는 한 마디 말이라도 진짜 아파서 아프다고 해야 아픔이 느껴지거든요.”

그는 온몸으로 연기한다. “아파!”라는 단말마의 비명조차도 정직하게 몸으로 표현한다. 그가 무대에서 진지하게 행동하면 관객 입장에서는 ‘몸 개그’처럼 보여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한양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김성기 씨가 뮤지컬 배우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니, 지금 생각하면 그건 운명일지도 몰랐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 갔다가 <돈키호테> 뮤지컬 포스터를 봤어요. 별거 아닌데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죠. 그래서 당장 뮤지컬을 봤죠. 찌릿찌릿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게 있더라고요. 내 안에서 열정이 꿈틀댄다고 해야 되나? 나도 무대 위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한 거죠.”

그는 학창시절 숫기가 없고 소심한 학생이었다. 노래를 잘 한다는 이유로 소풍 때 억지로 사회를 본 적은 있었다. 워낙 내성적이어서 누가 시키지 않는 한 잘 나서진 않았지만 일단 기회가 오면 자신도 모르는 쇼맨십을 발휘하곤 했다. 쑥스러워 하면서도 무대에 오르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보여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서야 할 곳이 무대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뮤지컬 <돈키호테>는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의 내면에 잠자던 열정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음대를 졸업한 동기들은 이탈리아나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던 터라 동기들처럼 유학 갈 형편이 안됐던 그는 국립합창단에나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뮤지컬을 본 순간 “바로 저거다!” 싶었다. 서울시립뮤지컬단원 오디션을 본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연기와 춤은 배운 적이 없으니까 가창력으로 승부를 걸었죠. 노래로 점수를 많이 받았고 연기는 정확한 발음으로 점수를 땄어요. 그런데 춤이 문제였죠.”

■ 춤 춰본 적도 없이 오디션 합격

발레리노 동작을 따라 하는 것이 춤 오디션이었다. 춤을 춰본 적도 없지만 발레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차례가 되자 진지하게 오디션에 임했다. 주변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 입어보는 발레리노 복장이 좀 어색했던 것뿐이었다. 모르는 게 약이었을까. 그는 발레리노가 꼭 입어야 할 무용수용 속옷 서포트를 입지 않고 타이즈 하나만 착용한 채 오디션을 보았다. “최종 합격자에 남자는 저 하나였어요. 발레를 처음 하는 거라 당연히 타이즈 하나만 입으면 되는 줄 알았죠.(웃음)”

한 달에 28만원 가량의 초봉을 받으며 그는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뮤지컬 배우로서 사회생활의 첫 시작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숙비를 내고 남은 돈으로 주택부금을 부으며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성악도 출신이라 노래는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성악과 뮤지컬 넘버는 달랐다. 그는 가사를 정확한 발음으로 전달하기까지 혼자만의 노력을 해야만 했다. 연기는 독학으로 공부했다. 코러스 생활 7년 동안 선배들의 연기를 어깨 너머로 배워나갔다. 춤은 한국 전통춤 연구가인 강유선 선생에게 직접 배웠다.

하지만 그토록 하고 싶었던 운명의 직업, 배우 생활은 녹록치가 않았다. 오디션을 봐도 그에겐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던 것. 웬만한 배역은 모두 선배들 차지였다. 큰 보람을 찾지 못했던 그는 과감하게 단원생활을 그만두고 귀향을 선택했다.

“1년 반 동안 고향인 경기도 평택에 내려가서 포장마차를 했어요. 고향 친구들과 친누나들이 많이 도와줬죠. 여기서 새 인생을 살까도 생각했지만, 소까지 팔아서 자식을 교육시킨 부모님 생각하니 이대로 포장마차 사장으로 안주할 순 없더라고요.”

행운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포장마차를 접으려 하자, 서울예술단 단원을 특별 채용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집인원은 단 한 명이었다. 배우로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다가온 것 같았다. 그는 그 기회를 꽉 붙드는 데 성공했다.

김 씨는 서울예술단에서 연기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난다. 바로 독일인 연출가 디에트마 렌츠와의 만남 덕분이다. 뮤지컬 <대박>에서 흥부 역할을 맡은 그에게 디에트마 렌츠는 씨앗이 땅속에서 자라나는 모습을 즉흥극으로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연기 수업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그는 즉석에서 자신이 씨앗이라고 생각하며 온몸으로 열연했다.

아스팔트에 깔려 못 나오는 씨앗을 표현하기 위해 옷까지 벗으며 자신을 다 보여줬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연기의 끝 무렵에는 팬티만 입은 채였다. 그는 ‘절실함’을 표현해낸 것이다.

디에트마 렌츠로부터 인정받은 그는 그때 처음으로 연기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배우는 꼭 대사로만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는 걸 처음 알았다. 몸의 언어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관객 반응 살피며 연기 배워나가

“무대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면 객석을 통해서는 연기를 배우죠. 객석의 반응에 따라 오늘 저의 연기 점수를 매기곤 해요. 연기란 모두의 취향에 맞출 수는 없는 것이지만 관객이 없으면 무대 위 배우가 없는 거잖아요. 날 어떻게 볼까, 실망스런 표정을 짓지는 않을까? 표정이나 눈빛 하나에도 배우들은 무척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뜨끔해진다. 무대 위 배우들도 구경꾼인 관객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이만한 반전이 없겠다 싶었다. 객석의 반응까지 살피며 자신의 연기를 반성하고 실험해가는 김성기 씨야말로 프로가 아닐까. 그렇다면 주로 조연배우로 활약해온 그가 생각하는 ‘조연의 매력’은 무얼까.

“조연은 주연에 비해 훨씬 자유롭죠. 주연이 정해진 틀 안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면 조연은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연기에 대한 실험을 할 수가 있어요. 캐릭터를 뛰어넘을 땐 희열을 느낀답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김성기 씨는 아무 욕심이 없어 보이는 캐릭터에 가까웠다. 주연에 대한 욕심은 없냐고 묻자 그는 “저도 욕심이 있어요. 하고 싶은 주연도 많고요”라며 활짝 웃는다.

“<돈키호테>에서는 이미 주연을 했지만 허리 부상을 입어 맘껏 표현하지 못한 게 한이 돼요. 그래서 다시 돈키호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멋지게 해낼 자신이 있어요. 그리고 <벽을 뚫는 남자>의 듀티엘 역이나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테비에 역도 탐이 나요. 제 몸 속엔 고전의 피가 흐르나 봐요. 고전 명작에 관심이 있는 걸 보면요.(웃음)”

김 씨의 새해 바람은 “무대에서 계속 숨쉬며 몸도 같이 건강해지는 것”이다. 다행히도 요즘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기는 중이어서 행복하단다. <미녀는 괴로워> 공연이 끝나면 다음 작품으로 핀란드 소설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소설이 원작인 <기발한 자살 여행>이란 창작뮤지컬에 들어갈 예정이다. 자살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내용인 이 뮤지컬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주연급 조연이라고.

“무대 위에 오르기 전 늘 제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요. ‘대한민국에서 나는 최고의 배우다. 나는 잘하는 중이다’라고요.”

아직도 무대에 서기 전 자기 최면을 걸어가며 멋진 연기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중견배우 김성기 씨.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건 카멜레온처럼 맡은 배역에 따라 자신을 자유롭게 변신시킬 수 있는, 자신조차도 끝이 어딘지 모르겠다는 잠재된 연기변신 능력 때문일 것이다.

꼭 최면을 걸지 않아도, 그가 이미 대한민국 뮤지컬에서 최고의 조연배우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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