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 낮춘 갤러리로 더불어 사는 행복 꿈꿔요"디자인 컨설팅 회사 경영하며 서울 부암동에 초미니 무인 갤러리 운영주민들과 함께 하는 문화명소 부상…미술인들 사이에서도 입소문 자자

문화를 향유하는 안목이 다양해진 요즘 주류문화의 식상함에 반발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그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주류문화보다 비주류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는 추세다. 문화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기엔 이미 둘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하여, 비주류는 이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주류는 아웃사이더나 이단아가 아니라 '비전'이 있고, 예술세계에 '비주얼'이 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미래가 밝은 문화인들이다. 뚜렷한 주관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나가는 '내일을 꿈꾸는 비(飛)주류'. 그들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서울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누리고 싶다면 청와대 뒷길을 올라 청운중학교와 자하문 고개를 지나라고 말하고 싶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지하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파란색 간선버스로 갈아타면 버스는 어느새 당신을 도심의 빌딩숲에서 인적이 드문 지방 소도시로 안내할 것이다. 필자가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갤러리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이하 호기심)을 처음 방문한 날에 받은 인상은 이랬다.

"아마도 1970년대 무렵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어릴 적 살던 동네와 비슷한 정서를 느끼실 거예요. 아련한 향수 때문에 이곳에 정을 붙이시는 분들이 꽤 있답니다.(웃음)"

디자인컨설팅 회사 'LOVE'의 대표이자 '호기심'의 운영자인 이승희(39) 씨가 처음 이곳을 발견한 것은 환기미술관이 문을 연 93년도다. 그때 처음 부암동의 매력을 가슴에 담아두었던 그녀는 두 가지 꿈을 동시에 품었다. 환기미술관처럼 집을 개조해서 만든 멋진 미술관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부암동에 작은 갤러리를 하나 운영하는 것. 그녀는 두 개의 꿈 중 하나는 이룬 셈이다.

이 씨는 서울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나와 미국 뉴욕 프랫대학교(Pratt Institute)에서 커뮤니케이션디자인(Mixed Media)과 사진을 동시에 전공했다. 그 후 미국 스포츠전문 방송국 ESPN과 케이블방송국 HBO, 그리고 명품 브랜드 꾸지 등에서 웹디자이너로 활동했다. 한마디로 잘 나가는 뉴요커였다.

미국에서 웹이 상용화되기 이전부터 웹디자이너로 활동한 그녀는 무려 1,000개가 넘는 디자인을 혼자 도맡아 작업할 정도로 분주한 뉴욕생활을 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매드 아일랜드'란 이름의 웹디자인 회사를 따로 차릴 정도였다고 하니 알 만했다. 그녀가 일하러 직장으로 출근하면 매드 아일랜드 직원들은 하나 둘 그녀의 집이자 사무실로 출근했다. 뉴욕생활이 만족스러웠지만, 모교인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조교수 자리를 제안하면서 그녀는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미국서 잘 나가던 웹디자이너 출신

"뉴욕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또한 모교에 대한 애정도 컸기 때문에 당시 어느 하나를 포기할 순 없었어요. 결국 3년 동안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뉴욕의 사업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지만요."

그 즈음 우연히 부암동을 지나가던 이 씨는 세월이 변해도 90년대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동네 풍경에 다시 한번 놀랐다.

"클럽 에스프레소란 커피집에 앉아 있는데 맞은 편에 무척 독특한 건물이 있더라고요. 주변 분위기가 어떻든 그 건물은 홀로 동떨어진 세계에 따로 존재하는 듯 보였어요. 둥둥 떠다니는 섬이랄까. 마치 부암동의 정서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말이죠. 마침 이발소 양쪽 가게가 비어 있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지요. 저 건물에 갤러리와 카페를 만들어야겠다고."

이 씨는 부암동에 한 눈에 반한 것이다. "호기심이 탄생한 지 5년째인데 이제 '얘'(이 씨는 '호기심'을 하나의 인격체 대하듯 했다)는 제 손을 떠나 독립한 지 꽤 되었답니다. 이 아이의 타고난 '사주팔자'가 그런 것 같아요. 앞으로 혼자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만 남았지요.(웃음)"

2004년 탄생한 '호기심'은 무인 갤러리다. 갤러리에 상주하는 큐레이터나 관리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간판도 없다. '호기심' 자체가 주인이며 관리자처럼 보였다.

대성이용원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엔 12㎡(4평) 남짓한 초미니 갤러리가, 왼쪽엔 사무실 겸용으로 사용하는 미니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갤러리 오프닝이 있을 때 카페는 손님 맞이로 분주하지만, 평일 오후에는 아르바이트생이 꾸벅꾸벅 졸고 있을 정도로 한가롭다.

카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곳의 정체를 궁금해 하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연인용 좌석인 욕조를 보고 욕조 파는 가게일 거라 짐작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 씨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거나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이 충만한 사람일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호기심'의 미니 카페는 잡지에 어느 정도 소개됐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부암동 마니아들에겐 '핫 플레이스'(명소)인 셈이다.

'호기심'은 오전 11시에 문을 열어 밤 12시에 닫는다. 이곳의 주인장인 이 씨가 매일 들르지는 않기 때문에 문지기 역할만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담당한다. 전시장 내부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윈도우 갤러리여서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을 잡기에 충분하다.

초미니 갤러리라고 해서 '호기심'을 얕보았다면 오산이다. 이 작은 갤러리의 위력은 대단하다. 변화무쌍한 계절만큼이나 '호기심'은 연중 다양한 기획 전시회가 끊이질 않는다.

다양한 기획전시로 관객 발길 끊이지 않아

작년 한 해만 해도 큐레이터 5명이 직접 기획한 2인전이 6개월 동안 전시되어 호응이 꽤 큰 편이었다. 현재는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의 <테이크 아웃-Take Out>전이 2월21일까지 두 달 동안 진행 중이기도 하다. 이 씨의 말마따나 주인장인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1년 동안 진행될 전시가 모두 예약이 끝난 상태다.

'호기심'은 튀는 전시가 심심찮게 이뤄지는 갤러리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크고 작은 소음도 있었다. 독립 큐레이터인 류병학 씨가 기획한 <우리는 모두 행복합니다>전 때였다. 고즈넉한 부암동은 탈북 화가 선무 씨와 사진작가 노순택 씨의 작품전이 전시되는 동안 경찰이 매일 출근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전쟁을 경험한 주민이 민원을 넣은 것이다. 갤러리에 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린 것이 화근이었다. '대통령도 북한을 방문하는데 미술 전시회를 가지고 그러느냐'는 쪽과 '김정일 초상화를 걸어둔 것이 잘못'이라는 쪽으로 주민들의 의견이 갈려 '호기심' 도로변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질 정도였다고.

그렇다고 '호기심'이 매번 튀는 전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승희 씨가 직접 기획한 <나의 첫사랑>전은 갤러리의 문턱을 낮추고 관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전시회였다. 특히,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나의 첫사랑>전을 관람하고 소감을 이야기할 때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호기심이 생기고 나서 한번도 빠지지 않고 전시를 구경했다는 50대 주부가 계셨어요. 부암동에 호기심 같은 갤러리가 생겨서 삶의 풍요로움을 느낀다는 이메일을 받고는 눈물이 나더라고요. 작품도 직접 구매하셨지요. 호기심을 저보다 아끼시는 동네 주민들이 하나 둘 생기고 있답니다."

어느날 갑자기 부암동이란 동네에 불시착한 '호기심'. 하지만 처음부터 '호기심'을 바라보는 시선이 호락호락했던 것만은 아니다. 사소한 일로 민원이 자주 들어와 경찰이 출동하는 만만찮은 동네가 부암동이었다. 이방인에 대한 텃세였던 것이다. 이 씨가 갤러리에 상주하지 않고 무인 갤러리로 경영방침을 바꾼 이유도 동네 주민들과 융화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다. 작은 갤러리에 사람까지 앉아 있으니 기웃거리다 돌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애초 갤러리 문턱을 낮추자는 생각으로 시작했기에 무인 갤러리 경영은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자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바쁜 출근 시간에도 윈도우를 통해 그림 구경을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퇴근 후 여유 있게 관람하거나 심지어 저녁 식사 후 가족끼리 산책하며 '호기심'을 방문하는 관객도 늘었다. '호기심'은 어느새 동네 주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미술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갤러리 문화를 부암동에 도입해 거리 풍경을 바꾼 첫 번째 주자 이승희 씨가 처음 '호기심'을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개인전을 하고 싶어서 삼청동에 위치한 갤러리에 들러 대관 문의를 했어요. 헌데, 우리나라 갤러리들이 어찌나 권위적이던지요. 작은 갤러리의 대관료가 비싼 건 둘째 치고, 상주한 큐레이터의 위엄에 기가 눌려 그냥 나와버렸어요."

권위적 갤러리 문화 바꿔보자는 시도

처음엔 '차라리 내가 갤러리를 만들어 전시회를 열자'는 오기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 자신처럼 전시회를 하고 싶어도 턱없이 비싼 대관료 등의 이유로 기회를 잡지 못한 아티스트가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갤러리의 권위를 없애고 실력은 있지만 대관할 여건이 안 되는 아티스트에게 전시 공간을 내어주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관객이 주인이 되어 즐겁게 관람할 수 있는 쉼터 같은 갤러리로 만들 요량이었다.

4평 남짓한 초미니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소위 '뜬' 작가들이 몇몇 배출되자 미술인들 사이에서 '호기심'은 그 자체가 호기심의 대상이 됐다. 현재 '호기심'은 이 씨의 바람대로 전시를 하길 원하는 신진작가와 기성작가들이 줄을 설 만큼 제대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씨가 '호기심'을 운영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호기심'의 한 달 유지비는 임대료까지 포함해 300만~400만 원 정도가 든다. 청담동에서 디자인 컨설팅 회사 'LOVE'를 운영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 회사다. 이 씨는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한국 기업과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디자인 컨설팅을 해준다. 거기서 나온 수익으로 '호기심'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 감각을 타고난 그녀가 부암동에서 봉사활동을 하듯 갤러리와 카페를 운영한다고 하자 청담동 회사 직원들은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처음엔 오해도 많이 받았다. 소위 재벌처럼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것도, 아티스트를 육성할 만큼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호기심' 운영이 한 개인의 허영심이나 사치에서 비롯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제가 호기심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함께 나누는 거예요. 저 또한 힘들게 공부하고 배우면서 정말 따뜻하고 좋은 분들에게 많은 걸 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나누는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 씨는 대학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비를 벌었고,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던 한마디로 똑 부러지는 학생이었다. 유학도 직장생활을 하며 마련한 사비를 털어 다녀온 그녀다. 입학을 6개월 앞두고, 일본 배낭 여행을 갔다가 '매킨토시 사용자 급구'란 구인광고를 보고 임기응변을 발휘해 <신동경>이란 무가지 창간 멤버로 5개월 동안 일한 사연은 그녀가 얼마나 명민하고 생활력이 강한 학생이었는지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뉴욕에서도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일은 미주 한국일보에 들어갈 뉴욕타임즈 기사를 번역했던 일이라고.

디자인 컨설팅 회사 대표로 한 달에 두세 차례는 해외를 오가며 글로벌하게 사는 이승희 씨와 경복궁 지하철역에서부터 하이힐을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부암동 고개를 오르는 '호기심' 대표 이승희 씨는 다른 사람 같았다.

"호기심 운영을 좀 유연하게 하고 싶어요. '큐레이터 공모전'이나 '어린 작가 공모전'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니 갤러리에서 꿈을 이루길 바라는 거죠."

아직 '호기심'의 뚜껑을 제대로 열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승희 씨. 좀 더 열정적인 프로젝트로 올해는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을 제대로 '책임'지겠다는 그녀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자신의 꿈을 타인과 나눌 줄 아는 따뜻함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함께 나누며 행복을 실천하는 이승희 씨야말로 이 시대에 빛나는 진정한 커리어우먼이다.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