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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헉슬리 "규율을 깨뜨리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
[한국초대석] 영국 추상미술 대표 작가 폴 헉슬리
화면 이분할 스타일로 왕립미술아카데미 교수까지 올라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
사진 임재범 기자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것은 규율을 깨뜨리는 것이죠! All we have to do is breaking rules!"

지난 4일 강남구 논현동 워터게이트 갤러리에서 만난 영국의 거장 폴 헉슬리(71)가 힘주어 한 말이다. 그가 40년 이상 유지해 온 화면 이분할 스타일도 그런 사명의 산물이다. 그가 미술학도였을 때, 교수들은 화면을 나누지 말도록 가르쳤다. 균형이 깨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폴 헉슬리는 스승을 거역한 스타일로 유명한 추상화가가 되었다. 심지어 그 자신이 영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왕립미술아카데미 교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예술세계는 하나의 본이 되었다.

그의 대표작인 'Anima, Animus'(1998) 'Mutantis Mutandis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한다'(1999) 'Proteus'(2001) 시리즈는 곡선으로 구성된 왼편과 사각 면이 배치된 오른편이 나란한 형식이다. 서로 다른 리듬이 동시에 펼쳐진다. 이 '낯설게 하기' 스타일은 역설적으로 보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동기이기도 하다.

"화면이 분할 되어 있으면 보는 사람은 의문하게 된다. 왜 나누어져 있을까? 양편이 닮았나, 다른가? 양편이 왜 함께 있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작품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폴 헉슬리의 작업은 고대 그리스 철학 사상에 뿌리를 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세상이 정신과 물질, 두 독립된 원리로 구분된다는 이원론과 그 원리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이상을 지향한다는 일원론을 구현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폴 헉슬리의 삶 자체의 프레임인지도 모른다. 수줍은 성격의 그가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 것은 생계 때문이었다. 이후 그의 삶은 둘로 분리되었다.

학생들 앞에서 실컷 말을 하고 돌아오면 작업실에 틀어박혀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선생으로서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지만 작가로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십 년 동안 두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화두였다. 그러다 보니 가치관까지 바뀌었다.

"예전에는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작가가 교수나 미술 관련 행정직을 겸하면 안 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루벤스도 유명한 작가인 동시에 외교관이지 않았나."

왕립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그는 왕립미술아카데미의 귀중품 출납관직, 대영제국예술위원회 자문위원, 테이트 갤러리 이사 등의 다양한 직함을 가로지르며 영국의 미술계를 이끌어 왔다.

한국에서 처음 전시를 여는 그는 고정된 틀(세계)을 깨뜨리며 독창성을 창조해가는 것이 작가에게 중요하다고 했다.


추상회화 작업을 주로 하는 이유는?

추상은 무엇도 재현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순수한 결정체다.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계 안 태엽의 부속품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추상의 내부에도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내 관심은 그것을 펼치는(unfold) 것이다. 회화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낸다. 그것은 철학, 역사, 엔터테인먼트가 다 응축된 표면이다. '사고의 총체whole world of idea'라고나 할까.

작업 과정은 어떤가

수십 년간 예술 활동을 하면서 나름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처음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캔버스에 바로 작업을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손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더라.

그래서 이제는 작은 드로잉을 최대한 많이 그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다 가장 완벽한 꼴이 나오면 그것을 8절 도화지에 옮긴다. 이때는 종이를 잘라 콜라주처럼 붙여 보는 등 모양이 구성되고 변화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테스트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캔버스에 옮길 때는 사이즈나 비율 같은 수치가 이미 머리 속에 다 들어 있다. 이 시스템은 나에게 매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것의 위험성을 인식한다. 그 과정에 갇힐까봐 가끔은 아예 절차를 뒤바꿔버리기도 한다.

예술가는 어떤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했는데, 교수로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쳤나?

지금 훌륭하고 유명한 작가들이야말로 나와 가장 많이 싸웠던 학생들이다.(웃음)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규율을 만들어야 한다.

현대 미술은 분야가 다양하고 경계가 없기 때문에 작가들은 각자 자신의 출발점을 정하고 규율을 따르되 어느 순간 다시 그것을 깨뜨리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물론 젊은 작가일수록 독창성이 중요하다. 그 점을 북돋는 데 교육의 초점을 두었다.

제자 작가들과 갈등을 겪은 일화가 있다면?

크리스 오필리가 너무 취해서 구내 식당 벽을 온통 그림으로 채운 적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항의해서, 그에게 자신의 그림을 지우는 벌을 주었다. 지금 이렇게 유명해질 줄 알았으면 놔둘 걸 그랬다.

트레이시 에민도 문제아(big problem)였다. 그림은 안 그리고 스튜디오에 찻잔이며 테이블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그림을 그리라"고 야단했다. 그녀가 설치 미술로 나아갈 줄 몰랐던 거다.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있나

백남준을 좋아한다. 모든 예술의 근본은 변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텔레비전 세트, 모니터 같은 일반적으로 예술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물질을 변형해 예술로 승화시키는 점이 좋다. 백남준 작가가 대표하는 한국 미술의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경향은 유럽 미술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폴 헉슬리는…

영국 최고의 미술 학교인 해로우 미술학교(Harrow School of Art)와 왕립아카데미 (Royal College of Art)를 거친 영국 전통 추상 모더니즘의 계보를 잇는 작가.

초년 시절 신세대 추상작가로써 조명 받으면서 미국으로 건너간 후, 추상 표현작업들에 확고한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추상 작업은 유럽 정통 모더니즘을 계승하는 한편,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적인 요소를 포함, 새로운 추상세계를 열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중에도 왕립아카데미(Royal College of Art)의 교수로서 제자들의 양성에도 힘썼다. 그 중 yBa(Young British Artist) 멤버-Dinos Chapman(디노스 챕멘), Tracey Emin(트레이시 에민), Chris Ofili(크리스 오필리) 등은 현대 미술계의 영향력 있는 작가들이다.

테이트 미술관, 서펜타인 갤러리 등 세계적인 미술관의 고문을 거쳐 현재는 권위적인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회원이자 왕립아카데미의 귀중품 출납관으로서 영국 왕실의 신임과 영국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그는 작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폴 헉슬리(Paul Huxley) 개인전

폴 헉슬리의 예술세계를 4월7일까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워터게이트 겔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 10년간의 행보를 대표하는 15점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한국에서는 처음 전시되는 것으로 '폴 헉슬리 아시아 투어 전시회'의 일환이다. 6월에는 중국에서 열린다. 전시 작품 중에는 2008년 '중국 시리즈 China Series'도 포함되어 있다.

폴 헉슬리가 2004년 중국을 방문한 후 한자를 모티프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당시 거리의 벽에 붉은 색으로 그려진 한자 슬로건들을 보고 역사, 사회적 맥락에 의해 언어가 규정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고 밝혔다.

이 작품들 속에서 한자는 중국 사회의 상징이다. 한자의 조형적 요소가 폴 헉슬리의 유럽적 모더니즘과 만난 양상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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