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물방울 화가 김창열물방울 6.25전쟁 상흔서 출발… 60년대 앵포르멜 작품 다시 그리고 싶어

1-김창열 화백은 인터뷰에서 작품 속 물방울의 다양한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2-'물방울'
3-부산 동백섬으로 가는길에 해운대에서 포즈를 취한 김창열 화백.
4-김창열 화백의 1993년 작품 'SH930001'

'물방울' 작가 김창열(80) 화백이 한국을 찾았다. 프랑스에서 3개월여만이다.

개인적인 일정과 미술계 행사에 의미와 무게를 더하기 위함이다.

18일, 김 화백은 부산에서 열리는 화랑미술제에 참석하기 위해 다른 작가들과 함께 부산행 KTX에 올랐다. 그의 곁에는 인생의 반려자인 마르틴느 질롱이 함께 했다.

김 화백은 줄곧 책을 보거나 명상에 잠긴듯 조용한 자세를 유지했다. 동료인 박서보(78) 화백이 농(弄)을 던지면 가볍게 받아주는 정도였다. 바로 옆자리여서 인사를 드리니 어려웠던 시절 한국일보가 도와주었다는 전시를 떠올리며 반가움을 나타냈다.

그런 김 화백이 화랑미술제 행사장에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전시장을 꼼꼼히 둘러보고 까마득한 후배 작가들을 격려하는가 하면 그를 알아보는 관객들과도 담소를 나누었다.

전시장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룬 가운데 김 화백의 작품은 현대 갤러리를 비롯, 표화랑, 갤러리포커스, 다도화랑 등 여러 화랑 부스에 비중있게 걸렸다..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김 화백은 3여년의 물방울그림에 배 시간의 단층을 회고하듯 한참동안 바라보곤 했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선 변화, 유행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능력을 평가하면서도 '기(技)'보다는 '본(本)'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했다.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세계 미술의 중심인 미국과 유럽에서 작업을 해온 김 화백이 일부 후배 작가들의 작품에서 묻어나는 가벼움을 지적한 것이다.

김 화백은 서울대 미대를 나와 박서보, 정창섭 등과 한국의 앵포르멜 미술(art informel, 무정형미술) 운동을 이끌었고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 196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출품하며 국제무대에 대한 꿈을 키웠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1968년까지 미국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에서 수학하면서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 화백이 미국에 있던 1960년대 말 세계 미술사에서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과 팝아트(pop art)의 위력은 대단했다. 액션페인팅이 나올 무렵 파리에서는 앵포르멜 미술이 유행했고 미국에 팝아트가 그 기선을 잡을 무렵 파리에는 누보레알리즘(nouveau realisme)이 성행했다.

현대 작가들은 이러한 흐름의 세례를 받았고 팝아트, 앵포르멜, 액션페인팅, 누보레알리즘의 유산은 현재도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작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김 화백은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거기서 그는 조각가 문신의 마굿간 화실을 한동안 함께 쓰며 가난한 예술가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김 화백은 1972년 파리의 권위있는 초대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서 물방울 그림인 'Event of Night'으로 본격적으로 데뷔한 이후 현재까지 물방울을 소재로 전 세계에서 활발한 전시를 하고 있다.

김 화백과 화랑미술제 전시를 둘러보면서 '물방울'이 더욱 궁금했다. 왜(어떻게) 물방울과 30여 년을 함께 했을까? 물방울은 어떤 의미인가? 밤 9시가 되서야 김 화백이 묵기로 한 해운대 근처 호텔에서 약간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물방울은 김 화백의 젊은시절 '상흔(傷痕)'에서 출발한다. "내가 만 스무살일 때 6.25 사변이 일어났는데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어요. 그 상흔이 내 생에 큰 영향을 주었죠. 처음부터 물방울을 그린 것은 아니에요."

김 화백은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고 그렸다고 한다. 그 상흔은 미국에서는 공이나 구체(球體)로 대체됐고, 4년 후 파리에서는 녹아내려 점액질로 변했다. "그때 점액물질이 답답해 보여 투명한 물이 되면 어떨까 하고 캔버스를 뒤집어 물을 뿌렸는데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햇빛에 비쳐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 온 몸을 떨게 한 것이 여태까지 오게 됐지."

물방울의 의미, 상징도 궁금했다. "나의 존재성이라고 할까, 서양과 다르고 남들과도 다른 나만의 것….""불교의 공(空)이나 도교의 무(無)와도 통해요. 모든 물체가 존재했다 사라지는…자연의 섭리라고도 할 수 있죠."

김 화백이 말 수가 적다고 들었는데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해선 예외처럼 보였다. 거칠 것이 없고 나이가 무색할 만큼 논리적이다.

김 화백의 물방울은 1980년대 들어 변화한다.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려 표면이라는 물체의 즉물성(卽物性)을 살리는 반면, 표면에 맺힐 수 없는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바탕과 이질감을 형성하여 물방울이 가진 물질성을 상실케 한다. 물질성이 사라진 자리는 순수한 영혼과 정신이 채워진다.

1980년대 후반에는 바탕에 천자문을 그려넣어 또 다른 물방울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 유명한 '회귀(Recurrence)' 연작이 대표적이다. 김 화백은 물방울 바탕에 한글이 아닌 한자를 넣은 것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어려서 한글보다 한자를 먼저 접하다보니 친숙하게 됐어요. 또 한자는 조형적으로 깊은 울림이 있는 문자이고 전후 좌우 동일하고 퍼져나갈 수 있는 개념을 갖고 있어요."

특히 천자문(千字文)을 바탕에 사용한 것에 대해 김 화백은 "한자 자체로서 완결성을 갖고 있고 중복된 글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30여 년 물방울 작업을 하면서 시대별로 변화가 보인다고 하자 "물방울은 변해도 개념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변화가 있다면 물방울이 갖고 있는 의미가 다양해졌지요. 어떤 사람은 선(禪)적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새로운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말이죠."

김창열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 1세대 화가로 박서보, 이우환, 문신 등과 함께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했고, 특히 백남준과 친했다. 백남준에 대해 물으니 "백남준은 천재에요. 천재인척 하는데도 천재였지"하며 웃음을 지었다

김 화백에게 화가로서 (예술)철학을 물으니 도덕경(道德經)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법(法)'이 있어도 안되고 '법'이 없어도 안되고 '법'에 그르쳐서는 더욱 안된다. 법도를 지킨 뒤 변화를 다하고 '유법(有法)'의 극치에 이르러 '무법(無法)'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가야한다고 했는데 진정한 예술인이 되려면 교양을 쌓고 세상 견물을 넓히라는 뜻이지."

후학들이 귀담아 들을 조언을 청했지만 김 화백은 극구 사양했다. 주제넘은 일이고 지나친 관여이고 굉장히 무모한 일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서 백남준이 말한 "그림은 장난"이라는 얘기를 곁들였다.

동양사상과 역사에 심오한 깊이를 가진 백남준이 그렇게 말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림은 장난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게 김 화백의 해석이다. 아울러 디지털시대에 변화, 유행을 따르기보다 아날로그적인 '땀'을 흘리는 작업을 해주기를 후배 작가들에 기대했다.

김 화백은 2004년 백남준과 함께 프랑스 국립 주드폼 미술관에서 물방울 예술 30년을 결산하는 전시를 했다. 세계적 미술대가만을 선별해 전시하는 곳에 출품되는 것 자체가 작가에겐 영예의 훈장이다.

김 화백은 1년 중 3분의 1은 한국에서, 나머지 3분의 1은 각각 프랑스 파리와 남프랑스에서 지낸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25일부터 서울 이태원 표화랑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앞으로의 작업에 대해 물으니 "미완성의 초기 60년대 앵포르멜 작품을 다시 그려보고 싶다"고 말한다. 1990년대 '회귀' 연작과는 또 다른 회귀처럼 들렸다. 순간 무정형(앵포르멜)의 완성이라는 물방울의 수많은 메타포가 스쳐갔다.

표화랑 '김창열 개인전'

김창열 화백은 표화랑(대표 표미선)과의 인연으로 2005년 중국국가박물관 초대전, 2006년 베이징 개인전, 2008년 표화랑 LA 개관 기념전을 가졌다. 오는 3월 25일부터 4월 29일까지 서울 이태원에서 열리는 '김창열 개인전'에선 2007년 신작까지 다양한 물방울 작품들이 선보인다.

김창열은…

1929년 평북 신의주 출생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수학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미협'현대전'에 참여했고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해 한국의 급진적인 앵포르멜 미술운동을 이끌었다.

1966년 뉴욕으로 건너가 아트 스튜던트리그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제2회 파리 비엔날레(1961)를 시작으로 상파울루 비엔날레(1965), 프랑스 국립 주드폼미술관(2004), 중국국가박물관 초대전(2005) 등 전세계에서 150여 차례의 전시 및 개인전을 열었다. 사실과 추상 경계선상에 있는 물방울을 화두로 30여 년 간 작업해 오고 있다.




부산=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