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홍식SF & 판타지 도서관 관장지하 창고 개조 중학교 때부터 모은 공상과학·판타지소설·만화 등 8000여 권 진열

"장르문화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 다양한 장르가 공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4일 서울 사당동의 한 단독주택 지하에 동호인들과 함께 'SF & 판타지 도서관'의 문을 연 전홍식(34) 관장의 말이다. 전 관장은 중학교때부터 모아온 공상과학ㆍ판타지 소설 및 만화에 '황금가지', '시공사', '행복한 책읽기' 등에서 기증 받은 책을 더해 8000여권의 장서를 80㎡의 공간에 모았다.

온라인 게임 회사의 시나리오 작가인 전 관장을 비롯한 도서관 운영진은 모두 직장인, 대학생 등 자기 직업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손수 지하창고를 개조해 도서관을 정비했으며 평일에는 퇴근 후에 돌아가며 도서관 운영을 한다. 도서관 개관 시간이 평일 오후 4시~10시, 일요일 오후 1시~10시인 이유다.

19일 오후 9시께 서울 사당동 'SF & 판타지 도서관'에서 전 관장을 만났다. 전 관장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알이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으며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 크게 웃는 편이다. 게임아카데미에서 강연을 할 정도의 달변인 그와의 대화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전 관장은 "SFㆍ판타지는 허황되거나 현실도피 성향의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라는 선입견과 다르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닐스의 모험', 도리스 래싱의 작품처럼 완성도가 높은 것도 많다"며 "사람들에게 질 높은 SF 작품을 소개해 한 문학장르로 자리잡게 하고 자유로운 상상을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요약했다.

"공상과학이라고? 상상과학이다!"

"공상과학이 아니라 상상과학이다."

전 관장은 SF, 판타지 장르에 관한 선입견과 반대되는 소신을 품고 있다. 판타지나 SF장르를 대여소 만화나 무협지 등에 나온 상업성에 기반한 질 낮은 작품 정도로 보는 인식을 바꿔주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달나라 여행'에서 인간이 달에 가는 상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줄 베른이 없었다면 우주여행은 실현되기 어려웠지도 모른다. 역시 줄베른의 작품인 '해저 2만리'의 상상은 잠수함으로 실현됐다.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노틸러스는 세계 최초의 핵잠수함 이름이 됐다.

"구체적이고 치밀한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좋은 SF"라는 게 전 관장의 이해다. 실제로 '달나라 여행'은 우주를 향해 발사하는 대포의 무게, 포탄의 충격을 막는 방법, 산소가 없는 우주에서 생활하기 위해 산소를 만드는 방법, 주인공이 데려간 두 마리의 개중 한 마리가 발사 당시의 충격으로 죽자 이를 우주로 내버리기 위해 고민하는 장면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판타지의 백미는 허구가 아닌 설득력"

"완전히 허황된 것이라고만 보이는 판타지라도 그 안에 철학이 있다면 가치가 있다"는 게 전 관장의 설명이다. 나오미 노빅의 '테메레르'는 용과 기사가 등장하는 판타지다.

주인공들은 다른 세계에 이주한 인류의 후예다. 그러나 저 우주너머 어디에선가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설정을 이해하면 설득력 있게 읽힌다. 사람의 생각과 시야의 한계를 설득력 있는 설정으로 지구와 인류에서 우주로까지 넓혀줄 수 있는 것이다.

판타지의 고전격인 '이카루스' 신화에서 표현된 하늘을 향해 날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하늘을 나는 상상의 기원을 제공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고대 인도인들은 이 세상은 끝없는 바다로 있다고 상상했다. 그 바다 위에는 거대한 물뱀이 헤엄을 치고 있었으며, 그 물뱀위에 역시 거대한 거북이가 타고 있고, 그 거북이의 등 위에는 4마리의 코끼리가 동서남북에서 4각진 땅을 받치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인도인들의 '판타지'는 이후에 '걸리버 여행기'로 계승됐다. 후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한다.

"판타지와 SF로 장르문학 다양성 펼칠 것"

전 관장은 어렵게 발을 뗀 'SF&판타지 도서관'을 통해 우리나라에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장르문화의 꽃을 피우는 노력을 계속할 생각이다.

그는 지금도 매달 100만원의 사비를 들여 도서관 임대료와 운영비를 쓰고 있다. 도서관을 준비하며 포기할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그때마다 'SF&판타지 도서관' 운영진을 중심으로 한 '조이SF(www.joysf.com)'의 동호인들과 가족의 도움, 응원이 힘이됐다.

그는 "우리나라의 SF 독자층은 3000~5000명 수준의 소수라 SF책이 출간돼도 2~3년, 길어봐야 5년내에 절판돼 책을 구하기 힘들다"며 "한 시의 공공도서관의 SF코너에 있는 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양의 책을 모아뒀으니 이를 좋아하는 팬들이 실컷 즐기도록 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미권, 일본권에만 좋은 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로 좋은 문학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며 "우리보다 100배는 도서관이 많은 일본에서 책을 사는 독자들이 더 많다"고 말했다. 장르의 다양성과 도서관의 확대는 많을수록 문화저변에 보탬이 된다는 말이다.

전 관장은 SF나 판타지를 무협지나 대본소의 상업문화 장르로만 이해하는 시선을 재고하기 위해 만화책 숫자는 1000권으로 제한하고 있다. 도서관은 테츠카 오사무의 '아톰'시리즈 전권, '화성연대기' 등의 SF소설 희귀본과 원서, 폐간된 국내 SF잡지 등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회원제로 도서관을 운영할 계획이며 SF, 판타지 영화상영회, 소식지 발간 등을 계획하고 있다.

전 관장은 "장서수를 늘려 도서관에 걸맞는 규모와 시설을 갖추는 것이 중장기 목표"라며 "개인소장품을 공유하면서 폭넓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생기고 국내 문화창작에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