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CEO]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국립중앙박물관에 유물 200점 쾌척·기증문화 활성화 나서화장박물관·미술관 등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씨'는 문화 경영의 결정체

(사진 밑에 좌측) 국립중앙박물관(최광식 관장)에 화장 유물을 기증하는 유상옥 회장(오른쪽)

3월 30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에서는 한국 박물관 100주년을 맞아 문화유산을 기증한 사람들을 기리는 ‘명예의 전당’ 현판식과 함께 ‘기증기부자의 밤’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 유상옥(76)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은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추진한 기증 문화사업에 개인 소장품 기증인 1호로 참여한데다 유 회장이 기증한 화장문화 유물 특별전이 큰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가 기증한 유물은 국보급 청자분합 등 200여 점. 30여년 전부터 손수 수집해 애지중지 간직해 온 보물들이다. 그 중에는 한 점당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명품들도 적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 행사가 끝나고 10여일 지나 유 회장의 집무실이 있는 강남구 신사동 스페이스 씨(space*c)에서 그를 만났다. 자연스럽게 유물 기증 얘기부터 나왔다.

“사실 아까운 생각이 있었죠. 유물들을 박물관에 넘기기 전날까지 이런저런 고민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왕 기증할 거면 최고로 좋은 것으로 하자. 중앙박물관에 전시되면 여기 두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다고 봤죠. 기업가도 공인(公人)인데, 공인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증 유물의 면모가 궁금했다. 특별히 소중하게 아껴온 것들도 있을 터이고.

“고려시대 청자 모란무늬 합이나 조선시대 백자 문자무늬 분항아리는 나도 하나밖에 없고 값은 또…,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민족의 화장문화를 보여주는 유물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없을 것 같은 것들을 골라서 내놨어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을 운영하는 데 굳이 기증한 이유를 물었다. “내 수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주 감상하기를 바랬어요. 또 문화재는 개인이 갖고 있어도 이미 공공의 것으로 기증문화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한 측면이 있습니다.”

유 회장의 수집 이력은 각별하다. 그가 평생 간직해 온 유물을 내놓은 용기와 결단은 그 이력에 근거한다.

유 회장의 ‘수집’은 1970년대 초, “감성을 키우려면 그림을 보라”는 선배의 권고를 따라 화랑과 인사동을 드나들면서 시작됐다. 그러기까지 그는 스스로 ‘감성’이 필요할 만큼 인생이 팍팍했다.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교 시절 신문보급소장을 하면서 학비를 조달했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된 일을 하다보니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했다. 대학 1년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의 가장 역할을 도맡아야 했으며, 대학 졸업 후인 1959년 동아제약 공채 1기로 입사했다.

감성을 키우기 위해 취미로 시작한 수집은 처음에는 약 저울 등 제약회사에 걸맞은 것을 모았으나 1977년 라미화장품 사장으로 옮기면서 여성용품을 수집했다. 500원짜리 참빗 하나로 시작한 수집은 해외출장 때 외국 화장품 회사의 박물관,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본격화했다.

“1980년 독일 미용그룹 웰라사와 기술제휴를 하러 갔다가 웰라 박물관을 구경하게 됐는데 세계 각국의 수집품과 일본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지만 한국 것은 한 점도 없었어요. 만감이 교차했어요.”

이듬해 내한한 웰라 사장에게 그는 인사동을 뒤져 여성이 화장할 때 쓰던 참한 경대 하나를 선물했다. 다시 찾은 웰라 박물관 전시실엔 그 경대가 ‘코리아(KOREA)’ 명패를 달고 전시돼 있었다.

“그 후에도 미국의 에스티로더, 일본의 포라, 시세이도, 프랑스의 이브로쉐 등의 박물관,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세계적 기업을 만들려면 박물관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로 인해 기업의 네임 밸류가 올라가고 신뢰성도 있어 보이죠.”

박물관 설립의 꿈이 커지면서 유 회장은 화장 유물뿐만 아니라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작품을 수집했다. 그가 라미 화장품을 맡은 후 고속 성장을 한 것도 수집에 뒷받침이 됐다. 만년 적자에다 한해 매출이 고작 20억원에 불과했던 이 회사는 5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고 매출액 500억원대의 공개법인으로 상장까지 하였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는 1987년 라미 화장품에서 동아제약 계열사인 동아유리로 밀려났다. 55세의 나이에 샐러리맨으로 남느냐, 새로운 도전을 하느냐는 기로에 선 것이다. 유 회장은 결국 ‘도전’을 택했다. 1988년 자본금 1억원으로 코리아나 화장품을 창업했다. 그리고 불과 5년 만에 매출액 1000억 원을 돌파하며 업계 3위로까지 급성장했다. 유 회장은 화장품업계의 신화로 통하면서 199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이어 대한화장품협회 회장(2004년), 한국 CEO포럼 공동대표(2003년~2005년), 한국박물관회 회장(2004년~2005년) 등을 역임했다.

코리아나의 성장과 함께 유 회장이 수집한 유물이 계속 늘어남에 따라 ‘박물관 꿈’도 여물어갔다. 2003년에 개관한 ‘스페이스 씨(space*c)’는 유 회장이 강조해 온 ‘문화경영’의 결정체다.

1999년부터 설립 논의를 거쳐, 2002년 3월 착공해 이듬해 11월에 완공된 스페이스 씨는 유 회장이 30여년 동안 모은 5,500여 점의 전통 화장유물을 전시하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과 '코리아나 미술관', 국내 최초의 뮤지엄 까페 ‘카페 스페이스C’, 옥상에 위치한 하늘 정원 ‘c garden’등으로 구성된 복합 문화공간이다.

“스페이스 씨는 온고이지신(溫故以知新)의 뜻을 모아 예술의 가치창조를 이루기 위해 설립했어요. 전통의 현대적 의미를 찾고 시대적 감성과 사유를 작품으로 재해석하는 다양한 전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유 회장은 스페이스 씨에 코리아나와 자신의 꿈도 담겨 있다고 했다. “스페이스 씨를 지을 때‘Art Through Nature’라는 코리아나의 경영이념을 담으려고 했어요. 이것을 건축가 정기용 씨가 박물관, 미술관 등 건물에 잘 끌어들였죠.”

코리아나의 ‘Art through nature’이념은 자연친화적인 화장품으로 개발돼 창업 초기 이브로쉐의 식물성 화장품은 회사 성장의 밑거름이 됐고 근래 녹두의 효능(특허)을 활용한 신제품은 커다란 매출이익을 가져왔다. ’

“화장품은 자연산물을 원료로 하고 과학기술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예술입니다. 그 효용가치를 높이고 소비자에게 지속적인 만족을 주는 것은 경영의 몫이죠.”

신개념 문화공간으로 출발한 스페이스 씨는 국내외에서 문화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국내 최대의 화장박물관은 화장용구와 장신구 등 각종 여성 생활용품과 도자기, 의복 등 5500여 점의 유물을 보유해 5층에서는 상설전을, 6층에서는 전시물을 달리하는 순회전을 연다. 전통 생활문화, 화장문화를 모든 국민과 함께 향유할 수 있어 한국의 화장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있다

또한 해외전시를 통해 한국문화의 진수를 전하고 있는데 2006년 한ㆍ불수교 120주년행사 때 파리에서 전시회를 가져 현지인들의 갈채를 받았다. 최근엔 중국의 명문 칭화대(淸華大,베이징)에서 ‘한국의 화장문화’전을 개최, 한국의 화장유물이 중국에 처음 선보이기도 했다.

“파리 사람들은 처음 대하는 화장 유물을 아주 진지하게 봤어요. 문화원장을 지낸 분은 파리문화원 개관 25년 이래 관객이 가장 많았다고 좋아했습니다. 칭화대 전시 때는 중국에도 드문 한국 고유의 유물이라며 학술지에 게재되는 등 그곳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였어요.“

유 회장은 화장박물관에 대단한 자부심을 보이면서도 국내의 소홀함에는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코리아나 미술관은 신생 미술관이지만 개성적인 전시로 벌써 주목을 끌고 있다. 개관전을 유 회장이 소장하고 있는 백남준 작품을 중심으로 젊고 역량있는 영상작가 5인이 참여하는 기획전으로 연 데 이어 코리아나에 걸맞게 우리의 근ㆍ현대 미인도를 한 자리에 모은 ‘자인(姿人)’전을 개최했다. 2006년 5월의 ‘이미지 극장’전은 현대미술과 연극의 관계를 조명해보는 새로운 경향의 전시로 폭발적 호응과 함께 그 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한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하였다.

“미술관은 1년에 5번 정도 전시를 하는데 소장전, 초대전,기획전을 기본으로 해요. 유명 작가보다는 실력이 있음에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작가, 가능성 있는 신진작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심향 박승무, 금추 이남호, 지홍 박봉수, 박영선 화가 등이다.

그에게 앞으로 박물관과 미술관 운영에 대해 물었다.

“전시 계획과 운영을 잘해서 시민들의 문화의식을 높이는 데 직간접으로 공헌하고자 합니다. 지속적으로 좋은 전시를 하고 작가를 양성하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온고이지신의 장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전반적으로 경제가 어렵다. 코리아나의 문화 투자를 슬쩍 떠보았다. “광고비는 줄여도 문화행사는 계속 할 겁니다. 격조 높은 문화행사는 광고 이상의 의미와 효과도 있다고 봅니다.”

유 회장은 앞으로도 컬렉션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코리아나의 아이덴디티에 부합하고, 여성과 관련된 유물을 수집한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단 지난날처럼 열정에 끌려 중복해 수집하는 경우는 피하고 구색을 갖추는 컬렉션에 집중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기증ㆍ기부 문화’에 동참해줄 것을 기대했다.

“오늘날 문화의 세기에 진정한 선진국의 기준은 경제적 풍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고 보존하여 새로운 문화 창조에 나서느냐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부터 가져야 합니다. 문화 보고인 박물관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주, 많이 갔으면 좋겠어요.”

스페이스 씨 5층 화장박물관 입구에는 문화전도사다운 유 회장의 글귀가 뚜렷하다.

<이제 이 유물들을 여기에 내놓아, 오랜 세월 유물 한 점 한 점에 녹아있는 가치와 의미를 모든 이와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내가 수집해 온 유물들은 ' 나의 것 '에서, 이제 ' 우리의 것 '으로 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공간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이 오랜 세월을 넘나드는 시간 여행을 통해 우리 문화의 가치를 느끼며 옛 여인들과 소담스런 대화를 나누기 바란다. 그 대화의 장을 마련한 일이 내 30년 유물 수집의 가장 큰 보람이다>

유상옥 회장은…


1933년 충남 청양에서 출생해 덕수상고,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동아제약 공채로 입사해 상무이사, 라미화장품 사장을 역임했으며, 1988년 코리아나 화장품을 창업했다.

동아제약 재직 시절 공인회계사 자격을 취득하고, 모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아 강단에 섰다. 그 후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아 고려대, 이화여대, 중앙대 겸임교수를 했다.

2003년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미술관을 갖춘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씨'를 건립했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4회 연임으로 대한화장품공업협회 회장을 맡아 화장품법을 제정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1998년 화장품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한국박물관회 회장(2004년~2005년)을 맡아 기부ㆍ기증 운동에 앞장섰다. 부인과 2남 1녀.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