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팡테리블] (16) 발레리나 한서혜한예종 졸업 후 유니버설발레단 입단… 반 년도 안돼 주역 신고식

발레리나들이 가장 해보고 싶은 역할은 무엇일까.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그래도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와 오딜, ‘지젤’의 지젤 등이 금방 떠오른다. 어렵기로 소문난 ‘라 바야데르’의 니키아와 감자티도 그중 하나다.

이들은 발레리나로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인물들이고, 무엇보다 무용수에게 높은 수준의 기량을 요하는 캐릭터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때문에 이 배역들은 대개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들에게 맡겨지는 것이 다반사다.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올해 초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한 발레리나 한서혜는 입단한지 반 년도 안 돼 벌써 주역 신고식을 치렀다. 맡은 배역은 얼마 전 막을 내린 ‘라 바야데르’의 바로 그 감자티 역. 신인으로서는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한 배역에 그를 캐스팅한 것은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의 신임과 큰 기대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는 역시 달랐다. 큰 무대에 서본 경험이 별로 없는 새내기에게 감자티라는 큰 배역과 오페라하우스를 가득 메운 관객들의 장관은 거대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무대에 오르기 전의 그 떨리는 느낌을 오히려 좋아하고 즐기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도망가고 싶더라구요(웃음).” 부담이 컸던 만큼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세 차례의 감자티 출연 중 첫 번째 감자티는 자신도 인정하는 ‘실패작’이었다고.

발레팬들의 냉정한 비판을 접하며 그는 자신이 프로의 세계에 왔음을 더욱 실감했다. 그래서 발레단 입단 후에는 학생 때보다 관객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됐고, 무대가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서혜는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최고의 발레리나를 꿈꾸기보다는 춤 자체를 즐기며 독특하고 개성있는 발레리나로서 기억되길 바라기 때문. 그래서 그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절대로 ‘잘 하고 내려오자’라는 강박관념을 갖지 않는다고. “갖고 있는 걸 다 보여주고 오자, 관객들과 내 춤을 즐겁게 공유해보자고 속으로 다짐해요.”

춤 자체를 즐기는, 신인답지 않은 여유로운 태도는 어릴 적부터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한 환경 탓이 크다. 한서혜의 어머니 역시 발레를 전공하고 현재도 발레학원 운영 중인 ‘전직’ 발레리나. 고모는 성악을 전공했고, 사촌들은 모두 음악과 미술 등 순수예술에 몸담고 있어 예술이 익숙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한서혜에게 발레란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날 춤을 잘 추면 행복하고, 못 추면 3일간 찝찝하고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는 그에게 발레는 그 자체로 삶이며 사랑이다.

혹자의 평 대로 미완의 새싹인 한서혜의 발레는 아직 보완할 점이 많다. 하지만 그 점을 알고도 발레단은 그를 주역에 캐스팅했고, 그 부담을 이겨내며 한서혜는 또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언젠가 문 단장은 그에게 “‘한서혜’ 하면 ‘유니버설발레단’이 떠오르게 노력을 많이 하라”고 격려했다. 강하고 힘찬 ‘한예종 스타일’을 벗어나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유니버설 스타일’을 습득하는 것이 지금 한서혜의 작은 목표다.

힘든 공연이 끝나자마자 그는 요즘 콩쿠르에 나가는 남자 파트너의 2인무 상대를 해주기 위해 휴식을 반납 중이다. 그런데도 그 표정에서 힘들다는 불만을 읽어낼 수 없는 건, 비단 22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돈 키호테’의 키트리를 가장 좋아한다는 그는, 정말 키트리처럼 발랄하고 활기차게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바삐 연습실로 향한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