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가] (36) 영화 프로그래머 배주연시네마 상상마당에서 시대의 이면 읽어내는 단편·예술영화제 기획차별화된 프로그램으로 진정한 영화 마니아들에게 특별한 공간 제공

혼자 가기 좋은 극장이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대단한 단편영화제>(매년 9월)나 음악을 소재로 한 <음악영화제>(12월 중하순), 그리고 상업영화나 장편영화 속에서 소외되어야 했던 단편영화는 <단편상상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화요일 저녁 8시에 상영해 준다.

때마다 열리는 특별전이나 기획전 등은 영화 마니아들을 충분히 애타게 만든다. 다음 기획전이 무얼까 간절해질 만큼 튀는 테마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느낄 수 없는 아늑함이랄까. 영화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만화나 무가지 등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코너는 덤이다.

혼자 와도 어색할 필요가 없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따로’, ‘또 같이’ 보는 순간 마치 영화 동호회 회원들이 모인 듯한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되기 때문이다.

“시네마 상상마당은 ‘특별한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기분을 누릴 수 있는 극장이죠. 저 또한 과거에 서울아트시네마나 코아아트홀 같은 극장에서 ‘지금의 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영화와 조우’하는 기분이었거든요. 사람에 치이지 않고 영화 감상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 이곳의 경쟁력이라 할 수 있어요.”

복합문화공간 KT&G 상상마당이 서울 홍익대 인근에 착륙한 지 어느덧 1년 8개월째. 배주연 씨가 지하 4층의 ‘시네마 상상마당’ 프로그래머로 활동한 시기도 그쯤 되었다.

시네마 상상마당의 행보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과감한 도전’ 아닐까. 첫 개관작 <대단한 단편영화제>는 시네마 상상마당의 캐릭터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ㆍ후반까지 국내외 단편영화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국내단편걸작선’이나 국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해외영화걸작선’, 그리고 홍대 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인디밴드 영화(인디밴드가 출연하거나 인디밴드에 관한 영화) 등 참신하면서 실험적인 기획전으로 시네마 상상마당은 2007년 9월 첫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과연 저예산 단편영화나 예술영화로 승부를 걸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이다. 외줄 위에 홀로 선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껏 밀어붙이는 고집스러움이 오히려 빛을 발했다고 할까.

“일반 예술영화관에서도 단편영화를 정기적으로 상영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단편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어하는 관객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이들의 우려 속에서 시작한 <단편상상극장>은 처음엔 유료 입장객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평균 좌석 점유율이 50% 이상이죠. 또 <음악영화제>를 하면서 음악장르별로 음악영화들을 묶는 시도라든가 이번 기획 프로그램처럼 ‘디아스포라’(그리스어 Diaspora, 이산이나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를 주제로 한 영화들을 전면에 내세운다든가 하는 시도가 있기 때문에 많이들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

대중적인 것과 거리가 먼 단편영화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독립영화 등 막상 상영을 했을 때 관객들이 외면할까 걱정했던 프로그램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상업영화들 속에서 오히려 특별한 존재처럼 보였다.

영화 ‘헤드윅’으로 스타덤에 오른 영화배우 겸 감독 존 카메론 미첼의 특별전 때 관객과의 대화와 공연 이벤트 등은 반응이 꽤 좋은 편이었다. 영화관 프로그램이 2주 단위로 교체되는 긴박한 일정 속에서도 짜릿할 수 있었던 건 관객과의 소통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차별화된 기획을 굳이 하려고 애쓰기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영화가 바로 관객이 원하는 영화일 거라 생각해요. 세상엔 최소한 나와 닮은 사람 한 명쯤은 있겠죠. 그런 사람들을 위해 프로그램을 짠답니다.”

그렇다면 영화 프로그래머의 일상은 어떨까? 영화 티켓을 끊고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에선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단편영화 위주의 프로그램이 많은 시네마 상상마당의 경우는 특히나.

(위) 시네마 상상마당 고객 편의시설 만화방 코너 (아래) 존 카메론 미첼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

“단편영화제를 할 때는 영사실에서 숨 쉴 틈도 없이 영화를 교대해야 해요. 일반 장편영화를 상영할 때보다 4배 이상으로 힘이 들죠. 필름을 감았다 뗐다…거의 전쟁통이에요.(웃음)”

동시대를 보여줄 수 있는 이슈는 늘 배 씨의 관심거리다. 특히 기획전의 경우 새로운 영화를 선보이고 싶은 욕심 때문에 개봉하지 않은 영화들을 해외에서 직접 가져오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뿐 아니라 각종 영화제도 발품을 팔며 열심히 쫓아다니는 편이다. 배 씨 또한 또 다른 의미에서 영화 마니아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세계인의 근심을 담은 디아스포라 영화제인 는(5.18~5.27) ‘불안한 세계시민’, ‘경계에 선 여성들’, ‘한국영화신작전’이라는 세가지 섹션으로 나뉘어 관객에게 디아스포라의 의미와 ‘우리 시대의 디아스포라는 뭘까’라는 화두를 던지는 참신한 기획전이다.

“사실, 디아스포라 영화 자체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장률 감독의 ‘망종’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죠. 하지만 늘 아쉬웠던 게 ‘디아스포라’가 협소한 의미나 역사적 배경을 가진 것으로만 번역된다는 거였어요. 올해 한국영화계에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대거 나왔어요. 그만큼 한국사회도 더 이상 ‘단일민족’이라는 논의로만 설명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뜻이겠죠.”

는 말 그대로 ‘나는 유령이 아니야’란 의미다. 자신의 장소에서 비존재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꼭 이민이나 이주, 유학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배주연 씨는 현대인들 중 유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유령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디아스포라 영화제를 통해 힘을 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런 배 씨가 영화를 통해 꿈꾸는 세상은? “단지 영화를 기획하는 역할뿐 아니라 프로그래밍을 통해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거란 원대한 포부가 제겐 있어요. 특히 이 영화제가 계기가 되어 영화계나 우리 사회가 ‘디아스포라’라는 의미를 되새기는 시기가 되었으면 좋겠고요.”

시네마 상상마당의 기획전을 보면 늘 마음속에 한 가득 숙제를 안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그건 어쩌면 가볍고 단순하게 이 시대의 표면을 미끄러지듯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번쯤은 주변의 타자들에게 애정을 가지라는 프로그래머의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매주 화요일마다 열리는 5월 <단편상상극장> 기획전 테마는 바로 ‘흔들리는 사람들’이다. 비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일용직 등 우리 시대 노동을 규정하는 이름들이 5월 시네마 상상마당에서 열린다.

누군가는 한번쯤 다뤄야 하는 불안한 현대인들의 자화상 아니, 신인감독이 저예산으로 만들고 있는 소외된 타자들의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창작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끝났다고 그냥 가지 마세요. 관객과의 대화나 상상유랑단 같은 인디밴드의 공연, 작가 전시회 등 여러 이벤트가 매 기획전마다 준비되어 있거든요. 영화를 보고 난 후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쉼터가 바로 시네마 상상마당이에요.”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