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정욱준투명하게 비치는 '쉬어' 소재 트렌치 코트로 파리 패션계 유혹

어수선한 작업실의 한 가운데 그림처럼 앉아 있는 모습은 2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잠이 모자란 눈 주위는 불그스레하고 살이 움푹 빠진 것을 빼고는. 2년 전의 그는 지금보다는 살이 붙은 볼로 파리 진출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때는 ‘너도나도 해외 진출’ 바람이 그에게도 불어온 줄 알았다. 그 해 가을 경 그가 파리에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팔은 안으로 굽으니까’ ‘고생하는 디자이너한테 재 뿌리는 기사 쓸 순 없잖아’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 몹쓸 병은 간사하게도 지난 해 칼 라거펠트가 준지(Juun.J: 정욱준이 파리를 겨냥해 만든 브랜드)의 옷을 입고 펜디 쇼의 피날레에 서자마자 말끔히 나았다. 다섯번 째 컬렉션을 위해 파리 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20일도 채 안 남은 정욱준을 찾아갔다.

복잡한 작업실보다 더 복잡한 그의 머리 속을 뒤져 이번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와 대한민국 패션계에 대한 서운함에 대해 들었다.

칼 라거펠트도 반한 테일러링의 귀재

정욱준은 참 똑똑한 디자이너다. 그는 디자이너 말려 죽이기 딱 좋은 대한민국에서 용케도 살아 남았다. 싼 옷은 인터넷에서, 비싼 옷은 백화점에서 사는 이 나라 소비자들에게 디자이너 숍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치스럽거나 유난 떠는 일이다. 대중은 디자이너가 런웨이 위에 서 있기를 바란다.

박수는 쳐주지만 옷을 살 때는 여지 없이 발길을 돌린다. 디자이너도 쇼 룸 뒤에 숨었다. 하도 오래 대중과 떨어져 있다 보니 어쩌다 대중의 호응을 얻기라도 할라치면 상업적이라고 서로 욕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론 커스텀으로 전도유망한 디자이너 목록에 단골로 이름을 올리던 때, 정욱준은 홈쇼핑이라는 채널을 잡았다. 아티스트에 대한 강박이 디자이너들의 목을 졸라 가게에서 파리 달리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지라도 그는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번 돈은 파리 진출에 대한 막연한 그림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파트 세 채 값”이 들었다는 파리 컬렉션은 디자이너의 예술혼을 한번 불태우고 장렬히 전사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는 파리에서도 열심히 그리고 꽤, 돈을 벌었다.

“이번 인터뷰의 주제는 해외에 나간 디자이너 중 가장 많이 판 디자이너에요”

일단 던져놓고 눈치를 살피자 그가 웃는다. “맞죠?” 재차 물으니 “그렇죠” 쑥스럽게 답한다. 그리고 “컬렉션 횟수에 비하면요”라고 덧붙였다.

보통 첫 컬렉션부터 수주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그의 옷은 처음부터 바이어들의 관심을 끌었다. 첫 컬렉션에 대한 현지의 충격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컬렉션에서 손익분기점을 맞췄고 다음 시즌까지 진행하고 나면 3배 가량 신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 그의 옷은 파리의 레끌레어, 뉴욕의 세븐, 밀라노의 단토네, 홍콩의 조이스 등 전 세계 패션 도시에서 가장 주목 받는 편집숍에 들어가 있다.

(좌) 09 F/W 파리 컬렉션 (우) 2010 파리 S/S 컬렉션에 선보일 디자인의 도안

영원한 연인, 트렌치 코트

정욱준에게 ‘트렌치 코트’만큼 가슴 설레고 아픈 단어가 있을까? 가끔은 심장이 멎을 만큼 강렬한 영감을 제공하기도 하고 때로는 밤을 새워 울고 싶을 만큼 풀기 어려운 숙제가 되기도 했던 이 ‘녀석’은 어느새 정욱준의 DNA가 되어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가 처음 파리에 입성해 능숙한 테일러링으로 재구성한 아방가르드한 트렌치 코트를 무대에 올렸을 때 유럽인들은 지금까지 본적 없는 새로움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후로 그의 컬렉션에는 늘 트렌치 코트가 등장했다. 이번에 보여줄 것도 역시 트렌치 코트다.

“보통 남성복에는 쓰지 않는 쉬어(sheer: 투명하게 비치는) 소재를 사용했어요. 물론 얼마 안 가 내가 미쳤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요.”

보통 디자인 작업이 끝나면 바로 생산에 들어가지만 이번에는 생산에 들어가기 위해 수십 번이나 복잡한 수학 공식을 통과해야 했다. 얇고 제멋대로 휘는 소재를 다루는 것도 까다로운 데다가, 투명한 소재가 절개돼 겹쳐지면서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불투명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소재 계산, 재단 등 모든 것을 새로 해야 했다.

하지만 작업실에서 슬쩍 훔쳐 본 미완성의 트렌치 코트는 “쉬어 소재가 섹시하지 않고 클래식해 보이기를 바랬다”는 그의 의도를 놀랍도록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그가 파리에 머무를 때 프랑스 패션 매거진 앙상스의 편집장이 그를 초대해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있다. 편집장은 식사를 하면서 “세계 패션계가 유럽 패션의 차세대 주자로 지목하고 있는 곳이 독일이라면 아시아에서는 한국”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너희 나라에서는 너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겠지?”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국위 선양은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고, 선배의 뒤를 이어 세계 패션계를 깜짝 놀라게 할 인재는 맥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차마 할 수 없었다.

“파리에서 패션계에 입문하려는 친구들은 에이전시에서 1년 정도는 무상으로 일해요. 물론 1년 후에 고용이 보장된 것도 아니구요. 그게 패션 선진국의 진짜 모습이에요. 요즘 한국의 젊은 친구들 중 이런 대접 받으면서 일하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기초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빨리 돈을 벌 수 있을까만 고민하죠. 빠른 시간 안에 남들 하는 만큼 똑같이 누리고 살려면 이 일은 할 수 없어요.”

그는 최근 열린 ‘디자이너의 해외 진출’ 특강에서 하고 싶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삼킨 채 “그저 지금은 열심히 기술을 익히라”는 말만 반복했다. 생각할수록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현실에 그의 목소리가 오히려 차분해진다.

“진짜 한국 패션계가 부흥하는 것을 보려면 정책을 결정하는 높은 분들이 디자이너들의 필요를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밖에 나가면 환영 받지만 국내에서는 이동 수단 조차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현실부터, 지금 당장 티셔츠 하나 제대로 봉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전부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