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서용선한민족 창세 신화의 여신 모티프한 작품등 선보여

“국가가 뭔가.”

조선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용선 작가는 생각했다. 재작년에서 작년, 중국을 오가며 작업할 때였다. 언어와 생김이 같고, 만주로 이주하기 전 역사와 동질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국적 때문에 이렇게 갈라져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국가의 경계는 이토록 무자비한 것이지만, 동시에 허무한 것이기도 하다. 조선족들은 ‘온전한’ 중국인으로 살 것인지, 한국인으로서의 자각을 지킬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작가는 “국가가 이렇게 변하는구나, 국가란 얼마나 불안정한 개념인가” 생각했다.

“수만 년간 ‘국가’가 변천한 결과가 우리의 현재를 형성하는 것 아닌가. 그것은 우리의 현재를 인식하고 이해하려면 시야를 국가 너머로 넓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20여 년간 단종의 비극을 그려온 ‘역사화가’ 서용선의 관심사가 최근 신화적 세계로 뻗어나간 데에는 이런 자각이 있었다. 중국에서 그는 시간을 뛰어넘은 역사의 흔적과, 사건들 속에 지워진 역사를 동시에 보았다. 만주 대륙에는 신라 사람들을 그린 벽화가 남아 있었지만, 한편 저 첩첩한 전쟁과 이주의 지층이 또 얼마나 많은 삶을 묻어 버렸을지 몰랐다.

“‘역사’라는 개념이 명료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왜곡된 채 주입되어 있을까 생각했다. 나의 한계를 반성했고, 역사도 현재도 좀더 적극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서용선 작가가 그리고 조형해내는 신화는 탈역사가 아닌, 지워지거나 잊혀진 역사에 가깝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 2009-서용선 전>에서 선보이는 최근작의 소재는 ‘마고할미’다. 작가는 한민족의 창세 신화에 등장하는 이 여신을 모티프 삼아 단군시대 이전을 탐구하려 했다. 신라의 박제상이 쓴 <부도지>를 참고했다. 이 책은 한민족이 세운 첫 국가인 ‘마고성’의 존재와 소리를 통해 태어난 마고할미 신화를 기록했다. 여기에 작가 자신이 여러 지역을 답사하며 채집한 신화의 흔적들을 결부했다. 거제도에서 접한 마고할미의 거대한 위용은 작가에 의해 설치 작품 <마고성 사람들>로 거듭났다.(‘마고성 사람들’ 사진)

원형에의 추구는 서용선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해 온, 일종의 주제 의식 같은 것이다. 그에게 단종의 비극은 인간의 실존과 그 본질이 무엇인지가 응축된 모티프였다. 친구와 우연히 찾은 강원도 영월의 한 강가가 죽임 당한 단종의 시신이 던져진 곳임을 안 것이 계기였다. 그는 당시 “가슴에 무엇인가 맺히는 것 같았다.” ‘인간이 왜 울고, 어떻게 외롭고 괴로운지’가 느껴졌다. 그 감각이 너무 생생해 구체적 장면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단종 연작>의 출발이었다.(‘심문’, ‘심문, 노량진, 매월당’ 사진)

이는 작가의 또 다른 대표적 연작인 <도시인물화>에서도 드러난다. 청계천, 숙대입구 지하철역 등 서울 곳곳의 군상을 그린 이 작품들에서 인물들은 그 자체가 ‘도시에서의 삶’을 담지한 풍경 혹은 개념처럼 보인다. 도시의 속도와 질서, 정서가 투박할 만큼 강직한 선과 형, 색으로 ‘새겨져 있다.’(‘청계천에서’, ‘숙대입구07:00~09:00’ 사진)

서용선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거침없는 색감 역시 원형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초기에는 담담한 색감으로 소나무를 연이어 그렸던 그는 이렇게 색을 억제하는 ‘한국적’ 경향이 조선 성리학의 억누름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갑갑했다. 단조로움을 파괴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조선 이전의 미술, 특히 불교 미술에는 분명 찬란한 색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되살리는 ‘실천’으로 색을 쓰기 시작했다.

서용선 작가의 작업은 이렇게 현실과 ‘원형’을 연결 지음으로써 우리 개개인의 역사성을 동시에 회복시킨다. 국립현대미술관 김경운 학예연구사는 이 “장대한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인간의 역사”가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해 깊이 있고 진지한 성찰을 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것이 작가 서용선의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의의일 것이다.

그의 작품세계를 망라하는 <올해의 작가 2009-서용선 전>은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9월20일까지 열린다.

당신의 ‘역사화’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거시사적 시선을 바탕에 둔 채 그 안에서 운신하는 개개인의 구체적 상태를 주목하는 것 같다.

나에게는 동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도 거기로부터 출발한다. 주변 사람들 한 명 한 명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을 집단화하고 다른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유형화하는 게 역사의식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도시인물화> 연작은 어떻게 시작했나.

나 스스로 도시화 과정과 함께 성장했던 것이 계기였다. 1951년생이다.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 태어났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도시와 도시적 삶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미아리 부근에 살면서 청와대 부근 중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신림동에 있었으니, 십수 년간 서울을 관통해 다닌 셈이다.

그 긴 여정이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버스 정류장에 있는 사람들을 살폈기 때문이다. 그 무표정이 어떤 뜻일까 상상하고 추측했다. 단편소설에서 읽은 인물들, 주변 사람들을 대입해보기도 했고, 이런 시선이 작품으로 이어졌다.

(아래 좌측) 심문, 노량진, 매월당 (우측) 청계천에서

어떤 소설들을 주로 읽었나.

어려서는 신문에 연재되는 소설들을 즐겨 읽었다. 삼국지, 수호지, 박종화의 역사소설 등을 읽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일본 단편소설들에 눈을 떴는데,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문체에 끌렸다. 지금 떠오르는 건, 패전 후 일본을 배경으로 한 남녀 학생의 애틋한 연애담이다. 그 연애가 패전 분위기의 탈출구처럼 보이는.

특유한 ‘색’이 있다. 이런 색들은 어떻게 쓰게 되었나.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나. 색감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대학교 때만 해도 색채 감각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인지 몰랐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환경 탓인 것 같더라. 서울 변두리에서 색채다운 색채를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내가 쓰는 색채도 흐릿하고 애매했다.

그러다 미군물자의 색을 보니 원색도 많고 좋았다. 종로 거리에서 미국 음료 광고를 봤는데 한국 광고가 다 누추해 보이더라. 그 화려한 색이 감성을 건드렸다. 이전에는 관념적인 미술을 좋아했었는데, 그 순간 내가 논리적이거나 지적인 작업만 추구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림은 ‘가슴’으로 그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옛 불교미술과 탱화, 민화, 장식벽화는 색채가 강했는데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억압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것을 극복하고 싶어 색채를 전면적으로 쓰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선 성리학이 우리를 너무 억눌렀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절제가 동양의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하지만, 파괴해야 할 시점인 것 같았다. 그것을 우선 염두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더 산만하게 색을 쓰기도 했다. 마티스의 회화라든지 팝아트에서 영감 받은 색들을 실천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로 7년째다. 매월 셋째주 주말에 동료 작가들과 함께 철암을 찾고 있다. 철암역의 한 식당을 갤러리로 만들어 전시를 연다. 강원도 영월에 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시내를 걷는데 상식적으로 문화, 예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더라. 겨우 눈에 띄는 것이 나이키 매장 정도였다.

나 자신은 학교와 갤러리만 수십 년 오가며 살았는데 바깥으로 눈 돌려보니 좀 미안하단 느낌이 들었다. 도시와 너무 차이가 났고, 어린 시절 살던 변두리 지역이 생각났다. 그런 곳에 문화를 불어 넣고 싶어서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어떻게 시작했나.

처음에는 탄광마을을 일종의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만들려는 건축가들과 공조했다. 마침 1995년도에 미국 버몬트 레지던시에 다녀왔는데, 그곳이 운영되는 방식이 헌 집을 사서 예술가가 살면서 현지인과 교류하는 것이었다. 국내 탄광마을에서도 시도해보고 싶었다.

성과가 있었나. 현지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쉽지는 않다. 현지인들이라 봐야 폐광 이후 남은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문화예술을 반기지도 원치도 않는 분위기다. 우리에게 갖는 호기심도 “뭘 해먹고 사나?” 정도다. 사실 막연하게 언젠가 도움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래도 내년 1월이면 횟수로 100번을 채운다. 오히려 우리가 도움 받는 측면이 크다. 정기적으로 도시를 탈출해 계절의 변화를 경험한다. 이런 것이 작가에게는 기회일 수 있다.

추진하고 있는 다른 프로젝트도 있나.

태백의 한 젊은 사업가가 자생식물원을 열면서 우리에게 제안해 ‘환경조합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거기서 매년 해바라기 축제를 열고, 탄광마을의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있다. 오는 10일에는 양평 양수역에 있는 소머리국밥집을 갤러리로 오픈할 예정이다. 이름은 ‘갤러리 소머리국밥집’이다.(웃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