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클래식 비평가 이상의 애호가, 안동림20세기 전설적 지휘자 34명의 삶과 예술 담은 책 출간 노익장 과시

청주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안동림 선생(77)은 다양한 호칭을 가진다. 영문학 박사이자 영어 번역가이기도 하고, 중국 고전인 <장자>와 <벽암록>의 역자이기도 하며, 클래식 서적을 수 만부 찍어낸 스테디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덕에 혹자는 ‘이 시대 르네상스 맨’이라 말하기도 하고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도 이름이 높은 덕에 클래식 비평가라 수식하기도 하지만, 그는 한사코 자신을 ‘클래식 애호가’라 고쳐 말한다.

천 페이지가 넘어 두께만도 어마어마한 <이 한 장의 명반>은 1988년 출판된 이후 꾸준히 클래식 교과서이자 백과사전으로 자리해왔다. 그가 최근 <불멸의 지휘자>를 발표했다. 클래식 전문지 월간객석에 2006년부터 2008년 말까지 3년간 연재한 원고에 음반과 사진을 더해냈다.

“처음 연재 시작할 때는 내 나이도 있고 해서 고사했었는데, 결국 시작해서 연재가 묶여 책으로 나온걸 보니 만족스럽네요. 매달 실어야 해서 어떤 지휘자를 할까 고민하다가, 너무 옛날 사람이면 독자들이 관심이 없을 것이고 지금 살아있는 지휘자보다는 죽어서 역사적으로 평가가 난 사람을 해야겠다 싶었지.”

시력이 나빠 모든 악보를 암보했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시작으로, 모차르트와 말러에 정통했던 브루노 발터, 지휘계의 독설가였던 한스 크나퍼츠부슈, 40년 이상 세계 최고 교향악단 중 하나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헌신했던 카알 뵘, 교향악단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평론가의 지탄과 대중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존재했던 레너드 번스타인 등 20세기를 충실히 살다간 서른 네 명의 전설적인 지휘자들의 삶과 예술이 쓰여졌다. 후르트뱅글러가 음악을 대하듯, 안동림 선생은 포디엄(지휘대)에 서서 격정적이면서도 외로이 움직이는 지휘봉 이면에 있는 지휘자의 철학을 담아낸 것이다.

“위대한 지휘자? 곡을 철저히 분석하고 오케스트라를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지휘자이지요. 토스카니니와 후르트뱅글러는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연습시킨 걸로 유명해요. 지금은 오케스트라도 노조가 있으니 쉽지 않은 일이지만. 토스카니니가 <라트라비아타>를 연습하는 영상을 보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맘마미아!’(‘맙소사’라는 그리스어)라면서 단원들을 무섭게 몰아 부치죠. 빌렘 멩겔베르크는 한 시간 반 잔소리하고 40분 연습하죠. 지휘자 성격 나름이라고 볼 수 있어요. 녹음 안 하기로 유명한 첼리비다케는 친절하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브루노 발터도 참 신사적입니다.”

안동림 선생이 가장 존경한다는, 후르트뱅글러는 치열한 학자 같았다. ‘나는 악보 뒤에 숨겨져 있는 음표를 찾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에겐 ‘적당한’이란 단어가 없는 거처럼 꾸준히 연구했다. “영혼이 불타오르는 듯하죠. 베토벤 교향곡 9번, 특히 마지막 악장으로 가다 보면 악기가 합주를 해요. 그런데 그때는 지휘가 너무 빨라서 단원들이 혼란을 일으킬 정도에요. 부분적으로 잠시 소리가 얽히죠. 하지만 그것조차도 감동적입니다.”

안 선생은 후르트뱅글러가 지휘할 때의 모양새를 따라 하면서 말을 이었다. “지휘봉을 올릴 때와 내릴 때, 마치 풍에 걸린 사람처럼 팔을 여리게 흔들지. 풍은 없었지만 그게 그의 지휘 방식이었어요. 그는 가혹한 것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고 엄격했습니다.” 그는 또한 브루노 발터의 모차르트 앨범을 아낀다고 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게, 인공적인 부분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이다.

돈암동에 위치한 안동림 선생의 자택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는 지휘자에 이어 곧 안 선생의 개인적 클래식 음악듣기의 히스토리로 이어졌다.

LP판 이전, 유성기에 SP판을 놓고 듣던 시절이다. ‘눈만 흘겨도 깨진다’는 SP판을 유성기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으면서 처음 클래식을 접했다. 아버지 옆에서 유행가를 듣기도 했지만 20세기 최고의 베이스로 추앙 받는 러시아의 샬리아핀의 ‘볼가강의 뱃노래’와 그리그의 ‘솔베이그의 노래’를 듣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대학졸업 후, 6.25의 폐해로 여전히 주머니가 가볍던 시절엔 가끔 르네상스, 아폴로와 같은 음악감상실에 들러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LP판을 한 두 장씩 사 모으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 들어서다. 때론 외상으로 사기도 했던 앨범은 나눠주고도 1400~1500장을 헤아린다. 충무로에 줄지어 있던 레코드 점 중 ‘불후의 뜨락’은 그의 단골 레코드 가게였다. 가게 주인이던 처자가 미혼이던 시절부터 드나들었는데, 이젠 그 부부의 딸이 대학생이다.

“내가 결혼하고 먹고 살기 바쁠 때인데, 매번 앨범을 사가면 마누라 눈치가 보여서.. 또 LP는 크기도 크잖아요. LP판 몇 장을 사서 종이봉투에 가져갔는데, 또 사왔느냐는 얘기 안 들으려고 마당에 있는 개 집 옆에 껴두고 태연히 들어갔단 말이지. 그리고 밤이 된 다음에 나와서 가져가려고 봤더니, 개가 다 물어뜯어 놓은 거야. 어찌나 아깝던지..”

너털웃음을 짓던 그는 마침 떠올랐던지, 자신의 서재로 기자를 이끌었다. 보물창고 같은 그곳엔 음반과 책이 빼곡하다. 5년 전,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온 후 서재가 턱없이 작아져 책과 음반을 정리하지 못한 탓이다. 한 트럭을 남들 나누어주고도 남은 것이 그렇다. 한쪽 구석에 자리한 책장에는 수 십 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깨끗이 보관된 LP판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게 아까 말한 샬리아핀의 정통성을 잇는 베이스, 보리스 크리스토프 음반이에요.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마이클 래빈도 있고, 이 음반은 이제 웃돈 주고 구하기도 힘들다지. 드뷔시 연주한 발터 기제킹도 여기 있지요.”

안동림 선생은 할아버지가 손주 바라보듯, 앨범을 한 장 한 장 꺼내며 설명했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앨범에 대한 백그라운드를 빠르게 반추해내는 뛰어난 기억력과 섬세한 표현은 그가 여전히 건재함을 알 수 있었다. LP판 진열장 옆으로, 빅터 사에서 나온 유성기가 보인다. 성인 남자가 들기에도 꽤 무거운 유성기를 앞에 두고 SP판에 얽힌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엔리코 카루소가 녹음할 때 어떻게 노래했는지 아나? 유성기 나팔 앞에서 노래를 불렀지요. 그러면 SP판이 한 장 나와. 열 장을 녹음하려면 열 번을 노래해야 하는 거라. 돈은 엄청나게 벌었지만 나중에 목에 무리가 가서 후두암으로 죽었지.” 안동림 선생의 클래식 음악듣기의 개인사는 어느새 음향기기 역사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멀고 먼듯한 이야기를 동시대인 학자에게 듣자니, 무척이나 흥미롭다.

“요즘은 DVD 한 장에 오페라 한 편이 들어가지만 옛날엔 비제의 <카르멘>이 SP판으로 스물 넉 장이나 됐지. 한 장에 3~4분 정도 녹음되니까, 들을 때 아주 복잡했다고. SP판 올려놓고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나오잖아. 그럼 아리아가 4분이 넘어가는 건 중간에 끊기지. 그러면 조심스럽게 SP판 한 장 넣고, 다른 한 장 꺼내서 유성기에 올리고, 다시 태엽 감고 그렇게 음악을 들었어. 수도하는 마음으로. 지금 누워서 단추 하나 누르면 듣고 싶은 거 또 듣고 하는 거랑은 달랐지.”

음악듣기의 편리함은 자연스럽게 지휘자로 옮아갔다. 다들 매끈하게 지휘하고 연주하는 요즘 듣기는 좋아도 개성이 없다고 말한다. “예술은 비뚤어져도 개성이 중요해. 요즘 가수들 노래 다 잘해도 정작 누구 노래인지 모르는 것처럼, 지휘자도 그래요. 오케스트라에서 따라주지 못하면 지휘할 수 없는 사정 알지만, 기계적이고 기능적인 면은 안타깝지요.”

직접 본 공연 중 최고의 지휘자는 2002년에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에브게니 스베틀라노프의 차이코프스키 5번과 6번 연주였다고 한다. 생전에 러시아 국립 교향악단을 이끌고 왔던 지휘자는 안동림 선생의‘가슴이 텅 비고 멍해질 정도로 다이내믹하게 연주했고 차이코프스키의 우수를 섬세하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때때로 애정 어린 쓴 소리를 하는 그를 보면서, ‘클래식 애호가’를 왜 그토록 자청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아마추어적 순수한 열정이 굵직한 클래식 서적을 써온 그에게 여전히 남아있던 때문일 것이다.

“늙은 천재는 없어요. 내가 늘 하는 말이지요. 젊어서 천재소리 듣는 사람, 계속 노력하면 되지만 중간에 매너리즘에 빠지는 게 안타까운 거지. 늙어서는 노력이 있을 뿐이에요. 위대한 지휘자들도 결국 죽는 날까지 노력한 사람들인 겁니다.” 베네수엘라의 음악교육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지휘자 두다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심코 말한 그의 지론은 안동림 선생의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했다.

안동림은…


스스로를 '클래식 애호가'라 칭하는 안동림 선생은 청주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르네상스 인이라 불릴 정도로, 다방면에서 깊이를 획득하는 작업을 해왔다.

꾸준한 한학 독학을 통해 <장자>와 <벽암록>을 완역했고, 클래식 애호가들의 교과서라 불리는 스테디셀러 <이 한 장의 명반>을 집필했다. 최근 20세기를 지휘봉으로 압도한 34인의 지휘자의 삶과 예술을 담은 <불멸의 지휘자>를 출판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올 가을에는 자신의 번역서인 <장자>에 인덱스를 추가해 국내 최초로 색인이 있는 중국 고전을 출판할 예정이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오는 8월'풍월당'에서 특강을 하는 안동림 선생을 만날 수 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