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가] (49) 더 톤(THE TON) 윤태건 대표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 '해머링 맨' 설치 프로젝트로 이름 높여"공공미술은 시민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

광화문 흥국생명 건물 앞, 1분 간격으로 손에 든 망치를 내리치는 '해머링 맨(망치질 하는 사람)'을 기억하는가. 미국 조각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작품인 해머링 맨은 어느새 광화문의 랜드마크가 될 만큼 명물로 자리잡았다. 전세계를 통틀어 7번째 에디션에 해당하는 한국의 해머링 맨은 22미터의 키에 50톤의 무게로 전세계에서 가장 큰 위용을 자랑한다.

"한국에 해머링 맨이 설치되기 전까지는 20미터가 가장 큰 작품이었는데 클라이언트의 요구로 조금 더 크게 제작을 했지요. 국내에 볼 만한 공공미술품이 많지 않았던 때 해머링 맨은 최고의 공공미술품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공공미술 전문컨설팅 회사 '더 톤(THE TON)'의 윤태건 대표가 공공미술 기획자로서 이름을 알린 건 바로 '해머링 맨' 설치 이후부터다. 당시 카이스 갤러리 디렉터로 활동하던 그는 흥국생명으로부터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의뢰 받은 뒤 '노동에 대한 찬양'이나 '노동의 즐거움' 등을 이야기하는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 맨을 떠올렸다.

"해머링 맨의 모티프는 작가가 어린 시절 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워 듣곤 하던 세계를 구원하는 거인 설화에서 비롯되었어요. 동화에 나올 법한 거인에 대한 동경이 바로 해머링 맨으로 표현된 셈이죠."

어느날 광화문에 불시착한 이 거인은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거인의 발 밑에 앉아 쉬거나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행인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게다가 세상을 구원하는 거인 이미지와 노동의 보편성을 상징하는 해머링 맨은 흥국생명이란 기업 이미지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해머링 맨은 공공미술이 기업의 이미지를 얼마나 잘 살려주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종종 언급되기도 했다.

공공미술은 건축물장식제도 또는 1%법이라 불리는 제도에 의해 제작된 미술작품을 근간으로 발전, 진화해왔다. 아파트 단지의 조각상부터 도심 속 건물 앞의 추상조각, 그리고 마을의 벽화나 공사장 가림막 등이 모두 공공미술의 다양한 범주에 해당한다.

윤태건 대표와 공공미술은 어떤 면에선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같다.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지만 그가 미대 진학을 결심한 것은 뒤늦은 고3 때였다. 학창시절 만화를 그려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일상의 재미였지만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말은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부모님의 권유로 경찰대학에 진학할 생각으로 공부를 했지만 결국 적성이 문제였다.

"홍익대학교에 예술학과가 신설되었는데 졸업하면 미술평론가나 이론가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림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고3때 진로결정을 하고 도전했던 거지요."

이과생이었지만 '이 길이 내 길이다'라고 결심한 그는 실기시험까지 무사히 치르고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88학번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학부시절 학과 공부에만 충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입학하자마자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며 시위현장을 취재하고 사회의 부조리에 관심을 가지며 학보사에서 청춘을 보냈다.

그 덕에 2학년 때는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윤 대표가 그린 사회 풍자적인 네 컷짜리 시사만화는 교내에서 꽤 인기를 끌었다. 학과공부를 뒷전으로 하다 보니 남들보다 학교를 오래 다닌 것 말고는 대학시절 활동이 아직도 자랑스럽다.

"지금 생각하면 제가 하는 공공미술과 학보사 시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일들이 모두 운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술의 사적인 향유보다는 공공의 장소에서 미술이 좀더 자기 목소리를 내는 공공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요.(웃음)"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망치를 든 사람은 윤태건 씨가 설치 진행을 맡은 작품이다.

윤 대표가 사회생활의 첫 발을 디딘 곳은 삼성문화재단이다. 그는 환경미술팀 연구원으로 공공미술담당 파트에서 일했다. 기업문화재단에서 예술과 행정에 대한 기본기를 다진 후 그는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활동하고 싶어졌다. IMF가 왔고 구조조정을 한다는 소문이 돌 때쯤 카이스 갤러리에서 러브콜을 받고 그는 열정적인 전시기획자로 활동해왔다.

2004년 10월 그를 포함해 두 명이 뜻을 합해 더 톤을 설립한 이후 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 전시팀장(2005), 서울문화재단 놀이터 프로젝트(2006)를 비롯해 창원 더 시티7의 복합건물(2008) 등 정부나 지자체, 기업의 공공미술 기획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윤 대표는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삭막한 도심 속 시민들에게 여유와 휴식을 선사하고 눈을 즐겁게 하는 오아시스를 만드는 전문가인 셈이다.

"공공미술과 관련해 각종 심포지엄이나 특강에 참가하고 심사,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다 보니 공공미술의 문제점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현장에서 풀어내지 못한 숙제는 글쓰기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지요. 기고한 글이 조만간 책으로 묶여 나올 예정이고요."

한 월간지에 기고한 '윤태건의 클릭! 공공미술'은 현재 우리나라 공공미술의 문제와 대안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쓴 글이다. 그가 공공미술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무얼까.

"공공미술은 애초 미술시장과 달리 건축물미술장식법이란 법적제도로 출발했어요. 언제든지 법이 바뀌면 시장 규모와 패러다임에 변화가 생긴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죠."

윤 대표는 아파트에 있는 공공미술품의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다. 당연히 입주민들이지만 아파트가 완공되기 전에 공공미술품을 구입하는 건 입주민이 아니라 시행사나 시공사들이다. 아파트 분양과 준공이 끝나면 구입한 사람들은 손을 털고 나간다. 문제는 공공미술품은 미술작품과 달리 건축물미술장식법에 의해 재유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건축물미술장식제도가 1995년에 전국적 의무사항으로 바뀌면서 미술장식품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어요. 아파트 수명이 25년이라 하면 2020년 경부터 한해 평균 1천여 점의 작품들이 철거 위기에 놓이게 되는 셈이죠. 그 미술장식품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이며 어떻게 해결할 생각일까요? 조각공원을 만들면 된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한계예요. 그럴 만큼 건질 만한 미술장식품도 없는 것 같고요. 그러다가는 전 국토의 조각공원화를 넘어 조각무덤화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더 톤의 윤태건 대표는 벌써 10년 후를 내다보며 그 전에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굳이 공공미술품을 돌이나 스테인리스라는 영구적인 재료를 써야 하는 것도 한계라고 그는 지적한다.

윤 대표의 요즘 고민은 신선하고 기발한 작품을 기획하는 일이다. 늘어나는 기업의 사옥에 기업의 콘셉트에 맞는 스토리가 있는 공공미술품을 기획하는 일은 언제나 그를 설레게 만든다. 현재 여의도 옛 중소기업 전시관 부지에 들어설 세계적 금융그룹 AIG 국제금융센터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또한 그가 욕심 내서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한걸음 앞선 공공미술품으로 시민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더불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 윤 대표와 그가 이끌어 나가는 더 톤이 해야 할 프로젝트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체되어 있는 공공미술시장에 어떻게 하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마을 어귀의 돌무덤이나 처마 밑 기왓장, 담벼락의 아이들의 낙서가 공공미술이죠. 우리 모두가 공공미술 작가이고 생활 자체가 공공미술이라 생각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면 작품을 보는 눈도 한결 높아질 겁니다. 그리하면 자연스레 공공미술의 수준도 높아지지 않을까요?"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