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앙팡테리블] (34) 작가 이영호대안공간 루프 신진작가 공모전 당선… 한국서 첫 개인전 열어

전시장 입구에 드리운 검은 장막을 걷으면, 기이한 문명이 펼쳐진다. 영사기, 대관람차, 축음기 등 오브제는 근대적인데 그것들의 금속성과 공간 안 빛의 쓰임에는 첨단의 느낌이 있고, 공기는 고대 유적지처럼 신비롭다. 역사 속 여러 시대가 겹쳐 있는 것 같다.

이런 식이다. 영사기가 거울에 한 줄기 빛을 쏘면, 그 빛은 넓게 반사되어 대관람차 모형을 향한다. 벽면에는 대관람차의 실루엣이 얼룩진다. 잘 계산된 삼각구도가 거대한 환영을 빚어낸다.

기술에 매료되어 그 변천사를 살펴 보던 이영호 작가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명제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영상 기술의 역사는 키네토 그래프에서 출발해 필름을 스크린에 영사하는 방식으로 나아갔잖아요. 그에 따라 관객의 관람 형태도 혼자 핀홀 구멍을 통해 보는 것을 넘어 상영관에서 함께 보는 것으로 바뀌었고요.

하지만 최근에는 홈 시어터를 통해 다시 혼자 관람하는 방식이 나타나고 있어요. 이처럼 역사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보다 원형으로 돌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역사 인식이 다양한 기술과 다양한 정서를 겹침으로써 시대를 겹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로드 무비 감독으로 유명한 빔 벤더스의 1976년 작 < Kings of the road >를 모티프이자 재료로 삼은 영상 작업이 그 예다. 영화 장면과 작가 스스로 그린 추상회화 같은 장면들을 리드미컬하게 콜라주했다. 로드 무비라는 장르 자체에서 발견되는 근대적 교통 수단의 속도감과 인간의 손이라는 원초적 '기술'의 감각이 어우러진 인상에 전자 음악이 더해진다.

이영호 작가는 이처럼, 꾸준히 기술의 역사와 속성을 테마로 작업해 왔다. 독일과 영국에서 연 3번의 개인전도 사진과 영화 등 영상 기술에 관한 것.

2007년 스웨덴에서 열린 룰레나 썸머 비엔날레에서는 16mm 필름 영사기가 축소된 롤러코스터 레일 위에서 맴도는 작품을 출품했다.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영화를 만든 해 미국 코니 아일랜드에 최초의 롤러코스터가 등장한 사실에 착안했다. 역사의 순차 대신 순환과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대안공간 루프 신진작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한국에서 여는 첫 개인전 < Black Maria and White City >도 그 연장선에 있다. 1893년 일어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 '블랙 마리아'는 에디슨이 설립한 최초의 영화 촬영소, '화이트 시티'는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시카고에서 열린 대규모 박람회의 별칭이다. 전시장을 채운 오브제들은 이때 처음으로 선보인 것.

그래서다. 이영호 작가의 전시장이 유적지이자 실험실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그는 역사가의 탐구심과 발명가의 창의력을 지닌 작가다.

< Black Maria and White City >는 10월11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