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K비보이 챔피언십 한국대표 선발전 우승… 하루 8시간 구슬땀

비보이 진조 크루. Fe, 옥토퍼스, STONY (왼쪽부터)
"많은 사람이 미국의 갱스터문화를 떠올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춤으로만 받아들인 경향이 강한 것 같아요"- 진조 크루 fleta(본명 이승진∙24)

15일 자정께 서울 종로5가 뒷골목의 한 상가건물 3층. 10여명의 비보이가 바닥에서 몸을 꿈틀거린다. 바닥에 손을 대고 움직이며 몸을 튕긴다. 흐느적거리지만 리듬 있는 힙합 선율에 몸을 맡기는 순간. 뒤집어진 채 돌아가는 몸이 원형을 이룬다. 삭막한 도시에 피어난 움직이는 꽃이다. 춤을 추던 비보이들은 후드티의 모자나 머릿수건을 뒤집어 쓰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다.

진조 크루는 "외국 비보이들은 배틀하는 경우에 욕을 하기도 하지만 한국에서는 예의를 중요시해요"라며 "선배들하고 배틀하다 감정이 격해진 경우도 있지만 얘기나 춤으로 풀죠"라고 한국의 비보이 문화를 설명했다.

예의 중시하는 한국의 비보이

"주먹다짐을 하거나 하는 일은 없어요. 배틀을 하다보면 감정이 격해져서 밖에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얘기나 춤으로 하죠. 배틀 중에는 적이니까 괜찮다는 선배도 있어요"

진조 크루가 5일 인천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유케이(UK) 비보이 챔피언십' 한국대표 선발전에서 배틀을 벌이고 있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것 같다. 큰 대회의 출전권을 따낸 선수들이었지만 춤을 추던 중간중간 생각에 잠긴 모습이 조금 무거워 보인다. 매니저는 "중간중간 쉬기도 하고 표현하고 싶은 춤을 구상하는 것"이라고 귀띔했지만 알고 보니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진조 크루는 5일 인천 청소년 수련관에서 있었던 '유케이(UK) 비보이 챔피언십' 한국대표 선발전 배틀부분 결승에서 비보이 1세대 격인 리버스 크루을 꺾고 우승했다. 리버스 크루는 경기결과에 승복했고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젊은 혈기에 배틀의 앙금은 남아있었다. 배틀이 끝난 뒤 경기장 밖에서 양 크루 사이에 나누던 대화가 배틀로 이어졌다. 당연히 감정싸움이 있었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대한 앙금을 털었다. 우리나라 비 보이는 선배 팀(올드 스쿨)과 후배 팀(올드 스쿨)이 서로 예의를 차리는 편이다.

문제는 이후에 있었다. 이들의 길거리 배틀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인터넷 비보이 카페에 올라오면서 악플이 달렸다. 뉴 스쿨, 올드 스쿨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 것. 진조 크루 멤버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렸다.

진조 크루는 팀 내에서 서로의 춤 실력을 인정하고 리더와 각 역할을 존중한다. 하지만 손윗사람에게 깍듯하게 행동하고 막내가 청소에 앞장선다. 팀원 영입은 리더가 결정한다. 진조 크루가 알려지면서 여럿이 연습실로 찾아왔지만 리더는 마지막까지 남은 한명만 받아들였다.

군대처럼 억압적이지는 않지만 서로 위계질서를 받아들인다.

"완벽한 비보잉 선보이려 하루 8시간씩 연습"

"연습이요? 밤 12시부터 아침 8시까지 해요. 연습실 사정이 있어서지만, 낮∙밤이 바뀌어서 이젠 괜찮아요."

옥토퍼스(본명 황명찬∙21)가 미소를 머금고 질문에 답한다. 예의 바르게 오갈 때 인사도 90도다. 선배가 밖에 뭔가를 달려고 옮기니 후배가 받아든다. 복도의 쓰레기통은 깔끔하게 정리돼있다.

비보이가 착해도 좋은 걸까. 브레이크(Brake)의 B를 쓰는 비보이는 1970년대 흑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슬럼가에 히스패닉이 들어오면서 생겼다. 이들은 춤을 추는 시간만은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서로 상대구역에 몰려가 온갖 동작을 보이며 기싸움을 벌였다.

길거리 배틀에서 리버스 크루는 꽉 짜여진 각본과 연습에 의해 섬세한 춤을 추는 진조 크루에게 "세트맨"이라며 비판했다는 후문이다. 리버스 크루는 음악 리듬을 타는 자유로운 스타일의 전통적 비보잉을 구사하며 역동적이고 남성적인 파워무브에 강하다.

반면, 진조 크루는 스타일에 강하다. 바닥을 기면서 리듬을 타는 감성적 팀이다. 세련되고 우아한 동작이 많다. 하루 8시간 이상 연습에 몰두한다. 팀원 대부분 중학교 시절부터 춤에 빠져 지내 다른 일을 할 틈이 없었다. 대부분 술, 담배를 잘 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래피티나 랩 등 다른 힙합문화를 즐기기 보다는 춤에만 몰두한다. 갱스터 문화에 가까운 미국 비보이 문화와 다르다. 춤의 매력에 몰입하는 한국적 비보이 문화를 반증하는 사례다.

하위문화로서 비보잉의 계급적 전통은 남아있었다. 문화사회학자들은 비보잉을 인종적, 계급적 하위계층이 존재를 드러내고 과시하며 본능적 욕구를 표출한데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진조 크루는 지난 2001년 경기 성남시 청소년수련관에 모여 춤을 추던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진조 크루 Fe(본명 오철제∙23)는 "그냥 춤이 재미있으니까 한다"면서도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좋고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을 때 좋다"고 말했다. STONY(본명 강석일∙25)씨는 "멋있어서 시작했다"며 "하다보니까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됐다"고 말했다.

"넉넉하지 않아도 불만은 없어요. 그냥 춤이 좋아요"

"돈을 벌기 위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춤을 추기 위해 돈을 버는 거에요." 진조 크루 리더인 형 스킴(본명 김헌준∙25), 동생 윙(본명 김헌우∙23)이 자주 한다는 말이다. 세계대회를 준비하는 이들의 연습실은 낮에는 댄스교습소로 쓰이는 한 무도장이다.

낮에는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연습실을 찾는 패트릭 스타(본명 조민성∙25)는 "넉넉하지 않아도 불만은 없다"며 "외국의 비보이들은 대부분 자기 직업을 따로 갖는 데, 우리나라 비보이는 그래도 대회 등을 통한 수입이 있어 그나마 춤만 출 수 있다"고 말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미치게(?) 하는 것일까. 이들은 "한계가 없고 하면 할수록 새로운 게 만들어지고, 내걸 찾아나가는 끝이 없는 세계"라며 "해야 하는 게 정해져 있는 다른 춤과 달리 스타일과 캐릭터성에 의해 달라지는 게 비보잉의 매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별히 음식을 가리지는 않는다"는 이들은 몇 달 걸러 한번씩 한의원을 단체로 방문한다. "두 달 정도는 몸을 쓰지 말라"는 등 의사의 충고를 받고 돌아온다. 하지만 대부분이 바로 다음날부터 음악에 몸을 맡기고 바닥을 뒹군다.

"언젠가 내 일도 하고 싶다"고 말하는 비보이도 있었지만 '40대에 뭘 할지 생각해봤나'라는 질문에는 대부분 뚜렷한 답을 하지 못했다. 조금 있다 "외국에는 할아버지 비보이도 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진조 크루는 팔과 다리를 뒤틀며 춤을 추다 '악'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새벽 2시, 연습실은 아직 열기로 뜨겁다.

연습실을 벗어난 도심, 밤공기가 차갑다. 넥타이를 목에 건 중년남성은 콧노래를 부르며 동료와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간다. 지하도에는 노숙자가 누워 허공에 대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른다.

걱정이 조금 가라앉는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뜨거운 뭔가가 있지 않은가.

진조 크루는…

수많은 입상경력이 있는 9년 전통의 비보이 팀이다. 다음달 중순 영국에서 있을 '유케이(UK) 비보이 챔피언십'에 한국 대표로 뽑혔다. 진조 크루는 지난 5일 인천청소년수련관에서 있었던 대표선발전에서 우승했다. 한국 대회에는 국내 22개 비보이 크루와 500여명의 비보이, 비걸이 참가했다.

'유케이(UK) 비보이 챔피언십'은 독일의 '배틀 오브 더 이어', 미국의 '프리스타일 세션', 국가를 옮기면서 개최하는 '레드불 비시원(BC ONE)' 등과 함께 세계 4대 비보이 배틀로 손꼽힌다. 우리나라는 이미 이 4개 대회를 석권한 비보이 강국이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