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자 탁석산하고 싶은 일보다 잘할 수 있는 직업에 관한 고찰 책으로 펴내

"일을 성찰하는 데 있어 우리 사회는 거의 무지한 수준입니다. 변호사인가 청소부인가만 따지거든요. 불행한 변호사보다는 행복한 청소부가 낫듯이, 어떤 직업인가보다 앞에 어떤 형용사가 붙느냐가 더 중요한데도 말이죠."

KBS 에 나오면서 세간에 얼굴이 알려진 철학자 탁석산(51)씨의 말이다. TV에 나오는 철학자 탁씨가 이번에는 직업에 관한 고찰을 책으로 펴냈다. 지난달 25일 출간한 <성적은 짧고 직업은 길다>, <준비가 알차면 직업이 즐겁다>(창비 펴냄)가 그것.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그는 왜 직업컨설팅(?)에 나서게 됐을까. 5일 서울 청계광장 인근에서 탁씨를 만나 왜 지금 일을 사유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쌀쌀해진 날씨. 청년실업 100만. 취업의 계절 풍경이 더욱 스산하다. 그러나, 절벽을 향해 뛰어드는 나그네쥐떼처럼 왜 그 일을 희망하는지는 잘 생각하지 않는 젊은이가 많다. 대부분 정년보다 20~30년은 더 생을 영위하는 은퇴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탁씨는 "성공의 기준이 뭐냐는 데 대해서는 별로 생각지 않고, 누구나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따라서 꿈꾼다"라며 "보다 근원적으로 우리에게 일이란 무엇이고, 행복은 무엇인지 사유해야 할 시점"이라고 요약했다.

"70%만 했는데도 '잘한다'? 그게 내 적성"

"역량의 70% 정도만 발휘했는데도 남들이 잘한다고 하는 게 있을 겁니다. 그게 바로 자신의 적성인 거죠."

탁씨는 전력투구해서 잘하는 일은 본인의 적성과는 맞지 않는 일이라고 여긴다. 투수가 힘의 70%만 사용해 공을 던질 때 컨트롤이 잘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서울대 미대생 김민기의 그림을 두고 "형, 내가 발로 그려도 이것보단 잘 그리겠다"고 말했던 조영남이 후에 미술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하고 싶은 일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정답이다. 그는'소망', '적성', '실현' 등의 요소를 종합적으로 점검해 모두 들어맞는다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적성'보다는 '소망'에 치중해 잘할 수 있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에만 치중하고 있어 어려움이 생긴다는 점을 지적한다.

은퇴자들에게도 '생각의 용량'을 키워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라고 권한다. 돌보는 데 적성이 있는 교사는 은퇴 후에 아파트 경비라도 돌보는 일을 해야 존경받는 직업인이 될 수 있다는 식이다. 길어진 수명에 반해 그대로인 정년연령 때문에 누구에게나 몇 번의 전직은 불가피해졌다. 이때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연결성 있게 찾는 방법은 생각의 유연성에 있는 셈이다.

"나의 시행착오에서 배워라."

"제가 정말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잖아요. 좀 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직업과 행복을 주제로 책을 쓴 그는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직업 선택에 있어 시행착오를 많이 겪은 사람이다.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자연계열에 입학했으나,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고심 끝에 자퇴를 택했다. 군대를 다녀와 고미술학을 전공하려고 다시 대입을 치렀으나, 내신 도입이라는 새로운 입시 제도가 꿈을 꺾었다. 고3 때 꼴찌였던 까닭에 가고 싶어 하던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한국외대 영어과에 입학했으나 역시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졸업은 했다. 같은 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함을 느꼈다.'

그의 책에 나와 있는 자기소개다. 탁씨는 박사학위를 딴 이후 5년여 동안 백수생활을 한 뒤 <한국의 정체성>이라는 책을 들고 세상에 나왔다. 그 때 나이는 마흔 둘쯤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기간이 버린 시간만은 아니었다.

"고독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준비를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하게 되죠. 사회생활을 안하고 혼자 있었던 긴 시간에 여러 생각을 하고 다방면의 책을 읽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내장이 된 게 좀 있을 겁니다. 서른 살쯤에 교수가 돼서 지금까지 지냈으면 제 전공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을 거에요."

"스펙보다 생각의 용량 넓혀야"

"사회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본질의 문제에 부딪히게 될 때가 있을 겁니다. 인문학은 세상과 관계없어 보이지만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에까지 근본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생각의 용량을 크게 할 수 있죠."

탁씨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취업 준비하면 떠올리는 영어성적, 학점, 고학력보다 중요한 것은 일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며 인문학이 이에 유용한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본질적 문제를 고민해 본 사람이 자신의 일을 잘 고르고, 잘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일을 통한 어려움도 지혜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영화감독을 예로 들어 봅시다. 영화작업이 잘 안되면 영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될 겁니다. 영화는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 뒤에는 이미지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거죠."

인생이 순조롭다면 일의 본질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생은 우여곡절이 많다. 이런 어려움을 헤쳐 나아가는 힘은 '생각'이다. 마지막에 자기를 믿을 수 있는 힘을 놓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다.

탁씨는 "고등학교 때 꼴찌였고 3년 내내 단행본 책만 읽었지만, 재수하면서 입시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라며 "그때 쌓은 교양과 문제의식이 나중에 창조적인 일을 하는 데도 도움을 줬죠"라고 말했다.

한국사회의 실업과 노동문제는 지난한 과제다. 대부분은 자기 탓만 한다. 누군가는 이제사회 구조의 문제를 바로 보자 한다. 그러나 철학자 탁석산은 정말 중요한 것은 직업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재정립이며, 일의 본질에 대한 스스로의 사유와 성찰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하다 실패를 하면 처음에는 남의 탓을 합니다. 두 번째 실패하면 자기반성을 하죠. 세 번 실패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럼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죠."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