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브故 피천득 시인의 외손자… 단독 앨범 발표, 리사이틀 열어

한국에서는 앙상블 디토의 멤버로 더 잘 알려진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브(Stefan Jackiw, 24).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이국적인 외모의 젊은 연주자에게 故 피천득 시인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었더라면, 익숙해지는 데에 시간이 좀 더 걸렸을지 모른다.

피천득 시인의 딸이자 보스턴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피서영 씨와 MIT 공대 물리학 교수이자 우크라이나계 폴란드인 아버지 사이에서 그는 태어났다.

리차드 용재 오닐의 천재적인 비올라 연주 뒤에 늘 그의 가족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듯, 스테판 재키브의 배경엔 외할아버지 故 피천득 시인이 존재했다.

정작 한국에서의 유명세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클래식 애호가였던 외조부에게서 받은 영향은 적지 않은 듯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선명해요. 어린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한국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머물러서 무척 가까웠거든요. 함께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영상을 보면서 체스를 두기도 했고 할아버지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읊어주시기도 했죠. 당시엔 유명한 문인인 줄도 몰랐어요. 단지 나의 친근한 할아버지셨지요."

그가 처음 서울시향과의 협연으로 한국 무대에 데뷔했던 2006년. 아흔여섯 살의 老 작가가 아끼는 손자의 무대를 찾은 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날 할아버지를 위한 앙코르곡으로 쇼팽의 녹턴 20번을 연주하던 모습은 아름다운 광경으로 남아있다.

청년이 마주한 노년의 브람스

스테판 재키브가 최근 소니 클래식 레이블에서 단독 앨범을 발표하고 리사이틀을 열었다. 첫 앨범으로 택한 레퍼토리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 2, 3번 전곡이다.

이 곡들은 말년의 브람스가 당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 전해진다. 무명 작곡가인 브람스의 열정과 가능성을 확인하고, 슈만과의 역사적인 만남을 주선한 요아힘은 브람스의 평생 은인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스테판 재키브는 2006년 봄,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한 공연에서 연주하면서 이번 앨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전곡을 관통하는 흐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브람스의 다양한 감성을 잘 나타내준다는 점이 그의 흥미를 돋웠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에서도 1번은 아주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3악장에서 브람스는 젊은 시절의 곡을 인용하는데, 아마도 그가 젊음을 그리워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제가 생각할 때, 브람스는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나이 들어간다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전체적으로 기쁨이 흐르지만 쓸쓸함, 그리움, 향수와 같은 감정이 가득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내밀하고 섬세한 대화가 인상적인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그간의 공연에서 곡에 대한 참신한 해석으로 돋보였던 스테판 재키브의 감성은 이번 앨범에서도 빛났다.

브람스 말년의 작품이지만 그는 해석에 크게 부담을 갖지는 않은 듯했다. 함께 레코딩과 리사이틀에서 연주한 피아니스트 맥스 레빈슨 역시 이번의 브람스 해석에 만족해했다.

노년의 브람스와 할아버지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에 스테판 재키브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할아버지는 옛 추억에 젖어 사는 분이 아니셨고, 늘 젊게 현재를 사는 분이셨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경험은 나의 힘

4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한 스테판 재키브는 12살에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연주하면서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2002년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 수상은 세계 클래식 유망주의 위치를 확고하게 했다.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을 마치기도 했지만 재미있게도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음악이론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심리학을 비롯해 독서, 여행, 영화 등 많은 것이 현재의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원 대신 일반 대학을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해요. 저의 음악적 영감이라고 하면, 바이올린 음악뿐만 아니라 실내악 등 폭넓게 음악을 듣는 것이죠. 다른 훌륭한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하는 것을 통해 음악적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구요. 열정적인 관객들에게도 많이 배웁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스테판 재키브는 미국 클래식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와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연주에만 쏟아오고 있다. 2007년 하버드 크림슨에서의 인터뷰에서도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오로지 뉴욕을 중심으로 전문 연주자의 길을 가는 데 대한 기대를 표하기도 했다.

뉴욕이란 도시, 연주여행, 음악과 관객과의 경험은 스테판 재키브가 색다른 프레임으로 음악에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또한 음악을 숙성하게 하는 에너지인 셈이다. 협연한 피아니스트 맥스 레빈슨은 스테판 재키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젊지만, 그의 음악은 전혀 어리지 않아요. 불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음악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가진 연주자입니다." 그는 "특히 브람스를 보면 그걸 잘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세 차례의 리사이틀을 마친 스테판 재키브는 곧 리사이틀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기다리는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