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배순훈 국립현대민술관장과천 본관, 덕수궁 미술관, 서울관 특성화… 법인화 논란 발전적으로미술관 역할과 국격의 상관관계 강조… 올해를 변화의 원년으로

한 번이라도 해외 여행을 해본 사람은 그 곳에서 하나의 공통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 나라의 박물관, 미술관 앞에 길게 늘어선 관람객 행렬을. 그리고 직접 인류 문명의 유산과 명작들을 마주했을 때 강렬하게 전해오는 감흥과 함께 슬며시 부러움이 꿈틀대는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 나라 문화의 힘, 나라의 품격(국격)이 인상지워지고 그들과 그들의 정신적, 물질적 산물에 신뢰와 호감을 갖게 된다.

그렇게 문명의 흔적들을 간직한 박물관, 미술관은 한 나라 문화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드높이는 최고·최상의 문화공간이다. 파리 루브르박물관, 런던 대영박물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등등.

한국에는 그러한 문화공간의 한 중심축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다. 1969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 미술문화의 위상을 대표하는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이다.

그러나 그 현주소는 세계 유수의 미술관(박물관)과 비교해 내용이나 규모에서 '세계적'이란 수식어를 달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무언가 도약을 위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해 2월 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을 새 수장으로 맞았다. 대학교수, 정부 관료, 기업 CEO 이력의 비(非 )미술계 출신 미술관장의 부임은 '파격'이었고,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하지만 알고보면 배순훈 관장은 미술과 인연이 꽤 깊다. 부인 신수희씨가 화가이고, 아들 정완씨는 건축가이자 설치미술가이다. 배 관장은 미국유학 시절인 1960~1970년대 백남준, 김환기, 최욱경 등 많은 화가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배 관장이 취임한지 1년 가까이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혹한이 엄습한 지난주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인 덕수궁 미술관에서 배 관장을 만났다.

장관출신인 그가 차관 아래 실장급인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직에 나선 데는 굉장한 열정과 궁리가 작용했을 터다.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하고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문화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개인이나 기업도 문화적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중요한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미술이 중추적 역할을 한다고 봤고 해보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나라에 봉사한다는 생각에서 지원했습니다."

1990년대 '탱크주의' 신드롬을 일으킨 CEO 출신인 그가 지난 1년 기업과는 다른 미술관을 경영한 소회가 궁금했다. 조직문화도 다르고, 일의 성격, 지향점도 차이가 클 터인데.

"작년은 신종플루로 박물관, 미술관이 어려웠는데 그럼에도 관람객이 전년에 비해 20% 가까이 증가했어요. 그만큼 국민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얘기죠.

경영 측면에선 미술작품을 담아낼 그릇을 만드는 것과 전시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 관장의 임무인데 작가나 평론가 같은 미술전문가보다 경영자 출신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쉬운 것은 미술관의 인사 순환제 때문에 전문성을 확보,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노하우를 갖춘 전문인력이 인사 순환, 승진 때문에 미술과 무관한 부처로 옮겨가는 것은 미술관 입장에선 큰 손실이죠."

어쩌면 배 관장에게 취임 1년이 되는 올해가 국립현대미술관 변화의 원년이 될 수도 있겠다. 그가 구상하는 미래의 국립현대미술관상(像)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 미술관이 작년 40주년인데 돌이켜보면 미술관이 설립된 이래 어려운 여건에서 성장을 해왔습니다. 향후 10년은 우리 미술계가 세계적으로 발돋움하고 미술관도 세계적으로 위상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력도 신장하고 국격도 상당히 높아진 만큼 미술관도 세계적인 위치를 가져야 하고 그런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를 변화의 원년으로 볼 수 있겠죠."

배 관장은 미래의 국립현대미술관과 관련해 '세계화'에 방점을 두었다. 세계화의 구체적인 계획이나 비전이 궁금했다.

"우선 물리적인 시설이 한 개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건설할 계획입니다. 또 콘텐트 면에서 세계적인 작품이 나와야 합니다. 과거에도 세계적인 작품이 있었는데 한국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가 많아요.

백남준은 세계미술사에 빠지지 않은 인물인데 그냥 백남준으로만 알려져 있어요. 한국 태생의, 한국에서 활동한 작가라는 것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 작업부터 시작해 콘텐트도 한국의 브랜드가 붙어야 합니다."

2009년은 국립현대미술관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계기가 마련된 해였다. 2012년 준공을 목표로 옛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건립하게 된 것. 이로써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 본관과 덕수궁 미술관, 서울관 등 3개 미술관을 운영하게 됐다.

- 국립현대미술관 3개 미술관 운영에 차이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세개의 미술관이 모두 특징이 있습니다. 과천 미술관은 우리 미술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살려나갈 겁니다. 과천은 우리 미술사를 정리하는 전시를 많이 할 겁니다.

우리나라 미술계는 60~70년대 활발한 작업을 한 대가들이 있는데 그 이후 작업하신 분들이 빠져 있어요. 그리고 젊은 작가들이 세계적 활동을 많이 하고 있고요. 그래서 전시를 포함해 한국미술에 대한 체계적으로 정립은 과천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고 덕수궁은 건물의 역사성을 살리면서 운영할 것입니다.

덕수궁 미술관은 1900년대 초 건물이어서 관람객의 안전과 편안한 감상을 위해 리모델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시 콘텐트도 강화해 단순히 우리나라 근대 작품을 전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동시대의 미술과 비교 검토해 세계화하는 전시내용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서울관은 처음부터 세계적인 미술관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전시도 세계 미술사에 획을 긋는 내용으로 할 것입니다"

- 서울관을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시설 못지 않게 전시 콘텐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작가에서, 콘텐트에서 세계성을 지향할 겁니다. 작가는 한국 작가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적인 작가도 한국과 관련된 작품을 만들면 한국작품이 아닌가 생각해요.

가령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제임스 터렐은 과거 기무사 옆에 있던 국군서울병원에서 치료받은 적이 있어요. 터렐은 기무사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자기가 꼭 작품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만약 터렐 작품이 서울관에 전시되면 그런 뒷이야기를 알고 작품을 봐야 되요.

그런 스토리가 있는 작품은 서울관을 찾지 않으면 못 봅니다. 그런 식의 작품은 세계적인 작품이라고 봐요. 백남준 전시는 올해 리버플에서 내년 독일 뒤셀돌프에서 열리는데 2013년 한국에서 활동한 여러 가지 작품활동을 부각하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세계 사람들이 보고싶어하는 전시가 될 겁니다"

- 한국만의 정체성도 세계성을 확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지난 100년을 보면 한국은 세계 역사에서 식민주의가 끝나는 지역이고 동시에 동서 냉전의 대립으로 전쟁이 벌어진 곳입니다. 세계에서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 없어요.

또 후진국에서 단시간내 경제발전과 인권신장을 이룩한 나라도 없고요. 우리나라의 역사성이 매우 중요한데 세계에서 관심이 있는 나라가 됐고 이것을 예술작품으로 보여줘야 하지않나 생각해요."

서울관이 들어설 기무사 본관은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본관 건물의 활용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건물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측은 '보존'을, 미술관의 가치에 비중을 두는 쪽은 신축 내지 리모델링을 주장한다. 배 관장은 조심스럽게 후자에 무게를 둔다.

"서울관 건립은 견해차가 있는 만큼 국민들의 컨센서스(합의)를 모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기무사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00년대 초 건물이 없으니 보존하자는 취지였는데 신축하면서 본래 건물의 흔적이 거의 사라졌어요.

전문가들도 미학적, 건축학적 관점에서 가치가 높은 건물은 아니라는 지적이 있고요. 그러나 역사적 가치는 상당하므로 그 가치를 어떻게 보존할 것이냐를 놓고 여러 방법이 강구되고 있는데 그래서 공모에 전문가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과 관련, 올해는 특수법인화 문제가 본격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른 미술관의 상업화와 직원들의 신분 변동에 대한 우려 등으로 내부에서는 여전히 반대 목소리가 크지만, 이미 문화체육관광부는 특수법인화 시안을 마련하는 등 법인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의 특수법인화에 대한 입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은 10년, 20년을 보고 변화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현재 미술관에서 일하는 직원의 절반이 행정공무원이기 때문에 2년씩 순환보직을 합니다. 업무에 익숙할만하면 다른데로 가요.

박물관, 미술관이 아닌 전혀 성격이 다른 곳으로 가면 전문가가 될 수 없어요. 미술은 미술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가 되야 행정을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공무원 인사체계 갖고는 미술관 운영이 어렵습니다. 새로 인사체계가 법인화의 중요한 요소될 겁니다."

- 법인화 될 경우 미술관 본연의 공공성이 훼손되고 상업적 전시가 많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높은데

"국립현대미술관은 공공서비스하는 기관이지 체산을 맞추는 영리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예산 문제는 내부의 인원을 어떻게 구성하건 공공서비스 목적에 맞는 예산이 배정되야 하므로 예산은 법인화 하건 안하건 큰 변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입장료 수입이 전체 예산의 3% 정도인데 법인화한다고 해도 예산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작아 전체 운영에 중요 부분이 아닙니다. 법인화 문제엔 내용을 잘 모르는 분들의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내 대표 미술관으로서 자체 경쟁력을 갖추는 것과 함께 전체 공공미술관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잭임도 있다고 보는데

"특히 전시 기획하는 사람들이 중요한데 미술품을 많이 봐야 합니다. 작품을 핸들링하고 기술 개발도 해야 되고요. 지난 연말엔 한 팀은 유럽미술관을, 다른 팀은 미국 미술관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우리나라엔 120여 개의 공공미술관이 있는데 우리 미술관에서 그곳 사람들을 훈련시켜 노하우를 전하고 미술품 대여를 활발하게 해 전체 공공 미술관을 업그레이드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배순훈 관장은 인터뷰 중 줄곧 국제적 안목에서 미술관의 역할과 국격(國格)의 상관성을 강조했다. 미술이 한국이라는 브랜드 가치와 품격을 높이는 중요한 매개라는 설명으로 올해 변화의 큰 걸음을 내딛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행보에 관심과 기대가 모아진다.

배순훈 관장은…

1943년 서울 생. 경기고,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대학원에서 공학박사 학위 취득.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과 교수를 거쳐 대우엔지니어링 부사장, 대우조선 부사장, 대우전자 사장 및 회장, 대우자동차부품 대표이사 사장, 대우전자 사장 및 회장, 리눅스원 회장, 미래온라인 대표이사 회장 등 역임. 정보통신부 장관(1998년 3~12월), 한국과학기술원 부총장 겸 경영대학원장(2006~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취임(2009년 2월).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