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소설가 이순원신간 갑신정변부터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까지 담아집필하며 강원도 트레킹 코스 '바우길' 개발 병행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은 서울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곳이다.

청와대와 관공서가 있고, 좀 걸어가다 보면 일본 대사관과 경복궁이 있다. 특히 1번 출구와 6번 출구는 서울의 근현대가 맞물리는 공간이다.

1번 출구를 택하면 미술관과 카페, 맛집이 밀집한 삼청동이 나오고, 6번 출구로 가면 외국인으로 북적이는 인사동이 나온다. 삼청동은 가로수길과는 또 다른 운치와 정갈한 음식 때문에 주말마다 젊은 여성들로 붐빈다.

인사동 6번 출구로 나와 크라운베이커리 가게를 끼고 가나아트센터까지 가면 골목마다 전통차와 한정식을 파는 집이 줄줄이 나온다. 어느 가게를 들어가도 문인 한두 명은 마주친다.

이 골목의 한 쪽, '귀천'에서 소설가 이순원 씨를 기다렸다. 근현대가 맞물리는 안국역은 "생물학적 나이는 쉰이지만, 300년 시간을 통과해서 살아온 것 같다"는 작가와 닮아 있다.

고향은 내 문학의 화수분

"제가 자란 곳이 아직까지 촌장이 있는 마을이에요. 마을 사람들이 새해 첫날 합동으로 세배를 하고 430년 이어온 대동기가 있어요. 집에 전깃불이 처음 들어온 게 중학생 때인가, 고등학생 때인가…?"

25년간 활동한 그의 작품은 소재와 이야기는 물론 문체와 구성도 전부 다른데, 그 비결을 묻는 질문에 작가는 고향 이야기부터 꺼냈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와 같은,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작품부터 <수색, 어머니 가슴 속으로 흐르는 무늬>와 같은 토속적인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 왔다.

몇 해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데, 이미 문청(文靑)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강연이 됐다. '이순원 사단'이라 불릴 정도로 이 강연을 통해 등단한 젊은 작가들이 많다.

"시골마을에 사니까 6.25를 겪지 않아도 그 상흔을 그대로 보잖아요. 또 경영대를 가서 사회과학 공부하고 금융기관에서 10년 동안 일했고. 일반 작가들이 겪어온 것보다 폭 넓게 경험한 게 도움이 됐겠죠."

그의 고향친구는 우스갯소리로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게 다 소설거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순원의 소설은 다 어머니가 써주고(수색 그 물빛 무늬), 아버지가 써주고(아들과 함께 걷는 길), 할아버지가 써주고(망배), 친척이 써주고(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말을 찾아서), 초등학교 동창들이 써주고(첫사랑, 강릉가는 옛길), 고등학교 동창들이 써주고(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 동네 고향사람들이 써주고(순수), 정말 자기가 쓴 건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와 <은비령>, <19세> 등 몇 개밖에 없더라고 말이다.

작가의 경험이 소설의 화수분이 된다면, 문체와 구성은 어떻게 빚어낼까. 작가는 소설 쓰기를 건축에 빗대 설명했는데 이를테면 아파트 짓는 공법과 한옥, 초가집 짓는 공법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그 작품의 향기를 낼 수 있게 하는 문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작가들이 자기 문체를 가지려고 하는데, 문체는 사실 문장에 대한 자신감이거든요. 젊은 시절 신춘문예에 10년 떨어지는 동안 문장 수련이 내 안에서 이뤄진 게 아닐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소의 눈을 통해서 본 인간 이야기

작가는 <은비령>과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를 썼을 때를 비교해서 설명했다. <은비령>과 같은 작품은 연애를 다루기 때문에 멜랑콜리한 면이 있으면서도 유장한 맛을 주려고 했다고. 반면 추리소설인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는 속도감 있게 단문으로 처리했다.

신간 <워낭>은 "수사를 가능한 줄인 토속적이고 담백한 문체"로 쓴 작품이라고. 장편 <워낭>은 1884년 갑신정변부터 2008년 광화문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현장까지 125년 한국 근현대사를 소의 눈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강원도 깊은 시골, 우추리 차무집 외양간에 어미와 생이별한 그릿소가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예전 소가 없는 집에서 송아지를 대신 키워주고 송아지가 자라 새끼를 낳으면 소는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고 새끼를 받아 키웠는데, 그릿소는 이때 대신 키워주던 송아지를 일컫는 말이다.

그릿소는 차무집 외양간에 흰별을 남기고 떠나니, 그때부터 그릿소-희별소-미륵소-버들소-화둥불소-흥걸소-외뿔소-콩죽소-무명소-검은눈소-우라리소-반제기소로 이어지는 차무집 외양간 12대 내력이 펼쳐진다. 여기에 소를 내 자식처럼 아끼며 살아가는 차무집 4대 내력도 그려진다.

"소가 인간과 생업을 함께 하다가, 고기만 내놓는 가축으로 변하는 동안의 세상의 이야기죠. 소가 보는 사람과 세상, 소의 이야기죠. 예를 들자면 소설에서 일제치하에서 독립군 같은 역할을 하는 소도 있고, 6.25때 북으로 건너가면서 이산하게 되는 소도 있죠. 기계농사가 소개된 이후 일자리를 잃고 고기로 전락한 소도 나오잖아요. 산업화 이후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거죠."

구체적인 배경과 화자는 그의 고향에서 따왔다. 화자로 등장하는 검은눈소는 작가가 어릴 적 고향집에서 직접 기른 소이고, 우추리는 작가의 고향마을 이름이다.

소설에서 차무집 12대 소의 가계도는 기계농업으로 세상이 바뀌며 대가 끊기는데, 작가의 고향집 역시 이제 더 이상 소를 기르지 않는다고 한다.

"석기 시대부터 1만 년 가까이 생업을 겸업한 가축인데 이제 식탁에서 만나잖아요. 600~700kg 소가 0.4평 외양간에서 사육되죠. 농경시절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식탁에서 만나더라도 건강하게 만나자는 거죠."

사고의 인내력을 배우다

지난 해 <워낭>을 쓰는 동안, 그는 한 가지 일에 더 매달렸다. 고향 강원도의 '트레킹 코스'를 개발하는 일. '바우길'이라 불리는 강원도 트레킹 코스는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며 명소가 되고 있다.

바우길이란 이름은 이순원 작가가 붙인 이름. 강원도 말로 바위를 일컫는 '바우'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의지가 강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또 바빌론 신화에 손으로 한번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죽을병을 낫게 하는 건강의 여신을 일컫는 말(Bau)이기도 하다.

지난 해 작가는 <워낭> 집필과 바우길 개척을 함께 했는데,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일산 자택에서 작품을 쓰고 주말에는 산악인 이기호 씨와 함께 바우길을 개척했다.

지난 해 5월 시작으로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주말마다 강원도를 찾았다. <워낭>의 배경이기도 한 이곳을 걸으며 작품의 다음 부분을 구상했다고.

이렇게 대관령에서 경포대와 정동진으로 이어지는 150km, 10개 코스가 만들어졌다. 바우길은 1개 구간이 끝나면 다음 구간으로 이어지는 골프 코스와 비슷하다. 바우길 이야기가 나오자 작가의 말이 빨라진다.

"150km 중에서 130km가 비포장도로예요. 그 중 70% 이상이 숲길과 그늘길이고요. 대부분이 금강소나무 숲이거든요. 경복궁 복원 때 쓴 소나무를 베어낸 길이죠. 숲길이 바다로도 이어져요. 길과 나무에도 정령이 있다는데, 소나무가 심신을 치유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코스를 개척하면서 '심스테파노 길'을 찾아내기도 했다. 심스테파노는 강원도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교난(1866년)때 순교한 천주학자.

강원도 원주와 횡성 동쪽에는 천주교 성지가 없었지만, 이번 트레킹 코스를 개척하면서 심스테파노 성직자가 살다 잡혀간 마을을 찾아낸 것이다.

작가는 강릉 경포대에서 그곳에 이르는 길에 '심스테파노 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지난 해 이기호 씨와 함께 걷기 시작한 바우길은 이제 한 번에 수십 명씩 걷는 길이 됐다고.

"길을 걷는 건 '사고의 인내력'을 기르는 것 같아요. 평소 일상생활에서 한 가지 생각을 오래 할 수 없잖아요. 바우길 개척하면서 하루에 적게는 4시간 많게는 7시간을 걷거든요. 걷는 동안 한 가지 화두를 붙잡을 수 있어요."

작가는 "지난 여름과 가을 내가 소처럼 걸었던 길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작가는 바우길을 테마로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baugil)를 만들었고, 이 길을 걸으며 얻은 사유와 고향의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엮을 생각이다.

정부 지원이나 지방자치단체 위촉이 아니라 '민간 봉사활동'과 같은 일을 스스로 반 년 이상 해 왔다. 어린 시절,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던 고향이 이제 그의 삶의 전부이자 문학의 정령이 된 셈이다.

"작가로서 제게 영광된 길은 '은비령'이에요. 작품에서 만든 가상의 지명이 실제 지명이 됐으니 그보다 영광된 게 어디 있겠어요? 바우길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죠."

이순원

■ 1958년 강원도 강릉 출생

■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소>당선

■ 1996년 <수색, 어머니 가슴 속으로 흐르는 무늬>로 동인문학상수상

■ 1997년 <은비령>으로 현대문학상 수상.

■ 2000년 <아비의 잠>으로 이효석문학상, <그대 정동진에 가면>으로 한무숙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남촌문학상 수상

■ 창작집 <그 여름의 꽃게>, <얼굴>, <말을 찾아서>,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첫눈>

■ 장편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19세>, <나무> 등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