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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19세기 조선 이해의 관문"

고문헌연구가 박철상 '포럼 그림과 책'
20년 넘게 추사 연구… "200년전 연행은 조선학예의 혁명 가져와"
추사체와 세한도는 단순한 글씨, 그림 아니라 조선문화의 정수
올해는 조선의 대학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 ~1856) 의 연행(燕行) 200주년이 되는 해다. 추사는 1809년 10월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부친을 따라 이듬해 초까지 수도 연경(燕京, 현재 베이징)에 머물렀는데, 그 2개월의 연행은 이후 추사가 19세기 조선의 학문과 예술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일반에게 추사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지 않다. '추사가 누구인가' 물으면 '추사체(秋史體)'나 '세한도(歲寒圖)'를 떠올리는 정도다. 이는 추사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주로 '서화(書畵)'에 집중돼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추사와 관련한 수많은 전시 역시 그 중심에는 서화만 있었다.

그렇다고 추사의 서화가 온전히 전달된 것도 아니다. 추사체에 회화, 문자, 문학의 세계가 어우러져 있는 것이나 세한도가 19세기 조선의 학문과 예술의 정수라는 사실 등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추사를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올 초부터 마련됐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집대성한 <세한도>(문학동네) 라는 책과, 서울 인사동 화봉갤러리에서 3월 1일까지 열리는 '추사를 보는 열 개의 눈' 전시이다.

추사에 대한 저서와 전시는 고문헌 연구가 박철상(44) 씨에 의해 전개됐다. 박씨는 20년 넘게 추사를 탐구하며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발표해 온 추사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다.

그의 본업은 은행원(광주은행 외환영업부 부부장)이지만 독학으로 고문헌 연구에서 일가를 이뤘다. 한학자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옛 서적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고문헌 연구에 필요한 역사학, 한문학, 고미술학, 서예사, 국문학, 서지학 등을 공부한 결과다.

박씨는 장서인(藏書印)에 대한 일련의 연구 발표를 통해 학계에 장서인의 중요성을 고취시켰고, 2002년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완당평전> 비평을 통해 200여군데의 오류를 지적해 집중 조명받기도 했다.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학예일치의 경지> 특별전 자문위원을 지냈고, 그림과 책 연구자들의 모임인 '포럼 그림과 책' 공동대표로 있다.

박씨는 국학 연구자 모임인 '문헌과 해석' 의 오랜 멤버로 매주 금요일 저녁 세미나 참석차 서울로 향한다. 매월 넷째주 토요일에는 '포럼 그림과 책' 행사를 주관한다.

그는 지난 1월부터 주말마다 자신이 기획한 '추사를 보는 열 개의 눈' 전시장에 나간다. 그곳에서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 설명과 함께 추사작품을 무료감정(매주 토요일)해주고 있다.

지난 주말 화봉갤러리에서 박씨를 만나 전시와 책 <세한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그는 올해 추사의 책을 내고 전시를 연 이유를 들면서 말문을 열었다.

"올해가 추사의 연행(燕行) 200주년이 되는 해인데 추사의 연행은 2개월에 불과했지만 그것은추사 자신은 물론 조선 학예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죠. 추사의 책과 전시를 올해에 맞춘 이유입니다"

그는 19세기 조선에서 추사가 만들어진 주요 배경으로 '연행' 과 '북학(北學)'을 꼽았다. 추사가 연행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결정짓는 두 사람의 스승 옹방강(翁方綱·1733~1818)과 완원(阮元·1764~1849)을 만나 학문에 대한 안목을 넓혔고 연행 이후에도 학문 교유가 이어지면서 북학(北學)의 종장(宗匠)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전시장을 돌면서 추사와 대화를 하듯 다각도로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박씨의 해박함에 감탄하면서 이것이 독학으로 이룬 것이라니, 추사와의 인연이 궁금했다.

"초등학교 때 한학자이신 부친의 글씨에 익숙해 있던 터에 추사의 글씨는 무척이나 생소해 관심을 가졌죠. 추사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 최완수 선생(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의 '추사집'을 접하면서였고 대학에 들어가 간송미술관 책과 추사 관련 논문을 거의 섭렵했습니다. 그러다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1879~1948)의 추사 연구논문을 번역한 <추사 김정희 또다른 얼굴>을 보고 그 방대하고 치밀한 고증에 충격을 받았죠. 최완수 선생이나 후지츠카 학문의 저력이 자료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추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20년이 넘었습니다."

  • 추사 김정희가 쓴 '귀로재' 현판
그가 수집한 문헌 중엔 그동안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추사의 금석학 연구인 <해동비고(海東碑攷)>, 문헌학 저작인 <해동예문고(海東藝文考)>등 희귀본이 적지 않다. 추사가 스승 옹방강의 한시와 시론들을 추려 해설한 <복초재적구(復初齋摘句)>는 세한도가 만들어진 배경을 밝혀주는 문헌이다. 또 추사의 저술로 가장 먼저 간행된 <시암녹정두소릉칠언절구(詩盦錄定杜少陵七言絶句)는 두보(杜甫)의 7언절구 100수를 직접 뽑아 출판한 시선집으로 그가 발굴해 소개했다.

20년 넘게 추사와 마주한 그에게 추사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추사는 보편적 시각과 사고를 가진 세계인으로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물입니다. 당시 선비들이 과거 공부에 힘을 기울일 때 추사는 청나라의 선진 지식과 문물을 이해하고 체계화하는 데 정열을 쏟았죠. 그리고 '우리 것'으로 창조해 다시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추사는 그러한 노력을 죽는 날까지 계속했는데 다산(茶山, 정약용)은 그렇게 못했고, 이전의 퇴계 이황도 그랬습니다."

그는 추사를 19세기 조선 학예의 관문이자 19세기를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말한다. 추사를 통하지 않고는 19세기 조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추사의 학문은 서화, 금석학, 시론, 감상학, 경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고 각 분야에서 시대의 획을 긋는 업적들을 남겼습니다. 추사가 국내 학문을 섭렵하고 청나라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독창적인 자기 세계, 조선의 문화를 창조한 결과죠."

  • 해동비고
그는 추사의 '북학(北學)'을 그 예로 들었다. 청나라의 학문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직접 그들과 교유하면서 그것을 종합해 '북학'을 정립, 19세기 조선 학예의 흐름을 바꿔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래 북학을 실학의 연장 내지 실학의 한 부류 정도로 여기는 해석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북학과 실학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실용학문, 실사구시를 추구한 점이 외견상 유사할지 모르나 내용은 다릅니다. 무엇보다 청나라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있어요. 실학파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를 복수의 대상으로 보고 적대적·수동적으로 대했습니다. 청나라를 무시하고 그곳 학자들을 만나려 하지 않았죠. 반계(유형원)가 그렇고 성호(이익), 다산(정약용)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북학파는 청나라에 대한 인식을 달리해 우호적·적극적 관계로 발견시켜 나갔죠.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추사는 그러한 북학파의 맥을 이어 나중엔 북학의 종장이 됐습니다."

그는 추사의 대표적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추사체'나 '세한도'가 그러한 북학의 산물이라고 한다. 추사체나 세한도가 단순한 글씨, 그림이 아니라 추사의 학예가 종합된, 19세기 조선 문화의 정수라는 것이다.

"추사는 연행을 다녀온 뒤 붓을 잡는 법, 먹을 사용하는 법, 글씨를 감상하는 법 등 글씨쓰기에 관한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힙니다. 당대를 대표하는 왕희지, 구양순, 소동파 등의 글씨에서부터 옹방강의 글씨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모든 서법을 완전히 흡수하고 스스로 변화를 거듭한 끝에 나온 것이 추사체입니다."

  • '추사를 보는 열 개의 눈' 전시를 설명하는 박철상 씨
그는 추사의 글씨는 평생을 두고 진화했기 때문에 추사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계속 진화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추사체'의 이해가 힘든 이유란다.

그는 '세한도'에 대해 더 의미를 부여했다. 세한도는 1844년 제주에 유배 중이던 추사가 청나라 서적 등을 잊지 않고 보내준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1803~1865)의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 그려준 것이다.

박씨는 세한도 그림의 원형이 송나라 대문인 소동파(蘇東坡·1036~1101)의 겨울 소나무 그림 '언송도'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추사가 1809년 연행에서 옹방강의 거대한 서재에 들렀다가 본 '언송도' 관련 시가 창작의 모티프가 됐다는 사실을 고증해낸 것이다.

"추사는 옹방강을 만난 지 33년이 지나 세한도를 그렸는데 그러기까지 쌓아온 학문과 예술의 모든 것을 그림에 쏟아 넣었죠. 19세기 조선 문화의 정수가 세한도에 녹아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추사가 19세기 조선 문화의 중심에 서게 된 데는 스스로의 역량과 함께 신흥지식인으로 성장한 역관(譯官)과 여항인(閭巷人·중인 출신의 문예인) 들과의 막역한 관계도 크게 작용했다.

"추사는 역관과 여항 지식인들의 '스승' 이자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지속적으로 수용하면서 19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끌 수 있었죠."

그가 드물게 여항인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나 전시에서 역관과 여항인 관련 자료를 독립된 섹션으로 구분한 것은 조선 후기 문화에서 그들의 비중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추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크게 '추사가 만들어진 배경'과 '추사가 이룩한 업적' 2개 부분으로 나뉘었다. 추사가 탄생한 배경으론 연행(燕行)을 통한 북학(北學), 왕실과 연결된 경화세족(京華世族)의 가계(家系), 청나라 문인 및 북학파와의 교유(交遊), 전문 지식 집단인 역관(譯官)과 여항인(閭巷人) 등을 꼽았다. 추사가 이룩한 업적은 저술(著術), 인장(印章), 서법(書法), 금석학(金石學), 세한도(歲寒圖) 등 5개 주제로 구성됐다.

전시장의 마지막을 장식한 '세한도(영인본)' 앞에서 박철상 씨는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고 되뇌었다. 그림이기 이전에 19세기 조선 학술과 문화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추사가 '세한도' 를 완성하는 과정은 우리가 외래문화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한 본보기라고 강조했다. 외래문화의 수용을 통해 새롭게 창조한 우리 문화가 그 보편적 가치를 확보해 나가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올 상반기 추사가 세한도를 그리듯 19세기를 특징짓는 학문이자 추사를 추사답게 한 금석학(金石學) 연구서를 펴낸다. 청말(淸末)의 서지학자 섭덕휘(葉德輝)의 <서림청화(書林淸話)> 번역서도 낼 예정이다.

헤어질 무렵 그는 자신의 <세한도>에 '장무상망(長毋相忘)'이란 글을 적어 건넸다.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세한도의 오른쪽 한켠 희미한 붉은 낙관의 글자라고 한다. 찬찬히 뜻을 헤아리니 추사가 후세에 전하는 경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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