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이 1세대 이우재국내 최초 힙합 이론서 펴내

거리, 해변, 들판, 무대‥ 그들은 도무지 빠지는 곳이 없다. 자신들을 원하는 곳이면 어떤 곳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기꺼이 땅과 씨름한다. 생동하는 젊음, 인간의 '살아있음'은 비보이들의 탄탄하고 날렵한 근육과 현란한 동작에서 매 순간 입증된다. 관객은 환호보다 육체의 가용 영역을 벗어난 '묘기'에 감탄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은 잊혀진다. 남은 건 각종 부상과 극히 적은 공연비뿐. 그나마 활로가 된 공연들은 최근 저작권을 둘러싸고 소송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 와중에 상처받는 건 또 '열심히 춤춘 죄'밖에 없었던 비보이들이다. 80년대 태동한 이후 지금까지도 매번 '열악한 환경' 운운하는 말로밖에 풀어낼 수 없는 한국 힙합의 현실이다.

비보잉, 통칭 힙합춤이 30년 가까이 이런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데는 (지겹지만) 역시 인식 문제가 있다. 온갖 춤을 포용하고 있는 현대춤(컨템포러리 댄스)도 힙합을 재해석해 인정받지만, 힙합 자체는 여전히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1세대 비보이이자 현대무용가인 이우재의 고민과 도전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그 자신을 포함해 스타 비보이들은 종종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힙합춤의 저변이 더 넓어지고 처우가 좋아진 것은 아니다. 춤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힙합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작업이 필요했다.

바꾸기 위해선 더 많이 알아야 했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2002년, 축구가 이후 대한민국을 바꾸어놓았듯, 그의 춤 인생도 바뀌었다. 서울예대에 들어가 현대춤을 시작한 그는 공부를 계속해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지금은 박사 과정까지 밟고 있다.

'박사 비보이' 이우재의 최대 관심은 여전히 '힙합의 제자리 찾기'다. 현대춤의 문화적 대중성과 힙합춤의 경향을 연구했던 석사 논문은 '예술로서의 힙합'을 조명하기 위한 예비작업이었던 셈이다. '예술'이라는 말이 남용되는 시대의 그 흔한 예술이 아니라 제도의 권위가 인정하는 바로 그 '예술'의 지위다.

혼자서는 결코 쉽지 않을 '힙합예술'의 선언에 보수적이고 공고한 예술춤계 혹은 대중이 귀를 기울여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의 지위에 걸맞은 힙합예술론, 힙합미학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공부하는 비보이, 이우재가 쓴 <힙합, 새로운 예술의 탄생>은 새로운 힙합의 작은 시작이지만, 누구도 하지 않았던(못했던) 작업이기에 이후 나올 모든 힙합이론의 의미있는 토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 자신을 비롯해 역사 속 무용가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니체가 언급되던데요. 이유가 뭘까요

저는 새로운 가치를 주장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니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니진스키나 덩컨도 그래서 니체에 열광했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니체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라 댄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춤추듯 글쓰는 댄서.

무용예술을 아폴론적인 것, 힙합춤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해석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춤을 계속 추다가 그리스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요. 아폴론은 제도, 체계, 이성적인 반면, 디오니소스는 본능, 광기, 열광, 몰아의 경지 같은 걸로 표현되잖아요. 이런 특성이 현대춤과 힙합춤의 특성에 그대로 적용되더라구요. 지금 현대춤이 그런 것 같아요. 그 탄생(모던댄스)은 디오니소스적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형식화되어 있거든요. 일례로 현재 학교별 스타일이라는 게 존재할 정도니까요. 지금 힙합춤이 현대춤과 만나면서 제도권에 포용되는 작업도 계속 이루어지는데, 그렇다고 힙합 본래의 디오니소스적인 성격이 퇴색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사도라 덩컨과 바슬라프 니진스키를 '힙합의 시조'라고 한 부분은 당시 모던댄스의 정신을 힙합정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니진스키의 경우는 동작 면에서도 힙합과 닮은 점이 있었어요. 미하일 포킨의 <세헤라자드> 출연분에서는 기존의 발레 테크닉을 완전히 무시한 현대적 동작들이 많이 나온다고 기록돼 있어요. 특히 브레이크 댄스의 헤드스핀과 유사한 동작들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고 나와있죠. <목신의 오후>에서는 힙합춤의 '킹텃 스타일(King tut style)'과 흡사한 장면도 나와요. 덩컨의 경우엔 그의 춤을 '프리 무브'라고 불렀는데 이건 힙합춤을 가볍게 부르는 말이거든요. 결국 정신적인 면과 동작적인 면에서 두 사람의 자유로움과 파격성은 오늘날의 힙합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힙합춤과 무용을 다 접하며 모두 관여하고 있는 지금, 양쪽의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나요

무용의 경우는 너무 갇혀있다는 겁니다. 예술 본래의 정신에 걸맞지 않게 너무 형식에 함몰돼 있는 것 같아요. 힙합은 너무 중구난방이라는 점이죠. 정립이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게 문제에요. 체계가 안 잡혀 있으니 교육도 안 될 수밖에 없구요. 춤 부분은 그나마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가장 큰 문제가 팀이 유명해져도 자본이 달라붙어서 단물만 빨아먹고 나면 다시 빈털터리가 되는 거거든요. 이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건 이런 점 때문이에요. 춤을 계속 추면서 이론도 병행해야 새로운 힙합도 가능해질 것 같아요.

공연예술로서의 힙합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는 5월 19, 20일에 <힙합의 진화>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발레와 비보잉, 하루는 현대춤과 팝핀으로 구성해 힙합예술의 아우라를 표현해볼 생각입니다. '잘된 조화는 아름답다'는 말도 있듯이 유머를 내세운 진지함으로, 그러면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공연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용계에서는 힙합춤에서 '무용적 동작'이 있을 때에만 예술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번 공연은 힙합춤이 그 자체로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국내 최초의 힙합 이론서를 내놨습니다. 본격적인 '힙합예술'을 위한 다음 단계는 뭔가요

이번 책은 힙합을 다소 주관적이고 넓게 다룬 면이 있어요. 다른 분들이 이걸 읽고 당연히 더 비판해서 좋은 생각들이 계속 나와야겠죠. 저도 미흡한 부분을 계속 보완해서 더 좋은 글을 써야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힙합에 대해서 다양하게, 함께 썼으면 좋겠어요. 지금 관심이 있는 건 힙합을 주제로 한 수필과 소설이에요. 언젠가는 극 대본도 쓰려고 해요. 글쓰는 건 참 재미있어요. 마치 춤추는 것처럼.



송준호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