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호흡충돌 모티프… 4년 반만에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출간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녀가 그리는 인물이 대체로 세상의 온갖 허물을 모아 앓는 자라서. 그럼에도 그의 소설을 읽고 또 읽는 건 그 이채로운 말이 빚어내는 파동 때문이다.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자신만의 스타일과 상상력, 주제의식으로 그윽하고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의 소설에 숨은 마니아가 많은 이유다.

중층적인 의미를 담은 그의 작품 중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는 영화로 만들어졌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올해 선댄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영화는 물론 그 말결의 파동을 전하지는 못한다.

영화는 말보다 영상으로 울림을 전하는 매체다. 그의 작품을 오롯이 대하기 위해서는 소설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작가 한강이 4년 반 만에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를 냈다.

상처의 미학

1994년에 등단한 작가는 그동안 3권의 장편과 2권의 단편집을 냈다. 소설을 쓰기 전 시로 먼저 등단했다. 등단 초기부터 소설가 한승원 씨의 딸이란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붙었지만, 이제 젊은 독자들은 한강의 소설을 통해 그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된다.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등 그의 소설에 한 번 맛을 들인 독자들은 보통 작품을 두세 번 다시 읽는다. 작품이 가진 중층적인 의미 때문이다. 소설은 미술과 음악, 과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뼈대를 이룬다. 단순한 이미지 차용이 아니라 예술이나 과학이 가진 특성 자체가 인물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주제의식을 이끄는 키워드가 된다.

그 몇 권의 소설을 관통하는 말은 '상처'다. 대부분 소설이 인간의 상처를 다루며 그 상처의 본질을 찾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작가 한강은 잠재된 상처가 현실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삶을 바꾸게 되는지를 살핀다. 이 상처가 어떻게 예술과 버무려지는가. 이건 읽은 자 만이 공감할 수 있다. 각 소설마다 펼쳐지는 사연이 다르거니와 그 과정 역시 제각각이니까.

작가는 "제각기 다른 주제의식을 가지고 소설들을 썼는데, 상처라는 말이 너무 넓어서 그리로 다 수렴되는 것은 아닌지, 조금은 걱정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분명하지만 에두른 말은 소설을 닮았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나 <그대의 차가운 손>의 L에게 써도 상처받지 않을 말투다. 조용하고 느린 음성은 침울하지 않다. 이 역시 소설과 닮았다.

제 작품이 소중하지 않을 작가는 없지만, 이 작가는 그 중에서도 집요하다. 쓴 걸 뒤집어 또 쓰고 뒤집어서 또 쓴다. 대부분 이렇게 작품을 발표하지만 이번 장편은 더 지독했다. 인터뷰 때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장면 쓰고 나서는 할 만큼 했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람이 분다, 가라

신간 <바람이 분다, 가라>는 1600매에 이르는 긴 소설. 작품의 시작은 작가가 'breath fighting'이란 의학용어를 우연히 듣게 되면서였다. 이 말은 의식불명의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쓰고 있다가 갑자기 스스로 숨을 쉬면서 벌어지는 충돌을 일컫는다.

호흡기는 숨을 넣어주는데 사람을 뱉고, 호흡기는 숨을 빨아들이는데 사람은 들이마신다. 작가는 "호흡기를 쓴 채 숨과 싸우는 여자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여자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쓰게 될 소설 자체도 그 숨들의 부딪침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정희와 서인주는 어릴 때부터 친구 사이다. 인주는 병약한 외삼촌과 함께 살았다. 우주의 비밀과 과학적 탐문에 관심이 많던 삼촌은 생태적인 원리에 입각한 화법(먹그림)을 구사하는 화가였다. 인주의 집을 드나들던 정희는 삼촌과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삼촌은 죽게 되고 인주는 삼촌의 화법을 따라 그림을 그린다.

화단의 관심을 끌던 인주는 눈이 많이 오는 겨울, 미시령을 넘다가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만다. 미술평론가 강석원은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고 그녀를 신화로 만드는 작업에 돌입한다. 그는 전 재산을 털어 인주의 그림을 사 모으고 평전을 낸다. 인주가 자살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정희는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몸부림친다.

또 다른 평전을 쓰기 시작한 것. 강석원은 이정희의 집에 침입해 그녀를 테러하고 방화를 저지른다. 자신의 신화와 어긋나는 인주의 모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다. 정희는 가까스로 문을 밀고 나가 구급차 안에서 인공호흡기를 쓰고 호흡 충돌 상태(breath fighting)에 빠진다. 눈 덮인 미시령을 넘다 호흡 충돌 상태에 빠진 인주처럼.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호흡'이다. 여기 두 관계가 있다. 숨 쉴 수 있는 관계와 숨 쉴 수 없는 관계. 삼촌이 숨 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강석원은 후자의 인물이다. 문제는 죽은 삼촌이 과거의 관계라면 강석원은 현재진행형인 관계라는 것. 때문에 정희는 '호흡 충돌의 상태'가 되는 것. 그럼에도 정희는 '생명이란 가냘픈 틈'(385페이지)을 발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생의 의지는 그의 이전 소설 <채식주의자>와 변별지점이다.

작가는 말했다. "인물의 감정흐름이나 관계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개 방식과 문체까지 계속 충돌하고 부서지는 그러나 어떻게든 숨 쉬며 나아가려 애쓰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때문에 이번 소설은 기존 그의 작품과 다르다. 줄거리를 시간대로 소개했지만, 사실 이 작품은 이정희와 강석원이 만나는 지점부터 시작한다.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등장인물의 기억과 의식은 뒤엉켜 있다. 작가는 "그때 절박했던 문제는 이제까지 써왔던 소설의 방식을 부수면서, 동시에 소설의 육체를 가진 작품을 써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 틈(정통 서사의 틀을 벗어나면서도 형식을 갖춘 소설)이 굉장히 좁은데 정통 서사를 배격하는 소설을 쓰겠다는 각오나 의지를 갖고 쓴 게 아니라 몸이 견디지 못해서 한 문장씩 한 문장 씩 고통스럽게 쓴 거예요. 그 마음이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죠. 다른 사람이 보면 '다시 전통 서사로 돌아왔네'라고 생각하더라도 저는 (앞으로도) 그 틈을 따라서 쓰는 거거든요."

작가는 대화 중간 "잘 읽히느냐?"고 물어보았다. 이렇게 쓴 소설을 읽는 이도 편하게만 읽지는 못할 것이므로. 총 10부 중에서 1,2,3장은 빠르게 읽혔고 4,5,6,7장은 느리게, 정통 서사방식으로 쓴 8장은 빨리, 다시 9부는 천천히, 10부는 격렬하게 읽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소설을 쓰며 음악 리듬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독자의 호흡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이다. 중층적인 이 작품을 독자가 어떻게 읽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작가는 "그 자체가 생명을 가진 소설이었으면 한다"고 대답했다.

"어떤 방향으로 읽어줬으면 좋겠다기보다, 제 손을 떠났으니까 생명을 가져서 독자와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작가는 이제 한 여자와 한 남자만이 등장하는 고요한 이야기를 쓸 생각이다. <바람이 분다, 가라>를 2년가량 쓰고 힘들어 쉬었던 1년 동안 구상했던 작품이란다. 이미 1000매 가량 써두었다. "그래도 또 뒤집어쓰려면 얼마 후에 다시 볼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장편이라 이 작품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란다.

"이 작품 쓰다가 지쳐서(웃음). 이 작품이 워낙 격렬했으니까요. 다음 작품은 단 두 명만 등장하는 소설을 써보려고요. 그런 소설은 안 써봤거든요. 언어가 침묵에 가까운 작품이 될 듯해요."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