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박홍규 영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예술, 법을 만나다>출간… 둘 사이의 역사적 관계 살펴 정의 사회 구현

박홍규 영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는 재작년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삶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책을 쓰거나 번역하는 경우 왜 쓰고 번역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는 이는 드물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신선했다. 철학을 다루는 책 중 이렇게 정직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책은 별로 없다. 낯선 개념과 어려운 설명을 삶에 끼워 맞추는 일은 읽는 이의 몫이었다. 그 일이 고되고 아리송해도 감히 저자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저 저 심오한 철학에 비해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속된지나 새삼 깨달을 뿐이었다. 하지만 박홍규 교수의 한 마디에 우리는 적어도, 물어볼 수는 있게 됐다. "이 책은 삶을 어떻게 도와주나?"라고.

박홍규 교수의 저작 대부분은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왜 갑자기 아렌트가 인기를 얻고 있나?", "왜 카뮈를 읽어야 하나?", "왜 니체 유행을 경계해야 할까?" 등등. 그리고 책임지고 밝혀낸다. 질문을 전방위로 포위한 후, 구체적 지식과 비판 정신을 도구 삼아 낮은 포복으로 접근한다. 산뜻한 문장으로 세상의 모든 심오한 것들을 우리가 쥘 수 있는 꼴로 만든다.

저작의 범위도 전방위다. 전공인 법학은 물론 정치, 철학, 문학, 미술과 음악을 넘나든다. 미셸 푸코와 에드워드 사이드, 이반 일리히의 저작을 번역했고 반 고흐, 셰익스피어, 까뮈, 사르트르, 클림트 등의 평전을 썼다. 한국사회가 참고할 만한 네덜란드와 인디언 사회의 삶의 방식을 소개하기도 했다.

최근 출간한 <예술, 법을 말하다>에서는 심지어 가장 반대로 보이는 예술과 법의 만남을 주선했다. 법을 소재로 삼은 예술 작품과, 예술을 규제한 법 현상을 통해 둘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살피는 내용이다.

당연히 "왜?"에 대한 대답이 마련되어 있다. "예술과 법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인권을 보장한 정의로운 것이었다. 둘은 행복하게 만남으로써 인류에게 필요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 예술은 삶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법은 이를 바탕으로 인간을 위한 사회의 지향을 실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박홍규 교수가 보기에 예술과 법이 동떨어진 것은 한국사회에 특유한 문제다. 예술적 성찰이 없는 재판은 "모두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 특정 사람들의 이익 추구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학계의 전문화와 권위주의, 자신의 학문 영역만을 고집하는 폐쇄성이 주요 원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술과 법, 각각의 영역에서도 노력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회 전체, 사회의 주인공인 시민 개개인이 인권 의식을 높여야 한다. 예술을 통해 인간을 귀하게 보고, 법이 이상적 사회를 향해 운용되도록 지키고 독려해야 한다. 즉 삶 속에서 앎을 통합시키는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

"법은 역사적으로 시민의 생활에서 비롯되었고, 그 생활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시민의 생활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술도 본래 시민의 생활에서 비롯했고, 누구나 예술가가 되고 예술품을 감상하는 예술적 능력을 가진다. 하지만 오늘날 법과 예술은 법률가라는 전문가, 천재적 능력을 갖는 소수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법과 예술을 시민의,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이 <예술, 법을 만나다>의 주선 이유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적 교훈의 쓸모다.

책을 쓴 동기가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기 위해서라고 밝히셨습니다. 그게 왜 중요합니까?

-법대처럼 딱딱한 곳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공부 시간의 대부분을 법조문을 달달 외우는 데 씁니다. 소설 한 권 읽지 않고, 자신들끼리 뭉칩니다. 법률인이 된 후에도 그런 관습이 이어집니다. 법률문화가 답답하고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법이 다루는 대상은 우리의 삶입니다. 희로애락과 드라마가 있고, 복잡합니다.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 법조문에 대한 교조적 해석만으로 하는 재판은 무지하고 교만한 것이지요.

법률가가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하셨습니다.

-법뿐 아니라 철학, 역사, 문학과 미술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인간다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알고, 추구할 수 있지요. 서구의 옛 법률가들은 교양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예술의 가장 큰 지원자는 법률가들이었습니다. 법조문 자체가 명문(名文)이었습니다.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아침 저녁으로 법전을 읽으며 문장을 익혔다고 하니까요. 프랑스 법전의 문장은 그만큼 아름답고 명료하고 지적입니다. 철학적 깊이와 고뇌가 느껴지는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죠. 지금도 그런 전통이 남아서 미국 판사들은 판결할 때 셰익스피어나 워즈워드를 인용하곤 합니다. 상상해 보세요. 원숙한 판사가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읊는다면 그 재판이 얼마나 부드럽고 여유 있을지 말입니다.

법률가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가, 학자 등등 권력을 가지고 사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지요. 그중 법률가들이 가장 정도가 심하긴 합니다만. 이들의 말은 가장 널리 자주 퍼지기 때문에 깊이가 있어야죠. 대통령이 시와 소설을 인용하며 연설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쉽게 함부로 하는 말, 무식한 말, 극단적인 말로 문화가 강퍅해진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문화국가' 만들기에 힘쓰고 있는 정치권에서 귀담아 들어야 겠는데요.

-문화국가는 돈이나 행정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예술적 소양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죠.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합니다. 제가 스스로 자부하는 점은 예술을 접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품성을 길러주지 않으면 문화국가가 될 수 없어요. 예술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닌 얼마나 깊게 사랑하느냐가 문제고, 그런 교육을 가능하게 하려면 정치가 스스로 예술을 이해해야죠.

2007년에 <예술, 정치를 만나다>를 내셨습니다. <예술, 법을 만나다>는 그 자매편인가요?(웃음)

-예술과 다른 영역 간 만남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시리즈로 구성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작년엔 의사들을 대상으로 의학을 소재로 삼은 예술에 대해 강연했는데요. 그 내용을 바탕으로 <예술, 의학을 만나다>를 쓴다던지.(웃음) 이런 책들을 통해 법률가와 의사들이 자신들을 비추어본다면 좋겠지요.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잘 모르니까요. 예술을 사회적 비판의 대변자로 삼을 수 있습니다.

통섭의 의의가 큰 건가요?

-학문들이 너무 파편화되어 있어서, 교양이 없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두루 성찰하고 인간다워지자는 뜻입니다. 예술은 사회의 면면을 비판하고, 감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간접경험을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잘못된 정치, 법, 의료제도를 개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 왔죠. 그런 의미에선 <예술, 교육을 만나다>, <예술, 노동을 만나다>, <예술, 환경을 만나다> 등등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아이디어를 내놓았으니 각각의 분야에 계신 분들이 쓰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아무도 안 쓰니까 쓰는 것이거든요.(웃음)

다작을 하시는데, 겹치는 이야기가 거의 없어서 놀라울 정도입니다.

-다작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번역되어야 하는 것들이 번역되지 않고 쓰여져야 하는 것들이 쓰여지지 않아서 제가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웃음) 제가 번역한 사상가들, 예를 들면 에드워드 사이드나 이반 일리히 같은 경우에는 번역되지 않은 이유가 있었죠. 전공이 애매했거든요. 학계에서 인정받으려면 정해진 전공에 따라 연구 업적을 쌓아야 하니까, 이런 엉뚱한 영역에 뛰어들려는 사람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런 작업이 다른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면 즐겁죠. 저 이후엔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전공에 처박히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아가 전공에 처박히면 안되는구나를 깨달아줬으면 하고요.

일상이 매우 규칙적일 것 같아요. 시골에서 사신지 10년 정도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과가 어떠신가요?

-아침 4~5시 정도에 일어나 2~3시간 정도 집에서 작업을 하고 8시에는 집 옆 밭에서 일을 하거나 걷습니다. 학교에 가서 저녁 6~7시까지 또 작업을 하고요,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9시쯤 잠자리에 듭니다. 이외에는 거의 다른 일정이 없어요. 가끔 외부 강연을 나가는 것 외에 사회적 활동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동문회니 동호회니 일련의 폼 잡는 활동들 말입니다.(웃음) 학교에서도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 외에는 어떤 보직 활동도 하지 않아요. '왕따'죠.(웃음) 하지만 그래야 읽고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깁니다.

하지만 강조하시는 것처럼 인간과 삶을 이해하려면 사회 활동도 하셔야 하지 않나요?

-저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자연과의 교류입니다. 물론 마음 맞는 벗과의 편지 교류, 가족과 학생, 마을 사람들과의 일상적 만남 같은 것들도 중요하고요. 단지 제가 속한 사회, 법률가와 교수들이 모인 이른바 지배계급 사회에 속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해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학연, 지연 등의 인맥 문화가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잖아요. 그 사회에 속해 있기 위해 술 마시고, 놀고, 선거 때 되면 선거운동 하는 식의 별 볼 일 없는 공식화된 일들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하는 게 오히려 인간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죠.

편지도 쓰신다고요?

-가끔 제 책을 보고 공감하거나 도움을 받고자 하는 분들에게서 편지가 오거든요. 언젠가는 노동 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분이 편지를 보내셨어요. 딸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고 유익한 말을 해달란 부탁이었죠. 그래서 그 따님을 뵌 적도 있습니다.

시골생활을 하시면 몸에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요.

-굉장히 건강해지지요. 제 연구실 학생들이 증언해주었는데, 제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으면 4~5시간 정도는 꼼짝도 하지 않을 만큼 집중력이 좋다고 합니다. 눈도 아직 불편함이 없고요. 거의 아픈 데가 없었어요.

인터뷰를 하기 전, 예전 저작들을 다시 훑어 보았는데 대부분이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더라고요. 이유가 있으십니까.

-문제 의식이 없는 책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묻고 답하지 않은 책은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묻고 답하는 거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한 이야기는 가능하면 하지 않습니다. 필요한데 나오지 않는 것이나, 다르게 접근해볼 만한 것들을 다루죠. 예를 들면 니체나 그리스 신화는 읽을 필요 없다, 같은 이야기요.(<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그리스 귀신 죽이기>) 그러다 보니 비판이 많은데, 출판사는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독자들은 칭찬해주는 책을 원한다나요.(웃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