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티스트 최나경신시내티 심포니 부수석, 3년 만에 한국 리사이틀, 경기필 하모닉과 협연도

"재스민 초이의 연주를 들어봤나요? 꼭 한번 들어보세요. 그 아이는 아주 특별하답니다."

마치 혼자만 알기엔 벅차다는 듯, 여든을 넘긴 플루트 거장 줄리어스 베이커는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초면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언젠가는 커티스 음대 앞, 중국인이 운영하는 꽃집에 들러서는 '한국인이냐'며, '재스민 초이의 연주를 들어봤느냐'고 물었던 적도 있다.

줄리어스 베이커가 커티스 음대에서 기른 생애 마지막 제자, 재스민 초이. 현재 미국 굴지의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플루트 부수석으로 있는 최나경(27)의 영어 이름이다.

2006년, 187:1의 경쟁률을 뚫고 한국인 관악기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미국 주요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면서 이슈를 몰고 왔던 그녀. 부활절 휴가를 이용해 귀국한 그녀는 3년 만의 한국 리사이틀(4월 3일)과 교향악 축제에서 경기필하모닉과의 협연(4월 10일) 무대에 선다.

"커티스란 학교가 절 트레이닝을 해줬어요. 실내악을 할 때도 학생들이 코치를 선정하고 그 비용은 학교에서 부족함 없이 지원해줬죠. 레슨은 물론이고 매주 학교 부근에 있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똑같은 일정으로 오케스트라 연습을 했죠. 거기에 실내악까지 너무 바빴지만, 굉장히 많은 걸 얻었어요." 커티스와 줄리아드 음대에서 수학한 그녀가 서울예고 1학년 재학 중, 줄리어스 베이커에게 '센세이션'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커티스 음대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졌다.

신시내티 오케스트라에서의 근황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줄리어스 베이커와의 추억으로 이어졌다. 커티스 음대에서 老 스승과 보낸 4년간의 시간은 그녀를 웃게도 하고 눈물짓게도 했다. 매주 레슨에 앞서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던 스승은 종종 새벽 6시, 이런 내용의 음성 메시지를 남기곤 했다.

"궁금해서 전화했단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네가 어제 연주한 소나타가 아직도 가슴에 남아서. 언제나 네 연주는 특별했지만, 어제는 더 특별했단다." 저녁잠이 많은 스승은 학생들의 리사이틀에 참석하는 경우가 없었지만 최나경의 리사이틀만은 예외였다. 늘 아내와 동반했던 최나경의 음악회였지만 줄리아드 졸업 리사이틀 때만은 스승의 아내 혼자였다. 2003년 줄리어스 베이커가 심장마비로 타계한 탓이다.

"그해 여름, 한국에 돌아와 음악 캠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누군가 제게 문자로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려줬는데요, 아이들을 가르치던 중에 정말 갓난아기처럼 서럽고 크게 울고 말았죠. 내일 당장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아버지를 몇 번이고 졸라서 이틀 만에 미국을 다녀왔어요. 가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작별 인사를 못한 게 지금도 마음이 아프네요."

웃고 있던 그녀의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찼다. 자신의 음악에 무한한 자유를 줬던 스승의 다소 모호한 레슨 방식을 이해한 건 2년이 지난 후였다. 그의 제자 수백 명의 연주 스타일이 모두 다른 이유를 알게 된 거다. "제가 곡을 네 가지 방식으로 연습해와서 여쭤봐요. '선생님, 이렇게 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이렇게요?' 하지만 선생님은 '가장 좋은 답은 네가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죠. 처음엔 그게 답답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유를 알 거 같았죠."

신시내티 입단 후인 2006년과 2007년 미국의 음악잡지 <심포니>로부터 '떠오르는 연주자'로 선정되었던 그녀는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선 '건강한 소리를 가진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라는 호평도 받았다.

2008년, 종신 단원인 테뉴어(Tenure)의 자격을 부여받은 최나경은 신시내티의 유명인사이기도 하다. 매년 시즌 티켓을 사는 이들이 객석의 반 이상인 신시내티 오케스트라의 공연. 단원들 각자를 솔리스트라고 생각하는 신시내티 심포니의 수장 파보 예르비는, 연주 때마다 풍부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최나경의 연주를 '특히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

"세상에 똑같은 음악은 없다고 생각해요. 기계가 아닌 이상, 같은 사람이 연주할 때도 매번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하죠. 같은 연주를 리허설과 실연에서 몇 차례 하는데, 매번 다르게 하려고 해요. 예르비는 달라지는 소리를 잘 알아채죠. 그 분은 연주자가 기회를 잘 잡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놓아줘요."

세상의 어둠을 모르고 평탄하게만 살아온 것 같은 그녀에게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만 19살이 되던 해 오른손 마비가 온 것. 핸드폰은 물론 연필 한 자루도 들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목을 지나 왼손까지 모두 마비되었다. 지나친 연습 때문이라면 원인을 알고 치료할 수 있었지만 스트레스 성으로, 20여 명의 의사 중 누구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필기시험은 구술시험으로 대체하거나 평소의 성실함 덕에 시험 없이도 점수가 나왔지만 당시 그녀에겐 아무것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5개월 후에 낫게 될 걸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낙담하진 않았을 거에요. 한 달이 지나도 안 낫고, 두 달이 지나니 더 심각해졌죠. 언제까지 플루트를 못하게 될지 알 수 없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악학교를 다니면서 그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것도 슬펐죠. 나중에는 다 싫어지더라고요. 음악을 못하는데, 시험은 봐서 뭐하나, 수업은 들어서 뭐하나, 레슨은 해서 뭐하나. 저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어요.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한숨부터 나왔죠."

겨울 방학,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무작정 쉬기로 했다. 그 후 서서히 팔에 힘이 돌아오더니, 플루트도 들 수 있게 됐다. 커티스 음대에 복귀한 후, 졸업식에서 솔로로 축하연주를 마친 최나경에게 다가와 가만히 안으며 스승이 말했다. "봐라. 난 네가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단다." 환하게 웃던 그를 본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두 달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삶의 그늘을 경험했기에 일상에 늘 감사한다는 최나경은 플루트를 연습하고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귀국한 날 밤에도 역시 그녀의 손엔 플루트가 들려 있었다. 중 1때부터 사용하던 브란넨 쿠퍼의 실버 바디를 여전히 사용하는, 의외의 소박함도 가진 그녀다.

먼 미래의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플루티스트 최나경. 올해 한국과 미국에서의 공연과 더불어 소니 BMG에서 두 번째 앨범을 준비하며 한 뼘 한 뼘 성장해가고 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