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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당신 본능과 만나며 읽으세요"

박범신 소설가
신작 <은교> 77세 노인이 17세 여자를 탐하는 연애소설 출간
지난 달 인사동에서 술자리였다. 모 작가와 모 신문사 선배를 소개해 주는 자리에서 작가는 멋쩍은 듯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다가, 선배의 취재 뒤 이야기를 들었다. 대화가 어색해지려던 찰라, 박범신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 선생님 근데 저 지금 소개팅하고 있어요."

비도 오는데 술이나 한잔 하자고 온 전화를 싱겁게 끊고 나서 대화를 이어가던 때, 다시 박 작가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두 ]

자신도 소개팅하고 싶다는 농담 섞인 문자에 모 작가가 답문을 보냈다.

[선생님한테는 은교가 있잖아요!]

박범신 작가의 신작 <은교>의 주인공 한은교는 연재 당시부터 그의 후배와 제자들 사이에서 화제였고, 박 작가는 여 제자들에게 "은교 1, 은교 2"라 별명을 붙여주며 "나의 은교들"이라 농을 주고받았다. 장편 <고산자>를 내고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쓴 작품이 화제가 된 것은 그가 17년 만에 쓰는 연애소설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흔 일곱의 노인이 열일곱의 여자를 탐하는 연애소설 말이다.

사랑은 안 이루어지는 거야

모 작가의 답문에 함께 웃기 위해서는 연애소설의 내용을 알아야 할 터, 그 이야기를 펼쳐보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시인이라 칭송받던 이적요가 죽은 지 일 년, 그의 법적 후견인인 Q변호사는 시인의 유언대로 그가 남긴 노트를 공개하기로 하지만, 막상 노트 내용을 읽고 난감해 한다. 노트에는 이적요가 열일곱 소녀인 한은교를 사랑했으며, 제자였던 베스트셀러 작가 서지우의 모든 작품을 자신이 썼고, 자신이 제자를 죽였다는 고백이 담겨 있다.

그 고백의 저편에 두 개의 이야기가 엉켜 있다. 이적요와 한은교의 서사. 이적요와 서지우의 서사. 이적요와 한은교의 이야기가 연애소설이라면, 이적요와 서지우의 이야기는 부자지간의 애증 같은 것이다.

이적요는 자신의 늙음과 대비되는 은교의 젊음을 보며 관능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정이 넘치던 사제지간이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는 은교를 둘러싸고 열등감과 질투, 모욕이 뒤섞인 긴장이 흐른다. 서지우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당뇨로 시달리던 이적요는 술을 마시며 자신을 서서히 죽이기 시작한다.

그가 쓴 연애소설, 일흔 일곱 남자와 열 일곱 여자의 사랑이야기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나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 어느 쪽의 모양새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연애소설의 옷을 입은 예술가 소설이다. 한 평생 자신의 욕망을 숨겨온 노인이 삶의 끝에서 그 욕망을 폭발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쓰다 보니 이게 연애소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은교란 이름 속에 내가 다 이루지 못하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할 그런 꿈들이 판타지적으로 집약되어있다"고 말했다.

"은교는 하나의 판타지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은교에게서 노인이 가장 갈망을 갖는 것은 은교가 처녀라는 점이에요. 이건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순결하고, 처음이고, 부족한 게 없어 그늘이 없는 것에 대한 판타지죠. 가 닿을 수 없고, 그렇지만 멀지도 않은. 나한테는 은교가 아름다운 젊은 처녀이면서 동시에 새로 쓰고 싶은 수많은 소설들이죠."

그의 전작 <촐라체>와 <고산자>와 비교해 이 소설이 전혀 다른 벡터로 향하는 듯하지만, '갈망'이란 키워드로 본다면 하나의 포위망에 잡힌다. <촐라체>에서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 정한을, <은교>에서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을 '연애소설'의 틀로 담아낸 것. 작가는 "촐라체와 고산자, 은교를 갈망 3부작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갈망은 이룰 수 없는 것이지. 그 대표적인 예를 나는 사랑이라고 보는 거지. 사랑은 신기루 같은 것이고, 사랑을 이룬다는 말 자체는 틀린 거야. 사랑을 이룬다?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이뤄? 그건 내가 별까지 걸어가는 것과 같은 일이야. 내가 별을 갖는 것과 같은 일이야. 그런데 참 놀랍게도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우리는 평생 사랑을 이루기 위해 너무나 많은 헌신들을 하고 있잖아. 슬픈 일이지.' (월간지 <풋> 인터뷰 부분)

돌아온 내 젊은 날

원고지 900매 가량의 이 소설을 작가는 한 달 반 만에 썼다. 책의 말미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내가 미쳤다"고 썼다. 원고지에서 벗어나 컴퓨터 자판으로 쓴 첫 소설인데, 덕분에 육필원고를 쓸 때와 비교해 육체적인 고통은 많이 줄었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나를 평생 고통스럽게 한 짐이 뭔가를 생각했는데, 오욕칠정이더라고요. 예술에 대한 욕망, 가족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욕망, 가족에 대한 문제 등등. 37년 작가로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게 하는 소설이었어요."

인터뷰에서 작가는 한사코 부인했지만, 소설 속 이적요 시인의 모습과 작가의 모습이 일면 겹친다. 실제로 작품 연재 내내 제자들에게서 '이건 선생님 얘기'라는 말을 들었다고.

"제 안에 다양한 층위의 욕망이 작품에 들어와 있다고 보시면 될 거에요. <촐라체>나 <고산자>는 소재가 특정하기 때문에 어떤 인문학적 아우라에 감추어진 내가 있었거든요. 이 작품에서는 욕망이 말끔히 드러나 있죠."

그는 "나는 평생 작업으로 인생을 사는 것 같다. 작업이라는 게 연애를 거는 것인데, 가족에게, 독자에게 작업하는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이번에 오프라인 책과 전자책을 동시에 출간하기로 했어요. 장편소설 신간을 전자책으로 동시 출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어요. 저는 인터넷을 잘 모릅니다. 그래도 독자들에게 읽힐 수만 있다면 그게 전자책이든 제 3의 방식이든 저는 문을 열고 싶거든요. 독자에게 가는 길이 다양할 수록 좋다는 게 제 입장이에요."

애초 문학동네 커뮤니티에 5개월 가량 인터넷 연재를 하기로 약속이 됐지만, 방식을 바꿔 원고료 한 푼 받지 않고 작가 개인 블로그에 작품을 연재했다. 정해진 분량과 마감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나 가장 자유로운 형태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이런 방식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작품을 더 빨리 내게 됐다고. 마지막으로 작가는 이 소설을 '밤에만 쓴' 소설이니 밤에만 읽기 바란다고 했다.

"우리가 의젓하게 옷 입고 사회적 얼굴로만 평생 살다 보면 후회해요. 우리 내부에 어떤 삶의 체제와 다른 본능이 있죠. 그렇다고 본능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낮에는 사회적 자아로 살아가지만, 밤에는 적어도 우리 본능이 있었다는 걸 깨닫기를 바라요. 그래서 이 소설은 밤에 읽었으면 좋겠어요. 밤에 당신 본능과 만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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