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 소설가김수환 추기경 삶을 작가의 시선으로 그린 <용서를 위하여> 출간

사진 제공=해냄출판
"제가 1946년생, 우리 나이로 64살이 됐는데, 평생 저를 따라 다닌 말이 '인기 작가', '감성의 작가'였습니다. 이제 넉넉한 인생의 지혜를 발휘하는 '노작가'로 불렸으면 합니다."

지난 20일 기자들과 만난 소설가 한수산 씨는 여유 있는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2003년 <까마귀>이후 7년 만에 발표한 그의 작품은 <용서를 위하여>(해냄 펴냄).

고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작가 자신의 시선으로 그려낸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지난 80년대 그 닳고 닳은 기억을 풀어 놓았다.

고통의 시간들

소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한 가지를 짚어두자. 20~30대 독자들에게 생소하지만, 소설가 한수산 씨는 <해빙기의 아침>, <모래위의 집>, <욕망의 거리>, <거리의 악사>, <유민> 등을 발표하며 유려한 문체로 특유의 소설미학을 구축한 원로 작가다. 80년대 한 차례 고초를 겪은 후 일본으로 건너가 작가로서 제 2의 인생을 살았다.

작가는 1981년 5월 <중앙일보>에 소설 <욕망의 거리>를 연재할 당시 군부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는 혐의로 고 박정만 시인 등과 함께 신군부에 연행돼 매질과 전기 고문, 물고문 등 고초를 겪은 바 있다. 이른바 '한수산 필화 사건'. 고문으로 심신이 망가진 채 보안사를 나온 그는 국내에서 창작 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1988년 일본으로 건너가 4년 남짓 그곳에 머물렀다. 1989년 가톨릭에 입교했다.

"필화 사건 후 작품의 경향이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당시에 알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필화 사건 전)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의식에 관해 천착했다면 이후 발표한 글은 개인의 고통이나 삶의 변화가 개인 탓이 아니라 사회적 연관을 가진 것이라고 그렸지요."

자, 이 긴 서두는 그의 신작을 읽어내기 위한 준비과정인 바, 이제 그가 우리 앞에 내민 소설을 감상해 보자.

작가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1년간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간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군위의 옛집, 식민지 청년의 들끓는 가슴으로 고뇌했을 도쿄의 조치대학, 어머니와의 사랑이 아롱지고 영근 대구의 계산 성당, 첫 사목지인 안동의 목성동 성당, 젊은 사제의 청춘이 묻어 있는 김천의 성의 여고와 황금동 성당, 영원한 안식에 든 용인의 천주교묘원을 걷고 또 걸었다. 이 모든 과정이 소설 <용서를 위하여>다.

작가 자신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이 작품은 작가의 회고에서부터 르포와 인터뷰, 답사기 형식, 신문기사, 방송 멘트 등이 화자의 서술과 씨줄과 날줄처럼 맞물린다. 사실과 허구의 구분이 되지 않는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소설로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실을 취사선택했을 뿐 허구로 지어낸 부분은 없다"고 말했다.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 하는 취사(取捨)의 문제와 사실의 어디까지를 소설로 쓸 것인가 하는 내용의 문제, 배합과 배치할 것인가에 대해 두 가지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김 추기경의 성장기를 중시해 본당 신부까지 중점을 두었고, 저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것은 갱생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용서를 위하여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자. '용서를 위하여'. 그러니까, 이 작품은 "가해자의 사죄가 없는 용서가 가능한가?"란 작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서 시작한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말씀하기 시작한 때가 1980년대 중반, 그러니까 제가 필화 사건으로 고문을 당했을 즈음입니다. 그러니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었죠. 용서할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가해자가 사과조차 하지 않는데 어찌 용서를 할 수 있나…. 그때부터 추기경 말씀이 제 평생의 화두가 된 셈입니다."

작가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뻗어간다. 하나는 필화 사건 이후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절망에 시달리던 작가 자신이 뒤늦게 가톨릭에 귀의, 자기를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또 한 축은 주인공이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고인의 생애를 좇는 과정이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의 소박하고도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의 황폐함을 어떻게 구원했는지를 소설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읽히는 이야기이기에 앞서, 치유의 글이 된다. 우선 글을 쓰고 있는 작가 자신부터.

소설 속 김 추기경은 종교적 위인이기에 앞서 조국을 걱정하는 청년, 어머니를 극진히 생각하는 효자, 가난한 사람들과 부대낀 풍부한 감성의 한 인간이다. 작가는 추기경의 인간애와,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평생 나환자와 함께 했던 고 이경재 신부의 생애 등에 감화돼 차츰 필화 사건과 고문으로 인한 마음의 응어리를 푼다.

'저는 잊으렵니다. 용서하지는 못하더라도 잊으려고 합니다. 제가 살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285 페이지)

이 말은 소설 속 화자의 말이자 작가인 자신의 말일게다. 소설의 내용을 다시 작가에게 던졌다. '용서할 수 있습니까?'라고.

"소설의 맨 끝에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잊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해야겠구나'그런 마음에는 와 있습니다."

김대건에 이은 한국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에 관한 소설과,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헤쳐온 여자의 일생을 다룬 소설을 올해 안에 출간할 계획이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