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배우 윤영석2001년 <오페라의 유령>으로 데뷔 스타덤… 새 모습으로 각오 다져

말쑥한 정장에 포마드 기름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올백 헤어 스타일. 중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매력적인 하이 바리톤.

극장 이곳 저곳에서 유령처럼 출현하며 사람들을 전율시키는 어둠 속의 신사. 다시 돌아온 그를 보기 위해 10년 전의 24만 팬들이 돌아왔고, 새로운 팬들이 계속 그와 만나고 있다.

작년 9월부터(7월 31일까지) 샤롯데씨어터에서 '관객 30만'이라는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뮤지컬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의 원동력은 당연하게도 '팬텀'이다. 전 세계의 팬들은 아직도 마이클 크로포드와 브래드 리틀의 팬텀을 떠올리며 전율하고, 그와 다시 한번 만나기를 고대한다.

국내에서는 윤영석이 그런 존재다. 다양한 변종 팬텀들이 등장해 팬들을 즐겁게 해도, 팬들의 뇌리에는 가장 먼저 접했던 팬텀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다. 화려한 기교와 남성적인 매력으로 무장한 후배 팬텀들에 비해 그의 팬텀은 우직하고 불안정한 인물을 보여주지만, 그게 바로 윤영석의 팬텀이자, 한국 최초의 팬텀의 모습이다.

2001년 이 작품으로 데뷔해 스타덤에 오른 윤영석에게 극 속 오페라 극장은 언제나 설레고 떨리는 무대다. 오페라계에서 주목받는 신인으로 1999년부터 서울시립합창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신출내기 바리톤 윤영석은 <오페라의 유령>뿐만 아니라 뮤지컬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덜컥 오디션에 합격하고 연습을 할 때서야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 역 윤영석
그럼에도 첫 번째 <오페라의 유령>은 국내 뮤지컬 사상 최고의 관객 동원으로 성공적인 마무리를 했지만, 윤영석에게는 뭔가 아쉬움이 많은 공연이었다. 뮤지컬 신인으로서 잘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시종일관 완급 조절 없이 '너무 열심히' 했던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도 그런 부분은 분명히 보였다. 평소 친분이 있던 가수 유열이 대기실에 찾아와서 "처음엔 감동도 있고 눈물도 있었는데 지금은 별로 그런 게 안 느껴진다"고 말해줄 정도였다.

"너무 지나쳤던 것 같아요. 팬텀이 연민과 공감이 가는 인물이어야 하는데 전체 출연분이 25분밖에 안되다 보니 나올 때마다 '풀 파워'로만 연기한 거죠. 돌이켜 보니 그건 팬텀도 아니고 배우 윤영석도 아닌 그냥 '괴물'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팬들은 그런 윤영석의 팬텀에 너무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한국에서 팬텀은 곧 윤영석을 지칭했다. 반대로 윤영석에게는 그런 각인이 단점으로만 받아들여졌다. 이후 그가 맡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성우, <명성황후>의 고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알베르트, <사랑은 비를 타고>의 동욱 등을 맡게 된 데에는 팬텀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인물을 표현해 보고 싶은 목적도 있었다.

노력의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관객에게 여전히 그는 '팬텀의 윤영석'이다. 연기파 배우들도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구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마지막까지 대표 캐릭터를 갖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관객이 하나의 캐릭터를 떠올릴 때 한 배우를 떠올린다는 것은 일견 대단한 일이다. 바로 마이클 크로포드가 그런 예다. 윤영석도 이를 깨달은 게 몇 년 되지 않았다. "짐이 아니라 오히려 상인데 말이죠."

이제 세월이 지나 여러 명의 팬텀이 생겼다. 네 명의 팬텀 중에서 윤영석의 팬텀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또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그가 설정한 그만의 팬텀은 '연민이 느껴지는 팬텀'이다. 작년에 방영된 <선덕여왕>의 비담을 보면서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어린 나이에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이는 비담을 보면 섬뜩하고 사악하지만 한편으로는 연민을 자아내잖아요. 팬텀의 어린 시절도 저러지 않았을까 생각되더라구요." 콤플렉스를 가지고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성정을 가졌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과연 많이 닮아있다.

외모 면에서는 진일보한 변화가 있었다. 호리호리하고 멀쑥한 신사가 떠오르는 팬텀의 전형에서 보면 그의 몸은 약간 벗어나 있다. "처음에 10kg이 더 찐 상태일 때는 팬카페에 '팬텀의 얼굴이 아니다', 심지어 '도라에몽 팬텀이다'라는 평도 있을 정도였어요."

자기가 생각해도 팬텀에 어울리는 몸은 아니라고 자아비판(?)을 하는 그는 이번엔 외적으로도 완벽한 팬텀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한 달 반 전부터 헬스클럽에서 트레이닝을 계속했다. 팬텀처럼 외형적인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기 위해 외적으로 더 멋지게 보이려고 할 것이라는 세심한 분석이 이를 뒷받침했다.

가면으로 가려진 팬텀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손톱까지 길렀다. 눈과 표정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다른 캐릭터에 비해 팬텀은 손 연기로 그것을 대체하는데, 손톱을 기르면 손이 조금 더 길어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변화는 나이다. 중후한 신사의 매력을 표현하기에 나이들이 너무 젊다는 우려를 받는 국내 팬텀들의 한계에서 그는 이제 자유롭게 됐다. 올해로 마흔이 된 그는 '연기란 배우는 게 아니라 체득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언젠가 송용태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배우의 배(俳) 자가 사람 인(人)과 아닐 비(非)로 이뤄진 이유는 배우가 어떤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라고. 31살의 팬텀과 40살의 팬텀은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국내 최초의 팬텀으로 뽑혀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은 윤영석. 온화하고 고운 인상과 성품도 그런 추측을 하게 하지만 그는 사실 팬텀처럼 자신도 '열등감 덩어리'라고 털어놓는다. 연기 공부도 안 했고, 뮤지컬의 테크닉을 배운 적도 없는 채로 데뷔해서 한동안 '노래만 잘 하는 배우'였다.

신체적 열등감은 말할 것도 없다. "요즘 나오는 젊은 배우들은 멋진 체격을 가지고 있잖아요. 게다가 목소리도 너무 금속성이라 듣기 싫었거든요. 성악할 때도 왜소한 체격 때문에 파바로티 같은 체격의 친구들과 기본적인 성량에서 차이가 났어요." 친구들만큼 쉽게 성량을 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항상 더 노력해야 했다. '꿀리기' 싫어서 항상 최선을 다했고, 그러다 어느 순간에 '노래는 내가 최고'라는 생각으로 부르게 됐다.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땐 멀쑥한 신사이지만, 실제로는 열등감과 좌절감, 질투심의 화신이자 광기를 지닌 괴물. 신사와 괴물의 사이를 유영하는 팬텀의 매력은 그 간격에서 나온다. 그리고 어쩌면 윤영석의 팬텀에 관객들이 여전히 환호하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오페라의 유령>은 '첫사랑의 느낌'이다. "마치 그때 그 팬들이 다시 돌아온 것 같거든요. 이 작품 덕분에 뮤지컬을 알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죠."

똑같은 무대와 의상, 노래로 다시 무대에 오르지만 처음보다 더 설레고 떨린다는 윤영석. 그는 언젠가 극장을 찾은 앞을 못 보는 팬과 항암 치료로 들을 수 없게 된 팬들의 사연을 접하고 진실된 노래와 연기로 무대에 서는 진실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다짐하며 무대에 오른다. 마치 귀가 안 들리고, 눈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도 가 닿을 수 있는 진실한 연기와 노래를 하려는 듯.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