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손가락 부상 완쾌… 내달 4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

2005년 9월 23일 밤, 키로프 오케스트라와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기로 되어 있던 정경화는 연주 대신 청중에게 말을 건넸다.

같은 날 오후 리허설 도중, 손가락 통증을 느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완벽한 연주를 보여 드릴 수 없어 연주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5일 후에 다시 오르는 무대에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겠다고, 여제는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기까지는 무려 5년이 걸렸다. 5일 후를 기다리던 관객들에게 5년의 기다림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을 거다.

드디어 여제가 돌아왔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62)가 손가락 부상을 완전히 떨쳐내고 내달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당초 5월에 내한하는 다른 오케스트라의 러브콜을 동시에 받았지만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지휘봉을 잡는 필하모니아를 선택했다. 이전에 아쉬케나지와의 협연이 아쉽게 무산된 적이 있거니와 이번 무대에서 5년 전에 연주하지 못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손가락 부상은 꾸준한 관리 덕에 완쾌했다고 했다. 얼마 전 다시 한번 심하게 앓고 난 후, 병원에서 체내에 납이 기준치 이상으로 쌓여 있다는 진단까지 받아 복귀 무대가 무산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다행히 통증은 잦아들었다.

예정대로 내한한 그녀가 지난 27일, 메리어트 호텔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복귀를 앞둔 소감과 젊은 연주자 후원 재단 설립 등의 근황을 전했다.

"브람스는 제가 너무 사랑하는 작곡가이고, 15살 때부터 연습해오던 곡이에요. 연주할 때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연주합니다. 5년 전에 못했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정말 하고 싶었고, 한국 관객들과 함께 음악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환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5년 만에 돌아온 무대에 대한 행복감을 감추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손가락 부상으로 연주자로서 공백기를 갖은 그녀는 '예술인으로서 성장'한 지난 5년을 돌아봤다. 부상 이전엔 한해 평균 100회 이상의 무대를 소화했던 그녀다. 얼마나 무대가 그리웠을까. 공백기 동안 다행히 몰두할 일이 생겼다.

2007년 자신의 모교인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의 교수직에 임용되었던 것. 지난 3년간 후진 양성에만 충실 해왔다. "가르치는 일은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연주생활과 교수생활은 정말 다르죠. 연주자로서의 생활을 잘 알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경험담이나 심리적인 부분을 많이 알려주려고 합니다." 재능있는 젊은 음악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을 돕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재단을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장학금과 악기도 제공하면서 걱정 없이 공부하고, 연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제가 할 줄 아는 게 바이올린밖에 없어서 기금을 마련하려면 앞으로 기를 쓰고 무대에 서는 수밖에 없겠죠. 로린 마젤의 샤토빌 재단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교육과 후원을 하고 일본음악재단은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연주자에게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빌려주고 매니지먼트도 꼼꼼하게 해주거든요.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죠. 길게 보고 투자해야 합니다."

그녀가 현재 눈여겨 보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이유라와 김수연이라고 했다. 이유라는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로린 마젤이 연주를 듣자마자 뉴욕 필과의 협연을 제안했던 음악 천재로 잘 알려졌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수연은 권위 있는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레코딩을 발매한 한국인 아티스트 6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 6명 중에는 정경화, 정명훈, 조수미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유라와 김수연은 종종 바이올린계의 차세대 거장으로 불리곤 한다.

"한국에는 (김)선욱(피아니스트)이, 수연이, 유라처럼 재주 많은 연주인들이 많습니다. 70년대는 레코딩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티스트로서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것 같아요. 시간이 문제죠.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한 레코딩을 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요즘은 시간이 그리 충분하지가 못하거든요. 시간을 뛰어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결국 돈인 것 같아요. 재능있는 아이들은 누군가 나서서 100% 서포트를 해줘야 합니다."

요즘은 기금뿐 아니라 젊은 연주자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지 않아, 전국의 콘서트홀을 순회하면서 연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곧 이번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동양이 서양을 연주한다'는 찬사와 '현의 마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정열적이고 도전적이면서 동시에 깊이 있는 음색을 가진 그녀가 5년 만의 무대에서 어떤 연주를 들려줄까.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사용했던, 따뜻하고 신비한 음색을 내는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에 관객들은 귀 쫑긋 세우고 기다리는 중이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