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 셰프, 최현석3년간 600여 개 창작 요리 선보여… 뉴욕, 도쿄 진출 목표

음식에는 만든 사람의 성향이 소름 끼칠 만큼 정교하게 묻어난다. 실팍한 재료를 아낌없이 집어 넣되 지식이 부족해 너무 끓여 흐물흐물해진 음식은 엄마의 것이다.

깔끔하고 세련됐지만 진한 맛이 없어 배 불리지 못하는 음식은 여태껏 싱글인 이모의 것이다. 떨이로 파는 식재료를 대충 넣고 맛이 제대로 나기도 전에 불에서 내린 음식은 아내를 원하는 노총각의 자학적 시위다.

그가 먹는 음식이 곧 그 사람을 말해준다면 그가 만드는 음식도 다르지 않다. 그럼 이런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찹쌀떡을 '앙' 깨물면 팥 앙금 대신 블랙 트러플이 나오고, 김치 옆에 두부를 네모지게 썰어 놓았길래 먹었더니 생 모짜렐라 치즈고 (알고 보니 그 김치도 앤다이브를 토마토 소스에 버무린 것이고!), 셔벗에서는 와사비 향이, 크림의 정체는 대파, 톡 터지는 캐비어에서는 장미즙이 나오는, 한 입 먹을 때마다 뭔가 뒤통수를 맞는 듯한 음식들 말이다.

치즈로 만든 떡국, 거위간으로 만든 크림

"저기 지나가는 머리 묶은 남자 보이세요? 한 눈에 다른 사람들하고 확 구분되죠? 제가 원하는 게 저런 거에요. 남들과 다른 것. 남들이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 하는 걸 정말 싫어해요."

가로수길 '엘본 더 테이블'의 헤드 셰프인 최현석은 최근 책을 한 권 냈다. <최 셰프의 크레이지 레시피 39>는 그의 '정신 나간' 시도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겉모습은 크림 수프인데 맛을 보면 삼계탕이라든가 떡 대신 치즈를 썰어 넣어 떡국을 만드는 '미친' 요리는 지난 3년간 그가 일한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 실제로 올라 미식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메뉴들이다. 단골에게 뭔가 새로운 음식을 보여주고 싶어서 시작했던 창작 요리는 그의 반골 기질을 타고 점점 더 과감해지고 실험적으로 변해갔다.

"요리를 하다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 음식에 오렌지 주스를 써보면 어떨까 같은 엉뚱한 영감이 찾아오죠. 그걸 그냥 지나치느냐, 아니면 머리 속에 있는 발상을 완벽한 결과물로 구현해느냐에 따라 천재와 범인이 갈리는 거에요."

그의 영감의 근원은 터무니 없이 일상적이었다. 영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아버지 얼굴만 봐도 새로운 음식이 떠올랐다. 그가 만든 명란크림 무채 카펠리니는 명란젓을 좋아하셨던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것이다.

두부 김치 모양의 엔다이브 샐러드
명란의 짭조름한 맛과 크림의 부드러움, 여기에 코코넛 오일로 풍미를 더하고 물컹한 식감을 보완하기 위해 아삭한 무채를 더한 이 레시피는 하나의 공식이 되어 명란크림 파스타라는 이름으로 다른 레스토랑들로 퍼져 나갔다. 그 외에도 성게알 + 커피, 푸아그라 + 팥 등 한번도 어우러져 보지 않은, 그래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식재료들이 그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엉뚱함, 발상의 전환, 장난기로 가득한 최현석의 스타일 때문에 한때 분자 요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는 장미즙을 알긴산에 방울방울 굳혀 가짜 캐비어를 만들거나 거위 간에 질소 가스를 주입해 크림으로 만들어 버린 뒤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하는 손님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길 좋아했다.

이탈리아 음식을 하면서도 입맛은 지극히 토속적인 그의 성향이 더해지자 결과물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찹쌀로 빚은 옹심이 수프가 만들어졌고 미역 냉국 맛 셔벗과 콩고물을 묻힌 마쉬멜로 인절미가 탄생했다. 재기의 절정을 보여준 것은 두부 김치였다.

생 모짜렐라 치즈로 두부의 모양을 만들고 절인 앤다이브에 라즈베리와 토마토 퓌레로 속을 넣어 겉절이 김치의 모양을 표현한 (채친 바질로 실파의 비주얼을 대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음식은 치즈, 토마토, 바질이라는 전형적인 이탈리안 재료들로 재현한 한국의 안주상이다. 보고 있으면 기발하다는 생각을 넘어서 앙큼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크레이지 레시피는 3년간 600여 개를 넘어섰다. 당연히 뼈아픈 실패작도 있었다. 장미즙을 즐겨 사용하는 그는 장미 수프라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곧장 실행에 옮겼는데 연두부에 장미즙을 매치한 결과 비누 비슷한 맛이 나는 바람에 미련 없이 접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실패작이 10개 중 1개 꼴이었다는 것이다. 닥치는 대로 6000개쯤 시도하다가 600개의 성공작을 건진 것이 아니다. 재료가 가진 맛, 질감, 온도, 색깔이 어떻게 어우러질지는 이미 머리 속에서 계산이 끝났다. 이런 것은 분명히 재능에 가깝지만 그는 오랜 숙련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노가다가 반드시 필요"하다.

본격적으로 창작 요리를 시작하기 전 그는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13년 동안 일했다. 당시 그를 가르친 스승은 현재 경로단길에 있는 스테이크 하우스 비스테까의 오너인 김형규 셰프다. 맛있는 스테이크 하나에 주력하는 비스테까의 콘셉트가 말해주듯이 김형규 셰프의 철학은 '음식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였다.

가족에게 먹일 음식처럼, 재료 맛에 충실한 요리를 외치는 스승 밑에서 그는 고기가 어떤 온도에서 제 맛이 나는지, 면은 언제 재빨리 건져야 하는지, 오이는 어떻게 해야 제일 아삭거리는지를 묵묵히 배웠다. 그리고 나와서 탄생한 것이 장난기와 재치가 득시글거리는 크레이지 레시피라는 것은 진정 아이러니다.

세계 최고의 식당을 뽑는 'The World's 50 Best Restaurant Awards'의 6명의 한국인 투표권자 중 한 명인, 한 유명 미식 블로거는 최현석의 창작 요리를 두고 기본기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다.

"최현석의 음식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충만하지만 그를 단연 미슐랭 3스타급 셰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재료의 맛을 진하게 낼 줄 아는 요리사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재료끼리 조화를 이룰지 뿐 아니라 어떻게 조리해야 서로의 맛을 해치지 않을지를 잘 안다. 여기에 기발함과 아름다움까지 더해지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주방의 악마라고 불리는 홍콩의 천재 셰프, 앨빈 렁과 비슷하다."

비교를 거부하는 당돌함, 그 당돌함이 무색하지 않은 창의성, 창의성을 떠받치는 맛에 대한 집착. 최현석은 스타 셰프가 전무하다시피한 한국에서 3500여명의 팬을 거느린 스타 셰프가 되었다.

한국의 작가주의 셰프 1호

"갈수록 책임감을 많이 느껴요. 내 어깨에 딸린 숟가락 개수만 생각하면 잠이 안 와요."

그는 원래도 가벼운 사람은 아니다. 고집스럽게 원칙을 중시하고 스스로 그것을 어기면 "쪽팔려서"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재료값이 전체 매출의 반을 차지해도 낑낑거리며 끌고 가는 전형적인 '쟁이'다. 그러나 요즘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부담감을 느낀다. 어쩌다 어린 학생들이 찾아와 밑에서 일하고 싶다며 자신을 롤 모델이라고 부르기라도 하면 뒤통수를 얻어 맞는 것 같다고 한다. 이제는 꼼짝없이 도망도 못치고 앞만 보고 달려야 할 판이다.

그의 최종 목표는 당연히 세계다. 도쿄, 뉴욕 등 유명 미식 도시로 진출해 되든 안되든 주먹이라도 한 번 휘둘러 보겠다는 포부다. 지금 그가 있는 엘본은 세계 진출을 위한 총알을 장전하는 자리다. 외국인 손님들을 대하며 그들의 취향을 면밀히 연구하고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지난 해 말 열린 한식 세계화 행사에는 피에르 가니에르를 포함한 세계적인 요리 거장 4인이 방한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색다른 조합, 발상의 전환, 스토리 텔링이 전부 갖춰진 완벽한 요리를 선보였다. 상상력의 극한까지 동원돼 국적이 희미해지고 만드는 이의 인생 전체가 담기는 이런 음식을 두고 '작가의 요리(Cuisine of Author)'라고 한다.

한식 세계화의 한쪽 팔이 한식의 정체성을 지킨 '음식의 진출'이라면, 다른 한쪽 팔은 재능 있는 한국 작가주의 셰프들을 필두로 한 '사람 진출'이 될 것이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조선 바닥에서 서양 요리로 구른' 최현석은 그 꿈을 가장 먼저 실현시킬 셰프 중 한 사람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