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건동 화백심의(心意)로 그린 난(蘭) 세상 정화… 김연아 소재 작품 선보여

50년간 '난(蘭)' 치기 외길을 걸어 온 방정(芳井) 한건동 화백의 전시가 은은한 난향의 여운을 전한다.

'묵란 향훈 가득한 50년 세월'을 주제로 5월10일까지 서울 프레스센터 서울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는 한 화백이 심혈을 기울인 50여 작품이 안복(眼福)과 더불어 마음까지 정화시켜 준다.

이는 한 화백이 난을 대하는 태도와 작화하는 방식에서 우러나온다. 한 화백은 새벽에 난을 친다. 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치는' 것은 손과 붓이라는 도구적 작업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피어난 난을 단지 옮길 뿐이다. 추사 김정희가 "화풍 또한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해야 한다"는 말을 한 화백은 몸소 실천해 온 것이다.

전시작 중 특히 눈에 띄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금메달리트 김연아 선수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도 한 화백의 기품이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다. 김연아의 연기 장면을 사실감 있게 그려낸 묵화 위에 난을 친 작품은 김 선수의 우아한 모습과 춤추듯 살아숨쉬는 난을 아름답게 조화시켰다.

주목되는 것은 작품 속 '빙상무미인 여 무풍난지천(氷上舞美人 如 舞風蘭志天)'이라는 글인데 '빙상 위에 춤을 추는 여인의 모습이 바람결에 춤을 추는 난의 뜻이 하늘에 있는 것과 같다'는 뜻에 새겨진 '지천(志天)'이다.

"새벽에 난을 치기 전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 소식을 들었어요. 문득 하늘을 바라보다 '하늘의 뜻'이라 생각했죠. 난을 치는 것도 내가 아닌 무언가의 끌림에 의한..., 그게 하늘의 뜻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直指)와 청주의 대표명소 상당산성을 밑그림으로 한 묵란에선 소박한 애향심이 묻어난다. 고향 청주에서 평생 붓을 잡은 한 화백은 "내 고장의 대표적 문화코드를 묵난에 삽입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세 여인을 배경으로 한 '남여옥귀인(蘭女玉貴人)'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한 경구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한 화백은 특히 난을 배경으로 묵란을 친 '풍란(風蘭)'에 애정을 나타냈다. 난의 부드러움과 강함, 바람에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가는 지조, 담백함을 담은 작지만 기(氣)가 충만한 작품이다.

그러고 보면 한 화백의 묵란은 그의 인생과 닮아 있다. 한 화백은 고교 시절 서양화에 관심이 많았으나 대학 졸업 후 언론사 기자로 활동하고 청주 '시민극단' 창단멤버로 연극에 몰두하다 26살에야 난을 만났다. 기자 시절 강원도 원주의 한 동양 화가를 취재한 게 계기였다.

"'난은 모든 잡념을 씻어낸 후에야 그려지는 것'이라는 선생의 말씀은 늘 가슴에 남았죠. 어려울 때면 이 말을 떠올리곤 했는데 묵란을 치면서 평정심을 찾게 되고 난에 전념하게 됐어요."

하지만 난은 한 화백에게 쉽게 다가서지 않았다. "난(蘭) 10년, 죽(竹) 3년이란 말이 있잖아요. 그만큼 난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힘들다는 얘기인데 실제 그랬습니다."

한 화백은 난을 잘 그리려는 욕심,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사심, 과시하려는 집착을 다 버린 후에야 난을 제대로 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초야에 묻혀 난화(蘭畵)와 싸운 10년 가량 돼서야 자신만의 난, 즉 '난향(蘭香)'을 피울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단아하면서도 곧고, 소박하면서도 여유롭다. 가늘고 섬세하면서 깨끗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의 난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심신이 정화됨을 느끼게 해준다. 운보 김기창은 "여인의 그림처럼 너무 섬세하고 깨끗하다"며 한 화백에게 남성성을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화백의 난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난은 난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심상에 다가오는대로 깨끗하고 담백한 그대로의 난을 쳐야한다는 게 한 화백의 소신이다.

50년 가까이 난을 친 그이지만 전시회를 연 것은 2001년부터다. '세상에 내놓을 만한 작품이 못된다'며 전시를 고사하던 한 화백은 "결식 아동을 위해 전시회를 열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전시를 했다.

그의 전시에는 늘 소년·소녀 가장, 결식아동, 장애인, 독거노인, 이주여성, 북한어린이 등을 돕는다는 자선행사 취지가 붙는다. 매년 2~3회씩 전시를 열어 수익금을 불우이웃 돕기에 내놓는다.

난을 칠 때 욕심을 버려야 하듯 세상사 사욕을 버릴 때 여유로와지고 행복해진다고 한 화백은 말한다. 남을 돕는 생각은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고 이는 난을 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강조한다.

조선말기의 시인 신위(申衛)는 '난초는 그려도 향기를 그리기는 어려운데 향기를 그린데다 한마저 그렸다'고 한다. 한 화백의 난은 그의 내면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관과 자세까지 일러주고 있다. 그래서 한건동 화백의 50년 외곬 인생에서 피어난 묵란은 현대인들에게 자기 정화의 향훈을 전한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