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규 화백60년 화업 회고전 성황… 생명에 대한 외경 자유 표출"추상·구상 떠나 내 작품의 일관된 가치는 휴머니즘"

지난 13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한 원로 작가의 미술 역정을 기리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정문규(76) 화백의 60년 화업을 정리하는 회고전(5.13~21)을 축하해주기 위해 원로‧ 신진 작가와 정 화백의 제자 등 5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룬 것.

김흥수‧박서보‧하종현‧오승우 등 원로 작가를 비롯해 이구열 미술평론가, 박용인 상형전 회장, 제자를 대표한 남궁 원 경원대 교수 등은 축사와 덕담으로 정 화백의 전시를 축하하였다.

이렇게 많은 미술인들이 정 화백의 회고전에 참석한데는 그가 미술인으로 귀감을 보여온 게 가장 큰 이유지만 큰 병마를 극복하고 미술인으로 다시 서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한 것도 적잖이 작용했다.

18년 전 정 화백은 말기 암 판정을 받고 시한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극적으로 되살아나 화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정 화백은 미술에 대한 의지, 창작을 향한 열망이 병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고 모두들 공감을 나타냈다.

'황색의 향연', 2009
정 화백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인 교장이 전교생 앞에서 "정문규는 나중에 동경예술대학에 가서 그림을 배울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통했다.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사범학교에 진학해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2년 동안 교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홍대 미대에 입학했다.

정 화백은 1955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최근까지 20회 넘게 개인전을 가졌고 미술공부를 더 하기 위해 1968년과 1980년 일본과 프랑스로 유학하기도 했다. 1966~1999년 인천교대(현 경인교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뒤 정년퇴임했다. 정 화백은 1992년 암 진단을 받을 때까지 30년 동안 일주일에 16시간씩 강의를 하면서 1년에 50~60편의 그림을 그렸다

정 화백의 제자들이 마련하고 월간 미술세계가 후원한 화업 60년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전시중이다. 정 화백의 작품세계 변화를 기준으로 1950~60년대의 추상작품 20여 점과 1970~80년대의 이브(EVE) 시리즈 등 구상적 표현 작품 30~40여 점, 1990년대 이후의 자연 이미지의 형상화 표현 작품 20여 점이다.

이러한 구분에 대해 정 화백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언급하며 깊이를 더해준다. "내가 50~60년대 그린 추상 작품은 완전한 추상은 아니에요. 구상적인 형태가 추상화한 것이죠. 그 구상성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형상이 많은데 그 당시 내 안에 잠재적으로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인본주의적인 생각, 즉 휴머니즘 때문이었지요."

정 화백은 우리나라 풍토적인 황토색을 쓴 것도 인간적인 형상을 가미하려고 시도한 것이라고 한다. "구상, 추상을 떠나 인간의 문제는 늘 내 머릿속을 맴도는 주제였어요."

'신기루', 1960
1970~80년대와 90년대 중후반까지 정 화백은 이브(EVE) 시리즈로 대변되는 '누드'로 주목을 받았다. 13일 회고전 개막 행사에서도 정 화백의 '누드'는 미술인들에게 줄곧 회자됐고 관람객의 발걸음이 가장 오래 머물렀다.

"일본 동경예술대학에서 공부하면서도 계속 인간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예술에 있어서의 에로티시즘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동경에 있을 때 법륜사 벽화를 복원해 놓은 그림을 보면서 선을 비롯한 모든 것에서 굉장한 관능성을 느꼈는데 그것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해내면 인간의 마음에 아름답게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정 화백은 누드 연작에 대해 "나의 상대적인 성(性)인 여(女)를 통해서 거짓 없는 원초적인 참모습을 구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만한 설득력을 지니는가의 시험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그 속에서 무한한 내 특유의 자유를 누리고 거기에서 창조적인 활력을 얻으려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누드라는 대상을 단순한 표현의 객체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주체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정 화백이 인체에 다가간 색을 우리 색, 조선시대 초기 백자의 흰색을 사용한 것은 그런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90년대에도 누드 작업은 계속되지만 정 화백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경계선 너머의 마을 풍경, 항구(배), 그리고 꽃으로 옮겨진다. 그가 누드를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자기해방'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EVE 77-20a', 1977
정 화백의 화풍은 92년을 전후해 크게 바뀐다. 생명과 자연의 경이로움과 조화로움을 원색의 찬연한 색채와 거침없이 역동적이고 격정적인 운필로 토로하는 것이다.

"92년도 대수술을 하고 살아났을 때 다시 살게 된 것에 대한 감사하면서 그런 것들이 내 마음에 굉장히 밝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자연에 대한 경의로 표현되고 색이 밝아지면서 화려하고 선명한 색을 많이 쓰게 됐어요."

전시장의 최근작은 봄이나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붉고 노란색들이 원색적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 작품에 일관되게 관류하고 있는 가치는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자연에 대한 경외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전시도 제자들에게 그런 가치를 가르친 보답이 아닌가 생각해요."

정 화백은 요즘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작업을 한다. 작년 6월에 개관한 경기도 안산 대부도의 ''에서는 그의 부지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표출하는 그의 작업은 작품 너머 정 화백을 만나고 싶게 한다.

정문규미술관
은 …
경남 사전 출생(1934), 진주사범학교 졸업(1947~1953), 홍익대 미대 졸업(1954~1958), 일본 동경예술대학 대학원 유학(1968~1970), 인천교대(현 경인교대) 교수(1966~1999) 개천예술제 문교부 장관상, 개천예술제상 수상(1947~1953), 제3회 최영림 미술상 수상(1994), 제18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1999), 단원미술제 운영위원장(1999~2000), 제33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미술부문수상(2001), (사)한국미술협회 고문(현재), 상형전 고문(현재)


정문규 화백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