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배명훈<안녕, 인공존재!> 출간 장르와 본격문학 경게에 선 작품 주로 선보여

출판시장, 그 중에서 문학시장만 두고 볼 때 한국은 독특한 구조로 이뤄져 있다. 교과서에 실리는 박완서, 김훈 등의 문학작품이 시장을 석권하는 사례는 해외에서 보기 드물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마니아층도 형성하는 움베르토 에코 같은 작가가 있지만, 국내에서만 200만 명이 열광한 <다빈치 코드>가 노벨상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을 테니까.

이 기준이 아마 문학에서는 '차이'를 정하는 기준일 터다. 당대 저속한 저널리즘은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 노벨상 발표 시즌 때 거론되는 작품을 본격문학이라 말하고, <다빈치 코드>와 같은 작품은 대중문학으로 구분짓는다.

여기다 한국에서는 '문단문학=본격문학'이란 암묵적 동의 아래(이 기준은 누가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비평가와 문학기자가 글을 쓴다.

이런 구도에서 소설가 배명훈의 '포지션'은 독특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이 본격문학과 대중문학 사이를 오가는 작가다. (대중문학과 장르문학이 꼭 겹치진 않지만, 이 차이를 논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한 바, 장르문학의 문법이 본격문학보다 더 대중성을 띤다고 해두자.)

유쾌한 상상력의 크로스오버

지난해 그가 연작소설집 <타워>를 발표했을 때, 그는 '문단 바깥에서 발견된 이단아'의 이미지로 알려졌다. 그는 SF 장르문학 작가로 웹진과 <판타스틱>같은 장르문예지에 글을 연재했고, 자신의 첫 단독 창작집이 나오기 전 이미 복수의 작가들과 함께 여러 권의 창작집을 묶었다. 그리고 <타워>로 문단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고, 출판사 문학동네가 주최한 제 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등단 10년 이내 소설가 10명에게 문학동네가 심사, 수여한 일종의 단편 작품상이다.

말하자면 그는 신춘문예를 비롯한 이러저러한 공모전의 도움 없이, 문학적 작품성을 인정받은(본격문학의 기준에서), 그러니까 문단문학의 제도권에 들어온 특이한 작가였다. 박민규, 김중혁, 윤이형 등 장르적 코드를 자신의 작품에 투입하는 본격 문학작가들과 달리 그는 아예 장르와 순수문학 두 지형에 한 발씩 담그고 있는 크로스오버 작가인 것이다.

"전혀 다른 두 개의 독자층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작가는 말했다.

"그래서 실험하고 있어요. 장르출판사와 순수문학출판사, 각자가 생각하는 대중의 틀이 달라요. 분명 전체는 아니에요. 그걸(두 독자층을 만족시키는 것) 한번 해보고 싶은 거죠. 서로 다른 두 독자시장에서 책을 내고, 어떤 식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지."

그의 작품은 기발한 상상력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문체는 발랄하고 흡입력 있으며, 따뜻한 결말(대부분의 경우)은 책을 덮고 난 후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는 장르문학 작가의 강점이리라.

이야기가 마냥 가볍냐면 그렇지 않다. 인물들은 세계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도, 한 없이 긍정적이다(또한 작가 소설 대부분의 경우다). 그런데 인물의 긍정적 마인드가 본격문학권에서는 비판의 이유가 된다. 인물이 스토리를 끌어가는 데 기능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다 읽고 나면 캐릭터가 흐릿해진다는 것.

이건 장르문학 마니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 일터인데,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의 최대치란 세계의 구조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가 한 발을 딛고 있는 SF는 모름지기 4차원의 신세계를 다루는 장르가 아닌가. 작가는 말했다.

"제 위치가 문단과 문단 아닌 사이에 있는 것 같은데, 가장 부딪치는 지점이에요. 인물을 성찰하는 깊이."

안녕, 인공존재!

얼마 전 발간된 <안녕, 인공존재!>는 지난 소설집 <타워>와는 또 다른 전압의 소설들이 묶여 있다. <타워>가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쓴 SF소설이었다면, 이번에 묶인 소설은 장르와 본격문학, 경계에 선 작품이 주를 이룬다.

"두 작품집의 소설 특징이 전혀 다르다"는 감상평에 작가는 "발표한 소설 전체 스펙트럼에서 일부분을 뽑은 것"이라고 말했다.

"<타워>가 제가 쓴 모든 작품에 연장선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이 작품집도 그래요. 웹진이나 잡지에 발표한 단편이 30편쯤 되는데 각각 다 달라요. 그래서 계속 <타워>같은 작품을 쓸 거라고 기대하는 독자를 맞추기는 힘들어요."

그 스펙트럼의 일부란 어떤 것인가. 우선 표제작 <안녕, 인공존재!>. 이 소설에는 겉보기엔 돌멩이와 다름 없는 제품, 하지만 전원을 꽂으면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철학 명제 '코기토 에르고 슘(Cogito ergo sum)', 즉 끊임 없이 의심하기, 의심을 통해 제 존재 증명하기를 수행하는 '인공존재'가 등장한다. 단, 출력기능 없으니 전원을 꽂으면 이 기계는 '코기토 에르고 슘'만 한다. 불을 지피거나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하는 기능성 제품이 아니고, "말하자면 존재성 제품"인 것이다.

이 밖에 중국 첩첩산중의 시골에 설치된 몇 백 미터짜리 크레인(단편 <크레인 크레인>),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이 커진 1급 저격수(단편 <얼굴이 커졌다>), 천동설을 믿는 과학자 부모를 둔 소녀(단편 <엄마의 설명력>) 등 가상 세계 속의 상황, 평범한 이야기 속의 발랄한 상상이 돋보이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4차원의 세계로 뻗어가는 그의 상상력은 다시 존재와 본질의 탐구로 수렴된다.

단편 <매뉴얼>은 6살 꼬마가 핸드폰 매뉴얼을 보며 책읽기 놀이를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이 꼬마는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이 이야기가 사뭇 심각하다.

'마로하가 악마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을 파멸시키는 문은 언제 열리나요?" 악마가 말했습니다. "벌써 열렸어. 너의 뒤에 다가오고 있단다." (…) 그런데 마로하가 누구였더라. (…) 내가 발견한 것은 무슨 우리말 어원사전에 있는 단어 설명이었다. '마로하'는 '마로+하'의 구성임. '마로'는 '頭'의 '마리'의 합성어 '마라'의 전운임. '하'는 '님'이란 존칭사임.'(143~154페이지, <매뉴얼> 중에서)

어느 작가에게나 작품을 관통하는 화두는 있을 터, 이 화두가 누구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누구에게는 세계에 대한 질문이며, 혹자에게는 언어에 대한 탐구일 터, 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가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그가 에둘러 말했다. "글을 쓰면서 점점 더 밝아지는 것 같아요"라고.

"저는 기분 좋을 때 주로 쓰는 편이고. 우울할 때는 놀아요. 빨리 기분을 업(up)시키려고. 그리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이걸 나중에 (작품에)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럼 한 발 물러나고 구경하는 관점이 돼요. 오래 되면 독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작품을 쓰면서 괴롭지가 않아요."

이야기 끝에 남는 한 줄기 페이소스는 아마 인간에 대한 작가의 '무한 긍정'이 아닐까.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