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다리> 전수일 감독한국 전쟁 때 만남과 상실의 장소에 10대 미혼모의 사연 녹여

전수일 감독의 카메라는 잊힌 장소를 담는다. <검은 땅의 소녀와>의 무대는 강원도 폐광촌이었고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속초의 뒷골목을 방랑했다. 고적한 그곳은 관광지가 아니었다.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에서는 히말라야 설산의 외딴 마을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만다.

에피소드가 많지 않은 그의 영화에서 장소들은 그 자체가 줄거리다. 주인공이 걷고 머무는 여정을 둘러싼 지형지물은 색이나 구성으로서뿐만 아니라 각각의 형편과 역사로 보인다. 철거를 앞둔 건물의 황량함, 가난한 마을의 관습 같은 것들이 주인공의 몸과 마음에 밴다. 어느새, 혼연일체된다.

이는 장소에서 영감을 얻고, 그곳에 가서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전수일 감독의 작업 스타일에서 비롯한다. "장소가 인물의 성격,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장소를 도구로 동원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인물이 걷고 머묾으로써 잊혔던 장소들은 비로소 '땅'이 된다. 사람들이 모이고 오래 뿌리내려 하나의 삶의 방식을 만들었고, 삶에 대한 질문을 간직한. 전수일 감독의 주인공들이 제각각 내면을 탐험하는 여정이 생략되었던 인류와 사회의 한 면에 대한 지도 그리기인 까닭이다.

7월1일 개봉한 <영도다리>는 부산 영도다리를 담았다.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가족을 만날 약속을 했던 단골 장소다. 그만큼, 또, 많은 약속이 깨졌을 것이다. 전수일 감독은 영도다리에서 '상실'을 보았고 여기에 아이를 낳자마자 입양 보낸 19살 미혼모의 사연을 녹였다. 그녀가 아이를 다시 찾아가는 여정이 영도다리의 현황과 겹친다.

버려진 배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깃들고, 비명횡사와 폭력이 돌출하는 곳이다. 그러나 인상은 무섭기보다 애달프다. 그 전경이 곧 한국사회의 한 역사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오히려 무서운 것은 비극이 비극인 줄도 모르고, 잊힌 것도 삶의 일부인 줄 모르고, 용도폐기된 땅에서도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모르고, 그로 인해 스스로 사라지고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아이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않고 입양 서류에 지장을 찍은 19살 소녀 인화는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부모에게 버려진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이 잊힌 장소를 뚜벅뚜벅 오래 걷고 나서야 희망을 찾아볼 의지를 갖는다. 상처와 상실을 정면돌파한 이에게만 내려지는 축복이다. 전수일 감독의 영화는 사라지는 것들을 돌아보는 윤리를 가르쳐준다.

이 영화는 곧 사라질 영도다리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이기도 하다. 지난 6월25일 만난 전수일 감독은 "영도다리 근처 조선소와 폐선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한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첫 장편인 <내 안에 우는 바람> 이후 15년 만에 다시 영도다리를 찍으셨습니다. 많이 변했던가요.

건어물 시장이며, 조선소며 다리 밑 가게와 계단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더라고요. '물레방아 횟집' 주인이 "또 영화를 찍으러 왔냐"고 알아볼 정도였어요.(웃음) 우리가 너무 빨리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영화 '영도다리'
영화를 보며 부산에 저런 곳이 있었던가, 싶었습니다. 영도다리에 애착을 가지시는 이유가 있나요.

처음 부산에 갔을 때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가장 부산다운 곳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전쟁 때 만남과 상실의 장소였다는 것이 이번 영화 주인공의 이야기와 맞아 떨어지기도 했고요. 곧 사라질 영도다리를 기록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직접 오랫동안 꼼꼼히 둘러보시지 않았다면 담길 수 없는 것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흔히 보여지지 않는 버려지고 빈 공간들도 담겼고요. 시나리오를 어떻게 쓰셨는지요.

원래 공간을 찾아다니며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편이에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공간이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을 대변하게 되죠. 제 영화에서 공간은 곧 삶의 방식이에요. 공간의 중요성은, 여행갈 때를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죠. 바뀐 공간을 통해 새로운 방식과 태도를 익히게 되잖아요. 황폐한 공간들은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게 합니다. 녹슬고 바랜 것들도 삶의 한 부분이니까요.

버려진 배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실제로 영도다리 아래 폐선에 노숙자들이 살아요. 영화 속에 나오는 남자는 정장을 입고 다니는데 그건 그가 실직했다는 뜻이죠.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에요.

입양이라는 소재는 개인적 경험에서 얻으셨다던데요.

20년 전 프랑스로 유학을 갈 때 두 살 짜리 입양아를 양부모에게 인계한 적이 있어요. 헤어지는데 제 팔을 꽉 잡더라고요. 그게 잊혀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입양아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준비했어요. 그런데 자료 조사 중 자신의 아이를 입양 보낸 미혼모의 이야기로 방향을 바꾸었죠. 매해 2000명 이상이 입양되고 있고 아이를 입양 보낸 이들 중 90% 이상이 15~18살 소녀들이라고 해요. 입양기관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그들이 아이들에게 써 놓은 글이 있어요.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런 말들이 너무 애절하게, 본능으로 느껴졌어요.

주인공이 10대 소녀인데, 그 나이대 여성의 정서를 그려내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실을 기본 정서로 뒀어요. 그리고 요즘 10대를 둘러싼 무관심과 냉담함, 폭력성 같은 분위기를 상기시키려 했고요. 주인공 주변에서 일어나는 폭력적 상황, 영도다리에서 벌어지는 느닷없는 죽음 같은 설정이 그녀가 아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입양 보내는 무관심과 떨어져 있지 않죠.

감독님 영화에는 종종 한국전쟁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인상입니다. 그 경험이 지금 한국사회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부모님이 이북 출신이세요. 속초에서 자랐는데, 윗세대의 90% 이상이 함경도 출신 실향민이었죠. 그래서인지 전쟁에서 비롯한 상실의 아픔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주인공을 가족도, 의지하거나 의논할 데도 없이 혼자 있게 하신 이유가 궁금했어요.

실제로 혼자인 10대들이 많아요.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죠.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이 프랑스로 입양된 자신의 아이를 찾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치유 혹은 희망이라고 봐도 될까요.

사실은 마지막 장면을 뺄까 고민했었어요. 하지만 작은 희망은 남겨주고 싶었죠. 아직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어도, 그렇게 찾아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찾는 과정이니까요. 그녀는 성숙해진 거죠.

그런데 왜 프랑스를 선택하셨나요?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은 프랑스의 한 휴양지에요. 눈이 사람 키만큼 쌓여 있는데, 그 눈이 또 그렇게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곳이죠. 영도다리와 대비시키고 싶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노르웨이나 그린란드를 떠올렸지만 제작비 문제 때문에.(웃음) 주인공이 세상의 끝까지 가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