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환 시인7번째 시집 <마네킹과 천사>… 죽어있는 것들과 죽어가는 것에 초첨
장르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을 발표 순으로 나열해 보면 하나의 포물선이 그려지는데, 젊은 시절 맹렬한 투쟁과 냉소의 시기를 거쳐, 나이를 먹으며 그 형태가 점점 더 단순해지고 따스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마치 궁극의 지점을 향해 달려가듯이. 그러니 아이와 같은 이 단순함은 역설적으로 깊은 연륜의 예술가만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절벽 앞에서
조창환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마네킹과 천사>가 출간됐다. 2004년 <수도원 가는 길>을 내고 6년 만에 펴낸 시집이다.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후 그는 꾸준히 시를 발표해 왔다. 그 시는 어떤 모양새를 지녔나. 시인에게 물었다.
이후 발표한 6번 째 시집 <수도원 가는 길>은 문학 강연 차 떠난 미국에서 쓴 여행시가 묶여 있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 선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조형했다. 자연 속에서 함께 뒤섞일 수 없는 소외감을 고요, 고독으로 읽어낸 그 시집에서 시인은 범접하기 힘든 자연에 대한 외경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다.
이렇듯 시인은 신(神)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표현해 왔다.
'절벽 앞에서 길을 찾는다/ 천길 낭떨어지 앞에 곧게 서서/ 신발 끈 고쳐매고/ 허리띠 졸라매고/ 숨 깊이 들이켜면/ 완강한 허공도 한순간이다(…)이제부터 한순간 허공에 솟구쳐/ 맞은편 바위 위에 서기만 하면/ 허공에서 하느님이 저를 붙드사/ 거기에 내려놓은 줄 알겠사오니// 절벽 건너서 길을 찾거든/ 쓰임새 있는 곳에 쓰시옵소서' (시집 <피보다 붉은 오후> '절벽 앞에서' 중에서)
일상의 공간에서
6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 모양새는 어떻게 변했나. 시인의 이야기를 듣기 전, 새 시집을 펼친다. 시인의 시세계는 그 제목이 표상하는 바, 이 '마네킹'과 '천사'가 의미하는 바를 나름대로 곱씹어 본다.
'마드모아젤 양장점 앞을 십 년 넘게 지나다녔어도/ 쇼윈도 안의 마네킹 셋이 서로 흘끗거리는 건/ 오늘 아침 출근길에 처음 보았다 (…) 은사시나무, 여름 달빛에 흔들리는/ 잎맥 가늘고 여린/ 바비 인형 같은 마네킹은 고개를 숙이고// 안 보는 척하면서 눈길을 주고 있다/ 입술 삐쭉 내밀며 아랫도리 오므리는/ 저것들이 구미호 다 된 줄을/ 오늘 처음 알았다' (시 '마네킹' 중에서)
그에게 문명이란 것은 죽은 플라스틱 인형 같은 것, 그런데 이 마네킹이 어느 날 살아서 표정짓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 해설을 쓴 문혜원 평론가는 '이전의 시들이 삶의 향기에 매혹된 시인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시집의 시들은 죽어있는 것들과 죽어가는 것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시인은 말했다. "최근 3~4년 동안에는 죽음이란 존재를 객관화시켜 보려고 했어요. '죽음이 괴로운 건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그렇지, 죽음 자체가 그럴까…'하는 생각에." 이번 시집의 가장 큰 변화라면 이 시선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 이미 죽어 영안실에 안치된 사람을 보며, 시인은 죽음을 정면으로 인식하고 있다.
'웃고 있네, 저 얼굴/ 흰 국화 가지런히 꽂힌 노 없는 뱃전에 앉아/ 목탁 소리, 연도 소리, 찬송가소리/ 양재동 꽃시장 튤립 다발 같은/ 삼성병원 영안실 복도/ 바라보며 웃고 있네, 저 얼굴' (시 '웃고 있네' 중에서)
이번 시집의 또 다른 표상인 '천사'는 어떤가.
'지하철 4호선, 사당역에서 미아삼거리까지/ 벙어리 애인 둘이 쉴 새 없이 지껄인다// 꽃병 든 손 모양 만들었다가/ 파도 안은 물새 모양 만들었다가/ 검정 저고리 입고 강 건너편에서 손짓하는/ 관음보살 닮은/ 처녀가 말간 암죽 떠먹는 시늉을 한다 (…) 뭐 도와줄 일 없을까 하고 기웃대던/ 자루옷 입은 천사는/ 늘어지게 하품 한 번 한 후/ 먼저 내린다// 애인 둘,/ 불쏘시개 같은 가로등 따라/ 날아오르겠지? 오늘 밤' (시 '애인 둘' 중에서)
그는 절대자 신이 아니라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를 그리고 있고, 이 천사는 항상 사람 옆에 있으면서 사람의 삶을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눈과 같은 존재다. 요컨대 시인은 여전히 신에 대해 경외감을 표하지만, 이제 그 믿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생활 속에 육화된 것이다.
그가 말했다. "너무 엄숙한 것 말고 세속적인 신성성에 관심이 있어요." 시집 뒷면에 실린 짧은 산문에는 저자의 못 다한 말이 압축되어 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 노동과 명상, 머묾과 떠남의 모든 시간과 장소도 영적인 세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그처럼 신비롭고 아늑하고 따뜻한 곳이다. 아니 소름 끼치도록 무섭고 아찔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삼가 근신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귀에 들리는 모든 것, 향기와 감촉을 주고받는 모든 존재는 조심스럽게 사랑하고 경외하고 받들 일이다.'
요는 우주 삼라만상이 영적 존재로 충만해 있고, 그러므로 그 모든 존재를 사랑하고 경외할 일이라는 것. 이 지난(至難)한 사색을 담아 시인은 시를 썼고, 또 쓸 것이다. 궁극의 한 점을 향해서.
'얼마나 더 이 길 걸어야 온유하고 정결한 그늘 만날 것인가.' (시인의 말 중에서)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